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좋아하게 된 N가지 이유
요섹남, 기타, 와인 뭐가 더 필요할까
이탈리아 남자와 데이트한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제일 처음 이탈리아에 와서 베네치아에 두 달가량 머물게 되었을 때 짧게 만나 본 A 가 있었다. 그 역시 리도섬의 한 레스토랑에서 혼자 1리터짜리 와인을 시켜 야무지게 마시고 있는 나를 보고 말을 걸었었는데 당시 이탈리아 남자에 대한 호기심에 충만했던지라 그의 호의를 받아들이고 종종 데이트를 즐겼다.
그는 유리공예로 액세서리는 물론 인테리어 소품 그리고 조각까지 하는 예술가였다. 아주 열정적이었고 로맨틱했으며 한시도 내게 시선과 손길을 거두는 법이 없었다. 말 끝마다 'Amore, Bella' 하는 통에 그 느끼함이 나의 한계치를 넘은 지 오래였고 어느 순간 부담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한 번은 그가 운영하는 가게와 작업실에 놀러 갔는데 정리라고는 1년 이상 해본 적 없을 것 같은 청소상태와 그걸 보고 놀라는 내게 그놈의 'Naturale(자연스러운)'를 변명삼아 전혀 문제없다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보고 질려서 금세 그 관계를 정리했었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난 이탈리아 남자랑은 안 맞는 것 같다고.
짧은 만남이었지만 이탈리아 남자는 내게 느끼함+게으름 대명사가 되어있었고 그런 편견을 가지게 된 뒤에는 오랫동안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Jo에게 호감이 간다고 해서 쉽게 마음을 줄 수는 없었다. 나는 그를 잘 몰랐고 이탈리아 남자를 만나 볼 생각도 전혀 없었다. 또한 나의 연애를 방해했던 가장 큰 요소인 '탁하우스' 민박집이 문제였다. 집은 내 생활터전이자 비즈니스 공간이었다. 누구도 쉽게 믿을 수 없는 타지에서 아무 나하고 연애를 하다가 잘못된다면 나 하나의 몸과 마음을 망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비즈니스에도 영향이 갈 것이고 더 나아가 손님들에게 피해를 끼칠 수도 있었다. 집이 노출되는 것과 저녁시간에 집을 비우거나 외박을 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엄청난 리스크였고 그런 리스크를 감수할 만큼 마음이 가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타국살이 7년 차 장사가 미친 듯이 재미있던 시간도 지나갔고 여러 위기를 혼자 겪어야 했던 나의 심신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친했던 친구들은 대부분 코로나 시기에 한국으로 돌아갔고 친구들만으로 충분히 채워지던 나의 시간에 공백이 생겼다. 이제는 누군가에게 조금은 나누고 싶었다. 마음을 나누고 기대고 위로받고 돕고 도와주는 그런 존재가 간절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다. Jo는 타이밍이 좋았다.
두 번째 데이트 때는 그의 집으로 초대를 받았다.
자기가 직접 요리를 해주고 싶다고 했다. Jo의 집은 내 친구가 살던 집과 같은 건물이라 내가 자주 놀러 가던 곳이었고 왠지 모를 익숙한 느낌에 흔쾌히 초대를 수락했다. 하루 일정을 모두 마친 뒤 펍이나 바에 가서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썸남집에 가는 기분이 새콤달콤 쿵쿵했다. 내 몸에서 나는 향이 어떤지 킁킁거린 것도 참 오랜만에 하는 행동이었다. 이상하게 콧노래가 나왔는데 장나라의 '사랑하기 좋은 날'이었다.
도착했더니 그와 그의 룸메이트가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다. 단 둘이 있는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었던 건가 싶어 살짝 실망스러운 기분이었다. '아페르티보'로 시원한 프로세코 와인이 준비되어 있었다. 딱 알맞은 온도의 와인을 홀짝이며 그가 요리하는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울컥했다. 여기 와서 맨날 남의 밥만 챙겨주던 신세였는데 누가 나를 위해 요리하는 모습이 참 오랜만이었다. 그것도 나만을 위해서 하는 요리는 거의 처음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룸메이트는 약속이 있어 곧 나간다고 했다. 나에게 한쪽 눈을 찡긋하며 " 좋은 밤 보내."라고 하는데 '그래, 고맙다! 이 센스 있는 녀석. 네가 나가 주는 덕분에 정말 좋은 밤이 될 것 같구나!'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정말 그 저녁을 공들여 준비한 것 같았다. 식전주부터 해서 브루게스따, 프리모인 뽀모도로 파스타, 메인음식인 안심 스테이크와 그에 잘 어울리는 레드와인 마지막으로 이탈리아 대표 디저트인 티라미수와 에스프레소까지 완벽한 하나의 코스요리였다. 세팅 또한 아주 로맨틱했다. 그의 집 거실에는 복층 공간이 있었는데 그 복층으로 올라가 보니 작은 테이블에 초가 켜져 있었고 그의 취향이 고스란히 보이는 LP 앨범의 커버들과 무슨 주제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감각적인 포스터 들로 벽이 장식되어 있었다. 한쪽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걸쳐져 있는 기타까지 마치 미드에서 보던 비밀데이트 공간 같은 느낌이었다.
그가 차려준 음식들을 나도 아주 공들여 음미해 가면서 먹었다. 대화는 끊기지 않았고 음식도 맛있었다. 내가 피렌체에 살면서 느낀 점을 이야기할 때마다 그는 정말 크게 공감해 주었다. 같은 이탈리아이긴 하지만 그의 고향은 남부 풀리아 지방이었고 피렌체가 좋아서 여기 와서 산 지 1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자신도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고 했다. 또한 예전에 비앤비를 운영해 본 적 있던 그는 내가 일하면서 겪는 고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변기가 막혀 고생한 이야기를 하면 그도 물난리가 나서 전기가 다 나가 멘붕이 왔다는 식이었다. 저녁 8시부터 시작된 식사는 거의 자정이 다 될 때까지 이어졌다. 부어라 마셔라 하는 술자리가 아닌 오직 서로에게만 집중하는 순간, 궁금한 것은 저 앞에 있는 대상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그런 완벽한 둘 만의 시간이었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그는 나와 비슷했다. 삶을 대하는 방식도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들도.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 까지도 정확하게 내가 생각했던 바가 그의 입에서 영어와 이탈리아로 들리는 신기한 체험을 했다. 제일 비슷했던 점은 말도 안 되게 친구가 많은 '친구부자'라는 것이었다. 그도 나도 피렌체로 찾아오는 친구가 매주 매 달 있을 정도로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 그게 참 행복하지만 때로는 고되고 힘들기도 하다고 나 자신을 잘 돌볼 시간이 없다고 말하자 그는 거의 눈물을 글썽이면서 나에게 동감을 표현했다.
"난 그들을 사랑하지만 또 한편으로 그들 때문에 너무 힘들어."
인간관계와 친구 문제는 그 당시 나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였는데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 만으로 또 한 번 그가 나에게 성큼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와... 이거 대박이다! 이 남자 내 운명인 것 같다. 너 지금 이 상태에서 저기 저 기타까지 연주해 주면 오늘부터 우리 1일인 거다.'
역시나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들린 걸까? 아니면 나의 시선을 눈치챌 정도로 나를 신경 쓰고 있었던 걸까? Jo는 갑자기 기타를 들더니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노래도 불렀다. 내가 모르는 노래지만 듣기 좋은 흥얼거림... 너 오늘 정말 작정을 했구나.
의심하고 밀어내려던 마음을 알고 싶고 좋아하는 마음이 역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귀엽게 웃을 줄 알고 옷도 깔끔하게 입는다. 몸에서 좋은 향이 나고 턱수염도 잘 어울린다. 요리를 잘하고 그 요리에 맞는 술도 고를 줄 안다. 나를 배려하고 대접한다. 그는 나를 궁금해한다. 친구가 많고 정이 많으며 어떻게 하면 좋은 사람으로 살까 치열하게 고민하며 산다. 나의 힘든 마음을 잘 들어주고 위로할 줄 안다. 기타 연주를 할 줄 알고 노래도 꽤 잘한다. 그리고 그는 나를 좋아한다!'
마지막 결정타가 날아왔다.
그는 깨끗하고 향긋하게 준비된 침대방을 내게 내주며 잘 자라고 볼 키스를 해주고는 그 방을 나갔다. 집으로 저녁식사 초대받을 때부터 어느 정도 진도를 나갈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특히나 그는 이탈리아 남자였다. 당연히 다음 단계를 나가려고 시도할 줄 알았는데 이런 배려라니...! 사실 같이 밤을 보내거나 집으로 돌아가도 괜찮았지만 나를 소중하게 대해주는 것 같은 그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포근한 잠자리에서 왠지 달콤한 꿈을 꿀 것 같은 기분으로 잠이 들었다. 그날은 피렌체에 와서 가장 편안하게 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