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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작 Dec 24. 2021

육회를 중심으로 본 <곡성>(哭聲, 2016)

<곡성>의 장르는 코미디?!

1. <누가복음> 24장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누가복음> 24장 37절~39절


영화 <곡성>은 첫 장면에서, 위와 같이 <누가복음>을 인용하며 시작합니다. 감독은 왜 이 구절을 인용하며 시작했을까요? 우선 왜 위와 같은 상황이 펼쳐졌는가 살펴보겠습니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으니 당연히 '의심'할만합니다. 한걸음 물러나 보면, '믿음 VS 경험'의 대결에서 적어도 죽음에 관해서는 경험적 판단이 우세한 상황인 셈이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아무리 예언이라 해도 '죽음'을 극복한다는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겁니다. 이에 대해 <누가복음>에서는 "눈(ὀφθαλμοὶ)이 가려져서" 예수를 예수로 알아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눈'은 이성에 해당합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눈(ὀφθαλμοὶ)은 '풍경'에서 '이해' 나아가 '이유'까지 의미합니다. '가려져서(were holden; were kept from)1'라고 번역되는 원어는 에끄라뚠또(ἐκρατοῦντο)입니다. 끄라떼오(κρατέω)의 미래완료 시제의 직설법 3인칭 복수입니다. 끄라떼오(κρατέω)는 명령하다, 지배하다, 통치하다, 우세하다, 정복하다, 압도하다, 잡다, 쥐다, 가지다 등을 의미합니다. 이를 종합하여 "눈이 가려져서"라는 대목을 중심으로 <누가복음> 24장을 다시 살펴보면 '(기존) 이해에 사로잡힌' 상태를 드러내기 위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홍진 감독이 이 대목을 인용하며 영화 <곡성>을 시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기존 이해에 사로잡혀 알아보지 못하는 무엇]이란 셈이죠. 그리고 이 현상이 일어날 때 두 가지 감정이 듭니다. 하나는 공포이고 다른 하나는 웃음;코미디입니다. 기존 이해에 사로잡혀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공포로 다가가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코미디로 다가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감독이 이 영화의 장르가 코미디라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2. 육회

    [기존 이해에 사로잡혀]를 연장하자면, 우리 인간은 이미 주어진 이해 방식 혹은 이해의 틀로 우리 밖의 대상을 사로잡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사로잡으려 함에서 실패하면 밑도 끝도 없이 두려워합니다. 지금은 번개라는 단어를 들으면 대기의 불안정으로 어쩌고 저쩌고 그래서 친다와 같이 조잡하더라도 대강의 의미를 알기에 두려움을 갖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개념은 우리를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합니다(반대로 개념은 우리가 대상을 통제할 수 있다는 착시를 줍니다).

 

   반면 아주 오래전 인류는 번개가 치면 두려워했고, 동굴로 숨었습니다. 그러다가 번개가 치는 원인에 대해 제우스란 신을 놓고, '그가 화가 났나 봐'라고 하며 설명을 마련하고 나서야 안심합니다. 이런 개인의 사유 습관이 굳어지고 이 그럴듯한 이야기가 그런 사유 습관에 잘 들어맞다 보니 공유하기 수월했고, 그러다 보니 관습이 되고 문화가 되었습니다. 이 틀을 거꾸로 놓고 생각해 보면, 인간은 그런 사유의 틀에서 벗어난 것, 관습에서 벗어난 것, 문화에서 벗어난 것을 두려워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육회로 가기 위한 서두가 다소 길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고기를 썰어보겠습니다. 다시 영화 <곡성>으로 돌아가 생각해 봅시다. 눈은 씨 뻘겋고, 팬티만 입고서 한 노인이 날고기를 마구마구 뜯는 장면을 보고 주인공 종구(곽도원 분)도 떨고 관객도 떱니다. 반면 정육점에서 주인공 종구가(곽도원 )가 육회 먹는 건 아무렇지 않습니다. 한 노인이 날고기를 뜯어먹는 걸 보고 벌벌 떨던 주인공이 접시에 차려진 생고기는 장에 찍어 맛나게 먹습니다. 영화를 보는 저도 군침이 돌았습니다. 산에서 본 그 노인이 등산복을 세트로 맞춰 입고, 옆에는 오프로드 카가 세워져 있으며, 그 앞에 낭만이 깃든 캠프파이어 그릴 위에 고기를 촤악 구워 먹었다면 공포를 느꼈을까요? 산에서 취사를 해도 되나? 혹은 저게 고기 먹는 거지! 등 여러 생각만 들었겠지요. 즉 우리가 느낀 공포감은 문화 양식에서 벗어난 행위에 대한 것입니다.

 

3. 문화

    문화 양식은 일종의 패러다임입니다. 우리의 공포와 불안을 일으킬 수 있었던 수많은 것들을 퉁쳐버리게 할 수 있고, 그래서 참 편안합니다. 적절한 예는 아니지만, 101을 설명하기 위해 예전에는 [1 다음 2, 2 다음 3....... 그리고 101이야]를 했던 반면 이게 굳어지고 나면 그냥 101입니다.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접시 위에 놓인 육회를 먹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성이 만들어낸 이런 문화/패러다임이 우리를 제한합니다. 마치 스마트폰 사용 이전에는 전화번호를 다 외웠었는데, 지금은 모릅니다. 마치 그런 것입니다.

 

   영화에서 살인사건과 굿판, 살 날리기, 악마는 인과관계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영화 내 인물들은 그렇게 봅니다. 그렇다면 정말 살인사건의 원인이 무엇이냐? 독버섯? 다른 무엇? 그건 모릅니다. 다만 영화 <곡성>은 머리와 꼬리는 없고 그런 몸통만 보여주려 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야구공의 운동 흔적만 보여주려는 것이지 누가 던졌는지(원인), 누가 받았는지(결과)를 보여주려는 게 아닙니다. 다시 말해 영화 <곡성>은 인간의 그런 문화적, 사유의 습관/경향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인용처럼 -"왜 두려워하느냐 블라블라 나도 살과 뼈를 가졌는데"- 영화는 계속해 "왜 두려워하느냐 블라블라 나도 (너처럼) 생고기(육회) 먹는데"를 보여줍니다. 한번 파도처럼 들끓는 감정은 이성의 눈과 귀를 가립니다. 평상시 젖어있던 습관이 작동할 뿐이고, 그에 따른 결과로 답은 이미 내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란 대사가 이를 다시 확인시켜 줍니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누구도 '진리'를 구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내린 답을 사적으로 확인하고 싶을 뿐입니다. 영화 주인공 종구는 다른 사람 죽었을 때는 급히 나갈듯하다가도 밥 챙겨 먹을 거 다 먹고 갑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 일이 되었을 때는 눈이 돌아갑니다. 이런 인간의 사유 습관을 풍자하고, 이를 무겁고/무섭고/격하지만 소동극으로 끌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장르가 감독이 말했듯 코미디인 것이 이해가 갑니다. 이상 <곡성>에 대한 구성(狗聲)을 마칩니다.



* 2021년 12월 클리앙에 올린 글을 다시 다듬어 올립니다. 이 공간에서 차차 클리앙에 올린 글을 다듬어 올리는 동시에 여러 감상문을 올릴 예정입니다.

** 여러분의 라이킷은 다음 글을 쓰는 원동력이 됩니다. 라이킷을 먹고 자라는 호덕 올림.


1.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하였다(Lu.24.16)

    But their eyes were holden that they should not know him(Lu.24.16, KJV번역본).

    But they were kept from recognizing him(Lu.24.16, [NIV]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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