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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시 Apr 19. 2024

어쩌다 (      ) 마주친 그대

(      ) = 우연을 가장해


 사람을 만나면 만나볼수록, 알아보는 단계에서 끝나버리는 관계는 허무하고 갈증이 났다.

누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했는가. 나이만큼 견고해진 바운더리에 좋아하는 감정만으로 사랑을 시작하기엔 나는 너무 현실적으로 바뀌어버렸다.

휘몰아치는 마음을 소주에 마라탕으로 위로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리고 다음날 퉁퉁 부은 얼굴로 깡생수를 들이켜며 다짐했다.

‘그냥 이렇게 지지부진하고 머리가 더 아플 관계, 욕구 따윈 눈 감아버리고 그냥 누구보다 나 스스로를 내가 사랑해 주자.

그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내가 나를 사랑해 줄 테니 얼마나 충만하게 채워질까.‘


“야, 너 혹시 O 기억나니? 우리끼리 옆 매장일 때 얘네 우리 밑에 있었잖아.”

“그렇지. 내 밑에 얘 있고, 너 밑에 걔 있었지.”

“근데, 둘이 좀 어울리지 않아?”

“어? 오… 가만있어봐. 어울리는데? 괜찮은데?”


직장 언니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자리. 이번에도 소개팅인가… 하지만 아는 사람을 소개받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소개받는 사람과는 직접적인 대화를 나눈 적은 없지만 거의 7,8년 전 옆 매장에서 매니저를 하고 있어 서로 얼굴은 알고 있었다.

엑셀도 잘해서 주변에 도움을 줬었고, 즐겁게 일하고, 똑똑한 분이었던 거 같은데...


“근데 그분, 오래 만난 여자친구분 있지 않아요?”

“에이, 너만큼 오래됐을까. 그 여자친구랑은 진즉 헤어졌고. 1년 전엔가… 결혼까지 생각한다고 했는데 헤어지고, 아무도 안 만나고 있는 거 같던데.”

“호오…“

“너랑 나이도 같을 걸? 어때? 한번 만나볼래? “

“괜찮을까요?”

“뭐 일단 보는 거지. 같은 일하는 사인데 알고 지내면 좋지 뭐.”


 그렇게 일단 보기로 한 디데이.

그날 약속은 언니들이랑 민물 매운탕을 푸지게 먹으러 가는 거였다. 근데 나는 딱 붙은 연분홍 짧은 티셔츠에 치마를 입었다.

그가 일하는 곳에 들른다고 했으니 의식이 안되려야 안될 수 없었나 보다. (당시의 나는 재활 중이었어서 발에 보호대를 차고 있었다.)

새파란 깁스 보호대에 분홍색 치마. 누구보다 자기주장 강한 모습으로 몇 년 만에 마주한 그는 20대 시절에 스치며 봤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큰 키에 마른 체형은 그대로였지만, 뭔가 남성스러워진 것 같았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내가 그를 이성으로 만날 수도 있다고 하니 필터가 씌워진 것 같다.)


“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살가운 그의 인사.

“네.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시네요.”

“그럼요. 다 건너 건너 아는 사이니까. 수술하셨다는 얘기 들었어요. 다리는 좀 괜찮아요?”

“보시다시피.”

“아이고”


 언니들 각자한테 우리는 열심히 일하고 아끼는 후임들이었다.

이 짧은 대화가 뭐라고 언니들은 매운탕 집에서 그와 내가 인사할 때 스파크가 튀었다는 둥, 잘 어울리는 것 같다는 둥

우리 애는 어떻대, 얘는 어떻고를 얘기해 가며 서로 자식 자랑을 하듯 늘어놓았다. 나는 그녀들의 얘기를 가만히 들어보며 그의 성격을 그려보았다.

그는 나와 결이 비슷한 것 같았다. 인간관계 바운더리가 넓지 않고, 쉬는 날엔 혼자 있는 날이 많고, 성실한 것 같고… 부모님이랑 사이가 좋아 보이고...

크게 나와 어긋나는 부분이 없어 보이는 사람 같았다.




 이제와 깨달은 부분이지만 소개를 받을 때는 제삼자의 평가에 너무 귀를 열지 말 것.

처음에는 주선자나 주변의 말을 맹신하고 그 평가에 대입하여 소개팅 상대를 대한 적이 많았다.

상대가 소개받을 때 들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면 괜스레 이상해 보이고 혼란스러워 한 시절이 있었다.

사실 그 평가는 제삼자가 바라본 모습일 뿐이다. 그가 주변인들에게 어떻게 행동하냐에 따라 보이는 일부의 모습일 뿐, 실제 그 사람의 모습과는 다를 수 있다.

소개를 받는다는 것은 주선자정도의 관계가 되려고 소개받는 게 아니지 않나. 분명 내가 노력을 더 들여가며 알아가야 할 모습들이 있다.

그러니 첫 만남의 느낌이 이상하지 않다면, 성격은 모르겠지만 외적인 부분이 나의 호감을 사고 있다면, 아니 뭐 하나는 굉장히 괜찮다면 두세 번은 더 만나보았으면 좋겠다.

(너무 첫 번째 만남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고 판단해 버린 나와 같은 오류는 벌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고는 또 한 번 어쩌다를 가장한 만남. 동네 텃밭에서 친한 회사 사람들과 삼겹살 파티를 하고 있는 중, 그가 나타났다.

모임 초반에 그의 사수인 언니가 그에게 오라고 연락을 했지만, 근무 중이라고 답해서 시간이 안 맞겠거니 하고 별 생각이 없었는데, 퇴근하고 나타난 것이었다.

다 같이 어울리면서도 미묘한 분위기 속에 헤어지는 시간.

사람들은 역시나 그에게 나를 바래다주라고 했고, 우리 둘은 바래다주는 차 안에서 각자 사수들에게 들었던 본인들의 얘기에 대한 진실과 오해를 풀어나가며 한층 편안한 관계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우리 동갑이네요? 저보다 누난 줄 알았어요.”

“클래식 들으실 거 같이 생기셨는데, 여성스러운 거 같아요.”


결이 비슷하다는 말은 보류.

그를 알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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