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크 타고 토스카나로!

토끼 아저씨...

by 피렌체장탁

Jo 와의 데이트는 꽤나 단조로웠다.


그도 그럴 것이 Jo는 주중에 밀라노에서 일을 하고 주말에만 피렌체에 와서 지내고 있었다. 그나마도 어떤 주는 오지 못할 때도 많아서 일주일에 한 번 보면 많이 보는 거고 2-3주에 한번 주말에 보는 정도였다. 그는 건축일을 하는 프리랜서였는데 당시 밀라노 외곽에 스타디움을 짓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을 때라 일이 많았고 늘 지친 채로 피렌체로 돌아왔다. 나 또한 늘 손님들과 함께 하는 환경이어서 항상 피곤이 기본값이었고 그래서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몹시 한정적이었다.


금요일이나 토요일밤에 만나서 저녁을 먹으며 와인 한잔 걸치고 그의 집에 가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그렇지만 큰 불만은 없었다. 그저 같이 맛있는 것을 먹고 대화를 나누고 온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Jo는 나와 조금 생각이 달랐다. 그는 나에게 늘 미안해했다. 좀 더 많은 장소를 함께 여행하고 나와 함께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어 했다.


5월이 다가오자 늘 나에게 이야기했다.


" 우리 반드시 토스카나를 같이 가야 해! 5월의 토스카나는 정말 환상이라고!!! 가서 우리 포도밭과 올리브밭을 가로질러 드라이브도 하고 Chianti 와인도 실컷 마시자. 어떻게든 내가 시간을 내볼게."


나야 싫을 이유가 없었지만 과연 그가 시간을 낼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그는 정말 정말 바빴다.) 큰 기대를 했다가 실망하는 건 영 취향이 아니었기 때문에 되면 되고 안되면 말지라는 심정으로 기다렸다.


역시나 두 번 아니 세 번쯤 약속을 정했다가 취소되기를 반복한 끝에 5월의 어느 날 드디어 토스카나에 가게 되었다! 원래 계획은 1박을 하고 올 예정이었으나 바쁘디 바쁜 그의 스케줄 때문에 바이크를 타고 반나절 가벼운 드라이브를 가기로 했다. 그전에 토스카나 지역을 여행한 적이 있긴 하지만 이렇게 남자친구와 데이트로 가는 건 처음인 데다 바이크를 타고 간다는 게 몹시 기대되었다. 온몸으로 바람과 공기를 가로질러 달리는 토스카나 평원을 상상만 해도 이미 행복지수가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집 앞에서 푸른 셔츠에 단추를 거의 세 개 정도 풀고 바이크에 기대 서 있는 Jo의 모습은 꽤나 섹시했다. 그에게 건네받은 헬멧을 쓰고 뒷자리에 탄 다음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드디어 출발이다!


이미 더워지기 시작한 피렌체였지만 바이크를 타고 맞는 바람은 상쾌하고 시원했다. 금세 도시를 빠져나가 토스카나를 향하는 고속도로로 진출했다. 그러다 금방 시골길로 진입해서 가는 중간중간 작은 마을들을 지나가는데 차를 타고 가면서는 볼 수 없었던 아기자기한 풍경들이 모두 눈에 들어왔다. 한가하고 평화롭고 행복해 보이는 마을사람들이 Tabacchi(담배가게이지만 Bar 겸 동네사랑방) 야외테이블에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그냥 내가 사랑에 빠져 있어서 그랬던 것 일수도.


첫 번째 마을인 'Panziano'에 도착했다. 'Chianti'는 토스카나의 유명한 와이너리 지역으로 크게 5개 마을이 있는데 'Panziano'도 그 마을 중 하나였다. 그곳에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에도 소개된 아주 유명한 스테이크 식당이 있었다. 50유로에 비프 타르타르부터 시작해서 모든 부위의 스테이크가 코스처럼 제공되고 와인도 무제한으로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소도 매일 바로 잡는다고 하던데 약간 우리나라의 정육식당 느낌도 있는 곳이었다. 원래 반드시 예약을 해야 되는 곳인데 Jo 가 그냥 가봐도 된다고 해서 갔더니 역시나 예약이 풀이어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았기에 개의치 않고 마을의 가장 높고 전망이 좋은 곳으로 올라가 풍경을 감상하며 찐한 애정행각을 벌였다.

내가 참 이탈리아 와서 맨날 남의 커플 뽀뽀하는 것만 보다가 내가 이러고 있을 줄이야... 감회가 남달랐다.


'장탁, 이태리 사람 다 됐네.. 마!'


아름다운 토스카나 풍경 속 Jo


몇 군데 마을을 더 둘러보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두 번째로 들른 곳은 'Greve in Chianti'라는 마을이었다. 다른 마을들 보다는 좀 더 큰 곳이었는데 들어가자마자 마을 입구에 보이는 끼안티의 상징인 커다란 수탉 동상이 인상 깊은 곳이었다. Jo의 소개로 간 'Enoteca(와인샵 및 바)'는 동굴 콘셉트로 되어 있었는데 이탈리아 전 지역의 와인이 다양하게 갖추어져 있음은 물론이고 각 와인들을 한 잔씩만 뽑아 마실 수 있는 기계들이 있었다. 다양한 와인들을 맛볼 수 있는 천상의 환경이었기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운전을 해야 하는 그는 한 잔만 마시기로 하고 나는 정신없이 두 세 종류의 와인을 골라 시음을 시작했다. 자판기에서 와인을 뽑아 마시는 느낌이라 재밌기도 하고 역시 원산지에서 마시는 와인이라 그런지 더 맛있는 기분이라 술이 쭉쭉 들어갔다. 내 취향에 맞추어 세심하고 다정하게 나를 에스코트해 주는 그가 점점 더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진짜 내 취향이었던 Enoteca



"Jo, 우리 다음은 어디로 갈 거야?"

"흠.. 이제는 뭔가 먹어야 되지 않을까?"

"그래,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와인도 조금 더 마시고"

"너 솔직히 말해!! 병 째 마시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역시 넌 날 잘 알아. 그래서 내가 널 좋아하는 거 라니까."

"나도 와인을 사랑하고 즐길 줄 알고 날 좋아하는 네가 너무 사랑스러워."

"발. 그. 레.. 쪽!"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Castellina in Chianti'였다. 이곳 역시나 작고 평화롭고 아름다운 마을이었고 우리는 무언가 먹기 위해 레스토랑들이 모여있는 광장 쪽으로 향했다.


그전까지 내가 이야기했던가? 정말 완벽한 데이트였다고...


레스토랑으로 향하는 길에는 다양한 상점이 있었다. 그런데 웬 거대토끼가 한 마리 벤치에 앉아있었다. 목에는 역시 '나 배고파요.'라는 팻말을 걸고서.

동물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 갈색 토끼는 너무 거대했고 사실 좀 징그러웠다. 인간의 구걸 도구로 이용당하는 그 생명체가 가엾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아니.. 그런데 갑자기 Jo 가 그 녀석이 너무 귀엽다고 야단법석인 거다. 바깥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는지 앞에 있던 건물 입구에서 아저씨가 한 분 나오셨다. 자기가 그 토끼 아빠라고 소개했다. 특유의 친화력과 오지랖으로 Jo와 아저씨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때까지는 나름 흐뭇하게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나 그렇게 속 좁은 여자 아니라고...!) 나는 거대토끼가 조금 무서워서 한 발짝 떨어져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도무지 그들의 대화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예전에도 Jo는 이런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같이 밥을 먹으러 간 식당이나 펍에서 옆 테이블이나 종업원과 눈이 마주치면 간단한 스몰토크가 아니라 아주 처음부터 같이 온 일행처럼 대화를 나누곤 했는데 이게 이탈리아 사람들 특성이라길래 그냥 그러려니 했다. 아니 그땐 그러려니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토끼아저씨와의 대화는 점점 내 한계치를 시험하고 있었다. 아저씨가 집에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토끼가 한 마리씩 늘어났다. 처음 있던 거대토끼의 남편, 아들, 딸 온 가족이 다 나올 참이었다. 그러더니 어이없게 이제 아예 둘이 같이 그 집에 들어가는 게 아닌가.


시간은 어느새 30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마치 내가 같이 온 걸 잊어버린 것 같았다. 이상한 오기가 발동해서 도대체 언제까지 저러고 있나 보자 싶어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실 뭐라고 하기도 애매했던 게 아저씨와 Jo는 너무 행복해 보였다. 선량하고 동물을 사랑하는 두 남자와 토끼 가족들의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들의 행복한 시간



단, 나만 빼고.


50분쯤 지났을까.

그제야 Jo 가 돌아오며 너무 귀엽지 않냐며 묻지도 않는 토끼 아저씨와 토끼 가족의 스토리를 나에게 쏟아내기 시작했다. 거기까지 가서 화를 내고 싶진 않았던 나는 그냥 무심히 그 이야기들을 듣고 있었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밥이고 뭐고 집에 가고 싶어졌다.


"나 와인 너무 많이 마셨나 봐. 그냥 집에 가자."

"그건 안돼. 네 몸에 안 좋다고. 그럼 간단하게 라도 뭔가 먹자"


'야.. 이 놈아! 진작 내 빈 속을 생각했다면 네가 지금 거기 가서 50분 동안 수다 떨고 올 일이냐?'


어이가 없었으나 이야기를 하더라도 피렌체에 돌아가서 하고 싶었던 나는 그의 말에 따랐다. 적당한 식당에 가서 프로슈토와 치즈 플래터를 시켜서 와인 한 잔 씩을 먹었다.


더럽게 맛이 없었다.


이건 뭔가 이탈리아와 한국의 문화 차이라고 하기엔 정도가 심한 것 같았다.


' 50분을 길 가에 세워두다니. 이건 연인이 아니라도 용납이 안될 거 같은데 내가 이상한 건가? 내가 이해를 못 하는 건가? 같이 가서 나도 어울렸어야 되는 건가? 그러고 보면 헬멧도 앞이 부서져서 바람막이도 안 되는 걸 줬었지. 식당도 예약하자니깐 안 해서 밥도 못 먹었잖아. 얘는 날 너무 홀대하는 거 아니야? 날 별로 신경 안 쓰는 것 같아.'


그냥 넘어갔던 사소한 일들까지도 다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고 별별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져 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사실 더 환상적이었다. 해가 지고 있는 토스카나 풍경은 정말 수채화 한 폭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 같았고 공기도 풍경도 노을도 모든 게 다 완벽하게 아름다웠다. 내 마음만 빼고 모든 게 좋아 보였다. 그래서 더 눈물이 났다. 그런데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 지도... 어떻게 내 서운함을 설명해야 할 지도 막막하기만 했다. 나만 이상한 사람 되는 거 아닌가 싶고 그가 과연 내 마음을 이해해 줄 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루 종일 나를 위해 애쓴 사람한테 그런 걸로 타박하기에는 좋았던 순간이 더 많았으니까라고 나 자신을 위로하며 토끼 아저씨와 악몽 같던 50분은 일단 가슴에 묻었다.


그런데 나는 그때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 사이에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걸. 그전부터 이해 안 가던 그의 그런 행동들이 좀 더 크게 나에게 거슬리기 시작할 것이라는 걸.


로맨틱했던(했어야 할) 토스카나 바이크 여행은 그렇게 끝이 났다.


내 마음과는 다르게 끝내 주게 아름답던 토스카나의 석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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