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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깨는 현석이 May 08. 2023

23.05.04 - 편안한 거

가진 게 나 밖에 없어서요

#1.

약을 타러 정신과에 갔다 왔다. 2주에 한 번씩 가는 게 보통의 주기인데, 6월에 가는 여행을 4월로 알고 약을 3주 치나 타버려서 꽤 오랜만의 병원이었다.

병원은 공사 중이라 옆건물에서 임시로 진료를 받고 있었다. 두 개의 방이 있었다. 하나는 약제실, 하나는 진료실이었다. 꽤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 간호사 선생님이 '김현석 님'을 불렀고, 나는 한 치의 의심 없이 약제실로 들어가 버렸다.


"어, 어 거기 아니에요!"


진료를 기다리던 사람들과 간호사 선생님들이 와르르 웃었다. 나도 창피함에 얼굴을 반쯤 가리고 같이 웃었다. 늘 어두운 표정의 사람들과 어두운 마음으로 갔던 곳이라 병원에 가면 기분이 좋지 않아서 웃는 게, 심지어 이렇게 다 함께 웃는다는 게 상상이 안 갔었는데 웃고 나니 좋았다. 뿌듯했다. 웃기기를 좋아하는 터라 뿌듯했다. 흠. 역시 나는 어떤 사람이든 웃게 할 수 있군. 내 바보 같은 면이 자랑스러웠다.


#2.

내 데스크톱은 집에 없다. 나에게 기꺼이 공간을 내준 활동가 선생님들의 공간에서 영상을 만든다. 나는 별도의 금전적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객식구처럼 밥도 같이 먹고 술도 가끔 같이 마신다. 아무도 없을 때는 엉엉 울기도 하고 한 번은 엉엉 울고 싶어 왔다가 선생님이 계신데 엉엉 울기도 했다. 그래서 나에게 소중하고 감사한 공간이다.


나는 큰 개 진수를 데리고 출근을 한다. 진수는 털이 많이 빠지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씩은 청소기를 돌린다. 밥을 먹으면 설거지를 한다. 요리도 재료준비도 내가 한 게 없기 때문에 설거지를 해야 마음이 편하다. 그것마저도 내가 안 할 때도 있다. 나는 많은 것을 받고 있다.


#3.

책을 정말 많이 읽으시는 선생님이 계신다. 나는 선생님께 종종 애정 어린 타박 비슷한 것을 듣는다. 보통은 내가 서투르거나 어설프거나 설익고 덜 영근 마음으로 함부로 행동하고 말하는 것에 대한 타박 비슷한 것을 듣는데, 오늘은 진지한 충고를 들었다. 늘 저자세인 탓에 오히려 해야 할 일을 놓치거나 과하게 감정적으로 침범하거나, 혹은 말로만 듣기 좋게 이야기하고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않는 무감각함 혹은 게으름. 그래서 오히려 선생님이 이야기할 것들을 말하지 못하게 된다는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왜 그렇게 맞추려고 애쓰는지, 편안하고 주체적인 것이 낫지 않은지 이야기했다.


쓰고 보니 이게 맞나 싶다. 마음에 남은 말은 너무 조심하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데 정작 해야 할 것들을 해야 할 때 잘 못한다는 말인데. 이렇게 말하신 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다. 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창피했고 속상했다. 정곡을 찔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곡을 찔린 느낌은 분명히 남았는데, 내가 찔린 마음이 뭔지도 모르고 있다.


그 와중에도 변명하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어디에서도 편안했던 적이 거의 없었는걸요. 어디 한 군데서라도 누구든 사이에서라도 소속감을 느끼고 편안하고 싶었지만 그런 적이 거의 없었는걸요. 혼자 외로웠던 긴 시간들로 변명하고 싶었다. 집에만 갇혀있을 수밖에 없었던 시간들을 모조리 꺼내놓고 엉엉 울고 싶었다.


보통의 성인. 나는 그 답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꾸준하게 많이 들어왔다. 보통의 성인이라면 이 정도의 판단, 이 정도의 고민, 이 정도의 결정과 행동은 할 수 있는데 나는 그렇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꾸준하게 여러 번 들어왔다. 그리고 아마 늘 쪼그라들어있는 마음이 그 이유일테다.


#4.

여기에서는 거절당하고 싶지 않다. 여기에서만큼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다. 이 마음들은 사실 어쩌면 비겁한 마음이었던 것 같다. 모든 마음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모조리 전가해버리고 있었던 것 같다.


#5.

감기에 걸렸다. 감기에 너무 자주 걸린다. 2주일 동안 각각 다른 증상의 감기를 1주일씩 앓았다. 열이 나고 오한에 며칠 정도 시달리더니 이후에는 기침과 가래로 조금 힘들었다. 병원과 주변에서 나의 생활 습관부터 약한 면역력까지 정말 많은 원인들을 추측해 주곤 하지만, 감기에 걸리는 건 너무 벅차서 이유를 생각할 힘이 부족하다.

일어나서 움직이기, 눈에 보이는 쓰레기 치우기를 연습하던 나는 일상을 꾸려나가는 걸 아직 매일 도전한다. 그러다 또 열이 나고 몸을 움직이기 힘든 느낌이 나면 생각을 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그래서 생각 없이 수월하게 일상을 꾸려갈 때도 있다. 고민할 여력이 없으면 몸을 바로 움직일 수 있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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