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 워터스(Sarah Waters, 1966 ~ )의 핑거스미스(Fingersmith, 2002)를 모티브로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를 봤습니다.1 이 영화는 한없이 순수의 정반대 편에 서서 순수를 느끼게 하고, 정말 보잘것없다 여겨지는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합니다. 제가 기억하는 <올드보이>(2003), <친절한 금자씨>(2005)를 비롯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금기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할 법한, 당혹해할 법한 것을, 당당하게 보여줌으로써 이완을 목적으로 긴장시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일단 저는 원작을 접해본 적이 없어서 영화의 흐름에 몸을 맡겼습니다. 원작의 제목인 핑거스미스(Fingersmith)로 추측해 보자면, 영화 아가씨에 계속해 등장하는 장갑은 분명 원작의 메타포를 가져오려는 것이라 보입니다. 장갑 고르기, 장갑 끼기, 장갑 벗기, 맨손, 소매치기 등 이런 장면들은 원작의 메타포를 가져온 것이었겠지만, 영화<아가씨>(2016)는 그 메타포를 그대로 따라가지 않습니다. 첫사랑을 할 때 손끝만 스쳐도 짜릿한 그런 임팩트가 복숭아 터지듯 터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원작의 그런 메타포 대신 '물'을 중요 심상으로 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 물로 표현된 삶; 불안
이 영화는 첫 장면에서 비를 뿌립니다. 비가 후드득 오는 와중에, 그리 넓지 않은 길을 일본군이 도열해 지나가고, 그 뒤로 뭣도 모르는 아이들이 일본군을 따라가다 혼쭐이 납니다. 그리고 뭔가 이별을 앞둔 애틋한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영화 중간중간에도 물이 마르지 않습니다. 숙희(김태리 扮)는 비에 젖고, 복숭아는 제대로 여물어 한입 베어 물자 물이 터지고, 그렇고 그랬던 서재는 불사르지 않고, 물 발라 버립니다. 마침내 영화는 그 끝에 가서 바다라는 공간에서 엔딩 크레디트를 올립니다. 이 모든 일관된 메타포가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성(性)적 코드를 너머, 인간의 불안(anxious)을 말하고자 함이 아닐까 합니다.
다시 영화의 첫 장면을 생각해 봅시다. 이 영화는 비 내리는 장면 이전에 어두운 화면에서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소리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즐겁게 놀이 삼아 일본 군인을 따라가다 혼쭐이 납니다. 이 영화는 마지막에 아가씨 둘이 바다 위 배에서 어른 놀이를 하며, 신음을 내며 끝납니다. 아가들의 소음으로 시작해 아가씨의 신음으로 끝납니다. 비(雨)로 시작해서 가장 큰 물의 덩어리인 바다로 끝났습니다. 그런 이 영화의 첫 장면은 '불안'에 놓인 우리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이 영화의 끝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사건을 추동할 시작이라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불안'합니다.
물론 이 메타포가 의미하는 '불안'은 어떤 한 대상에 대한 혹은 어떤 한 상황에 대한 불안이 아닙니다. 전체를 파악할 수 없는, 그런 곳에 던져진 우리의 존재적 불안입니다. 우리는 이런 불안에서도 숨 쉬고, 놀고, 행위합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숨 쉬고, 누가 놀고, 누가 행위하냐는 것입니다. 영화 <아가씨>(2016)의 히데코(김민희 扮), 숙희, 백작(하정우 扮)은 사랑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그렇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히데코와 숙희가 담을 넘는 장면은 얽매였던 곳으로부터의 탈출이며,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시작점입니다. 장소, 직업, 이름 등 나를 둘러쌓았던, 내게 주어져있던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제야 진정한 불안을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다 위의 두 사람처럼 말입니다.2
3. 결정(decision)하는 삶
"지키고 죽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 영화 <아가씨>(2016) 대사 中
이 지점에서 백작의 마지막 대사인 "(물건을) 지키고 죽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를 곱씹어 봅니다. 이 대사는 제 귀와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사족이지만 미드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의 테온 그레이조이(알피 알렌 扮)로 살 것이냐 아가씨(2016)의 백작으로 죽을 것이냐는 정말 어려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백작이 지키고자 한 것은 정말 생물학적인 자신의 그 물건만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백작이 끌려가는 장면들을 곰곰이 되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그의 직업이 사기꾼이었다고는 하나, 그는 정말 뛰어난 그림을 그릴 줄 알았고, 있는 그대로 사실을 밝힙니다. 사실 그가 사기꾼이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히데코가 주는 와인을 백작이 마시는 장면, 바로 그 장면이 백작의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입에 머금고, 뜸 들였다, 선택하고, 마십니다. 어쩌면 그 순간 그는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걸었을지도 모릅니다. 다음 날 일본인들에게 끌려갈 때 차에서 담배 세 대를 한 번에 피웁니다. 이것은 결정적인 순간에 한방 먹이려는 그의 계획입니다. 즉 그가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지하실에서 담배 한 대 달라는 장면이, 저의 그런 아름다운 시선과 다르게 백작 자신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백작 자신의 소중한 물건을 지키기 위해서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체의 일부가 잘려 나갈 때 매우 의연합니다. 외마디 비명도 없고, 살려달라는 한 마디 구걸도 없습니다. 이미 백작은 자신의 스토리를 짜 놓고 선택하고 행위하고 있을 뿐입니다. 정말 자신에게 주어진 그 10분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걸었던 것이죠. 그리고 그는 자신의 물건을, 자신의 자존심을, 히데코와의 하룻밤을, 그리고 그녀를 지켰습니다. 저는 "지키고 죽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라는 대사를 '사랑을 지켰다'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이상 두 아가씨들의 신음을 끝으로 또다시 어떤 사건들이 펼쳐질지 상상을 펴며 이 글을 마칩니다.
1. 영화 개봉 당시(2016)에 썼던 글을 다듬어 올립니다.
2. 바다 위에서 두 사람은 즐거운 신음으로 끝을 냅니다. 그렇다면 불안을 극복한 것이냐라고 했을 때, 그들이 극복한 것은 두려움입니다. 두려움(fear)은 대상을 갖고, 불안(anxious)은 대상이 없습니다. 그래서 후자는 존재적 불안입니다. 소거할 수 없는 불안은 표류하는 삶과 같습니다. 그래서 표류하는 주체는 선택하고, 결정해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