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소울푸드는 필요하다
만 24살이 되던 해, 자취를 시작했다. 감옥 같았던 기숙사 생활 18개월 만의 일이었다.
내가 살던 회사 기숙사의 창문 바로 앞에는 기숙사 옆에 있던 교회의 빨간 벽돌로 만들어진 뒷벽이 보였다. 아침나절 아주 잠깐은 해가 들었지만 그 후로는 해가 들지 않았다. 뭐 어쨌든 상관없었다. 신입사원일 때는 해가 떠 있을 때 집에(아니 기숙사에) 돌아가는 날이 별로 없었다. 어떤 날은 야근, 어떤 날은 회식으로 일상이 메워졌다. 퇴근하고 돌아가면 여자 층은 고작 3층이었는데도 엘리베이터를 탔다.(남초회사라 9층 건물 중 3층만 여자가 사용하고 있었다.) 계단을 걸어 올라갈 힘이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가득 채운 회사사람들이 숨을 조여왔다. 나는 퇴근했는데도 회사에 있는 것 같았다.
4.7평인 회사 기숙사에는 접을 수 있는 침대(하지만 항상 펴놓고 지냈다)와 책상, TV가 없는 TV다이, 그리고 아주 좁은 벽장 하나가 있었다. 다행인 것은 방마다 화장실이 딸려 있다는 것이었다. 주방은 없었지만 공용 화장실이 아니라는 것만 해도 어디냐, 그렇게 생각했다. 게다가 서울 한복판에 기숙사가 있는 회사는 유일하다(고 인사담당자가 얘기했고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도 서울에 기숙사가 있다는 회사는 들어본 적이 없다.)
정신없었던 1년 차가 지나고 2년 차가 되자 기숙사 생활이 더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친했던 회사 선배의 꼬드김이 더해져 나는 엄마에게 하소연을 했고 엄마의 도움으로 역에서 2분 거리인 신축 원룸 오피스텔에서 전세 생활을 시작했다. 서울에 기숙사가 있어서 그 회사 들어간다더니 1년 반 지내고 나오네, 엄마가 말했다. 나는 할 말이 없었지만 이제 그 감옥 같은 기숙사 생활을 끝낸다는 사실에 그저 기뻤다. 신축 건물의 공사가 마무리되던 즈음 1호로 계약한 세입자가 나였기에, 9층 건물에 있는 모든 집 중에 하나를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졌다. 그땐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나는 고층을 선호하는 타입이라 최고층과 그 아래층인 8층을 고민하다 결국 행운의 숫자 7인 7층을 골랐고, 7층의 모든 방을 들어가 보고 창문이 제일 많은 호실을 선택했다.
대로변에 접한 건물이라 건물 뒤쪽으로는 블록을 가르는 길이 있었다. 주변에 큰 공원이 있어서 고도제한이 있었고 오피스텔 건물 뒤로는 저층 빌라와 주택들만 있었기에 7층이던 우리 집은 뷰가 아주 좋았다. 창밖으로 내다보면 그 길의 끝까지 시선을 둘 수 있었다. 빨간 벽돌 벽만 보다가 멀리까지 트인 뷰를 보니 제대로 숨이 쉬어지는 기분이었다. 동향집이라 해가 강하긴 했지만 이런 뷰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약속 없는 주말이면 그 창가 앞에서 아무 생각 없이 한참을 내다보곤 했다.
기숙사에는 주방이 없었지만 이 집은 주방이 있었다. 이사 들어가는 날 부산에서부터 차를 끌고 오신 엄마는 온갖 집기를 다 실어오셨다. 냄비에 밥솥에 전자레인지에... 그렇게 모든 집기를 다 구비해 주시곤 엄마는 밥을 해서 얼려 보냈다. 반찬도 보냈다. 주기적으로 스티로폼 택배가 배달되었다. 외식이 잦았던 나는 그걸 다 먹을 수가 없어 엄마한테 너무 자주 보내지 마시라고, 버리는 게 더 속상하다고 했다.
엄마한테는 그렇게 말했지만 제대로 된 자취생활을 시작하니 배달이라는 걸 해보고 싶었다. 그전까지는 한 번도 혼자 배달을 시켜본 적이 없었다. 만 24살의 나는 신나게 배달을 시켜 먹기 시작했다. 메뉴는 주로 치킨이었다. 어떤 날은 집 앞에서 떡볶이와 튀김 세트를 사 오기도 하고, 편의점 음식을 사 먹기도 했다. 물론 간편하고 입은 즐거웠지만 2년쯤 지나자 그런 생활도 지치기 시작했다. 그즈음 짧은 연애가 끝이 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랑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로운 타지 생활에 조금은 의지했던지, 마음을 추스르는 게 쉽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들이 지나갔다. 동굴로 숨어드는 나에게 친구는 말했다- 의식적으로 밖으로 나와야 한다고. 그냥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릴래, 나는 말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다시 혼자인 게 편해지기 시작했다. 혼자일 때 즐겨하던 취미생활을 다시 시작했고 몸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위한 요리를 해 먹기 시작했다. 나는 할 줄 아는 요리가 몇 개 없었다. 자취하기 전까지는 밥 하는 법도 몰랐고 학창 시절에도 냄비에 라면 끓여본 기억이 별로 없다. 무엇보다도 혼자 먹는 데 거창한 '요리'를 하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즈음 친구가 초대해서 수육을 해 준 적이 있었다. 이것저것 복잡한 방법이 아니라 콜라와 된장을 사용한 쉬운 방법이었는데, 오랜만에 먹은 집밥이라 아주 맛있게 먹었더랬다. 나는 그걸 따라 해 보기로 했다. 치킨을 시켜 먹고 남은 콜라를 콸콸 붓고 돼지고기를 빠트렸다. 엄마가 챙겨준 향신료를 뒤져보니 월계수잎이랑 통후추가 있었다. 이걸 사용하게 될 줄이야.
콜라 수육은 아주 맛있었다. 온전히 나만을 위해 내가 하는 요리. 이상하게도 재료를 준비하는 것부터 플레이팅을 하는 것까지 모든 과정에서 위로를 받았다. 나 자신을 존중하는 느낌, 스스로를 대접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 후로 자주 콜라 수육을 해 먹었다. 마음이 힘든 날이나 주말이 시작하는 금요일이면 꼭 수육을 삶았다. 플레이팅도 신경 써서 하려고 노력했다. 절대로 냄비째로, 요리하던 수저로 먹지 않았다. 스스로를 위한 밥상을 누군가를 대접하듯 정성스레 준비했다. 비운 콜라병 개수만큼 마음 근육은 단단해져 갔다. 스스로를 대접하는 횟수가 늘어나는 만큼 마음 심지도 한 뼘씩 자랐다.
온전히 스스로를 위한 요리, 재료 준비부터 플레이팅까지 나만을 위한 요리 경험은 스스로를 대접한다는 것이 어떤 건지 알게 해 주었다. 스스로를 대접할 줄 알아야 타인에게도 대접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나는 나를 귀하게 여겨주는 사람을 만나서 한 집에 살게 되었고, 가끔 서로를 위해 요리를 한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콜라 수육을 삶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나의 소울 푸드를 묻는다면, 인생에 있어 나에게 힘이 된 요리가 있느냐 묻는다면 나는 콜라 수육이라고 답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