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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막뚱이 Sep 03. 2023

여행기-할머니의 여수 1

새로운 추억을 쌓으러 가다가, 오히려 잠들어 있던 추억이 소환되다



  가장 최근 다녀온 여행지는 여수다. 게장과 오동도, 여수 밤바다의 도시. 7월 초, 이른 여름 휴가를 다녀오기로 했다. 꽤나 가까운 관광지임에도 가족끼리 와본 적은 처음이었다. 하긴, 여행 시작한 지 3년도 채 안 되었으니까. 


  나는 사정이 있어서 집에서 같이 출발하지 못하고, 따로 출발해 여천역에서 합류했다. KTX가 폭우로 저속 운행하던 때라 마음을 졸이며 내려왔는데, 도착하자마자 긴장이 탁 풀려버렸다. 왠지 그럴 것이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닭과 할머니가 내가 내리는 방향이 아닌 반대편 방향, 즉 서울로 가는 방향 쪽 플랫폼에 앉아 있었던 것.


결국 기차역에서 내리자마자 얼싸안는 그런 감동적인 연출은 하지 못하고, 바로 닭에게 전화를 걸어 “나 반대편에 도착했어! 일단 내려와서 봐”라고 하고, 빵 터진 채, 호다닥 계단 타고 내려와 오히려 내가 내려오는 닭과 할머니를 기다린 끝에 기차역 1층에서 겨우 만날 수 있었다. 늘 집에서 같이 출발했는데 따로 만나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다고 생각하며, 우리 집다운 재회 장면에 웃음을 머금은 채 여천역에서 셋이서 택시를 탔다. 


  택시를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누구에게 먼저 말 거는 일이 없는 할머니, 분명 MBTI 퍄워I일 게 분명한 할머니가 대뜸 택시 기사님께, ‘중흥’에 대해 물어보셨다. “기사님, 중흥 아시오? 터미널에서 버스타고 가면 오래 걸리요?” 여수시 삼포면 중흥리. 아저씨는 중흥에 대해 매우 잘 안 다며, 차로 가면 얼마 안 걸린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버스비 1,500원이면 가냐고 당장이라고 찾아갈 기세로 세세하게 물으셨다.


  할머니에게 여수 지명이 술술 나와서 놀랐고, 동네도 포도시(=간신히) 끌차를 의지해서 걷는 할머니가 어딜 가자는 의지를 드러내서 두 번째로 놀랐다. 그러고 보니 언뜻 할머니가 할아버지랑 여수에 사신 적 있다고 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지역은 오래전 공장이 들어서면서 이미 오래전에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할머니는 그럴 것 같았다고 하시면서도 아쉬움이 역력했다.     


  호기심이 많은 나, 밥 먹는 내내 궁금해하다 숙소에 와서 여쭤보니,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무려 4년이나 여수에 사셨다고 한다. 그러면서 할머니께선 여수가 제 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라고, 아쉬워하셨다. 그때 사람들이 보고 싶어서 지금도 간혹 터미널 같은 곳에 가면 아는 얼굴이 있는지 두리번거린다고 하신다. 어쩌면 그동안 자주 목격되었던 할머니의 두리번거림은 할머니 역사에서 스쳐 지나갔을 만나면 어떻게든 반가울 사람들을 찾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신혼 시절도 아닌, 아이들 다 낳고, 아이들 다 학교 다닐 무렵, 부부 둘만 나와서 살게 되었다니, 신기한 이야기였다. 마치 한여름 밤의 꿈 같은.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대충 사연은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사이가 좋지 않아 서로 마찰이 있어 둘만 잠시 여수에 나가 살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4년간 살았는데, 만약에 시부모님이 부르시지만 않았다면, 더 오래 머물렀을 거라는 것. 마지막에 동네 주민들이 영 아쉬워하며 십시일반으로 200원, 그때 돈으로 큰돈을 손에 꼭 쥐여주셨다며, 그 후로, 대략 50년의 세월이 지나버렸지만, 그 세월 동안 마음속에 고마움을 간직해왔던 동네. 여수시 삼일면 낙포리. 중흥. 삼일면사무소. 할머니의 추억 속의 단어들. 오늘이 무슨 요일이었는지도 종종 종종 깜빡하시지만, 잊지 않았던 그 이름. 새로운 추억을 쌓으러 여행을 와서 찾은 건 오히려 한동안 장롱 안에 꼭꼭 들어 있었던 추억이었다. 





# 에필로그

벌써 가을입니다. 여름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서늘한 바람이 반가우면서도 살짝 아쉽기도 합니다. 분량 조절 실패로 여수 이야기는 빠른 시일 내에 이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환절기 건강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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