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향형 인간의 홈카페 추천기
혈액형 분류론이 지고 MBTI 분류론이 샛별처럼 떠올랐다. 하지만 본질은 똑같으며 인간 유형을 네 개에서 열여섯 개로 세분화했을 뿐이다. 인간 유형이 열여섯 개뿐인가? 개인적으로 인간을 이렇게 분류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현대사회에 MBTI가 가지는 의미는 인간의 분류보다는 자아 성찰에 가깝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네 어머니 아버지 세대만 하더라도 먹고살기 바빠 자기 자신에 대해 탐구하는 시간 없이 살았는데(그럴 생각도 안 해 보셨겠지만) 요즘 소위 말하는 MZ세대는 자신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활동인 것 같다. 자기 자신에 대해 탐구하고 알아가는 활동은 삶에 있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므로 그것이 MBTI의 순기능이 되겠지만 MBTI의 역기능은 자칫하면 고작 열여섯 개뿐인 유형에 매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내향형인 사람들은 집에서 홀로 시간을 보냄으로써 에너지를 충전하고 외향형인 사람들은 사람들을 만나며 에너지를 충전한다고 한다. MBTI가 I로 시작하는 나는 집에 혼자 있어도 바쁜 시간들을 보낸다. 사부작사부작 집안일도 하고, 난데없이 서랍을 파헤쳐 정리를 하기도 하고, 봄이면 봄, 겨울이면 겨울 등 계절에 맞게 집도 꾸며보고, 이렇게 글도 쓰고 사진도 찍는다. 좋아하는 음악이 항상 흐르고 있으며 어디에서든 읽을 수 있도록 집안 곳곳 책이 놓여져 있다. 가장 좋아하는 것은 단연코 홈카페를 여는 것이다. 홈카페는 이전에도 있었던 개념이지만 코로나 시대를 거쳐오며 더욱 확장되었다. 내향인들이야 숨 쉬듯 홈카페를 즐기지만 남이 타준 커피, 소위 남타커를 좋아하는 외향인들도 코로나로 인해 집에 갇히면서 홈카페를 즐기는 일이 잦아졌다. 오늘은 내향인의 홈카페를 즐기는 방법에 대해 얘기해볼까 한다.
홈카페를 즐기기 위해서는 별로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다. 커피도구와 원두, 커피잔, 빠질 수 없는 디저트 한 조각, 그리고 제일 중요한 시간이면 된다(쓰고 보니 많아 보인다). 커피를 좋아하는 나는 모카포트, 캡슐머신, 그리고 드립커피 도구까지 구비하고 있는데 홈카페를 열 때 가장 좋아하는 것은 드립커피를 내리는 것이다. 캡슐머신은 간편하고 맛있기야 하지만 왠지 인스턴트 같은 느낌이 들어 그렇게 선호하는 편은 아니다. 자고로 홈카페란 커피를 준비하는 시간까지 포함인 것이다. 원두를 갈고, 필터지를 접고, 뜨거운 물 끓이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내 몸은 커피를 마실 준비를 한다. 커피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커피 맛은 배가 된다. 예전에는 그 시간까지 늘린답시고 원두까지 수동 그라인더로 갈았는데 그게 너무 힘들어서 요즘은 자동 그라인더를 사용하고 있다. 고운 소금보다 약간 더 굵은 입자로 갈아낸 원두를 필터지에 평평하게 담고 뜨겁게 끓인 물을 부으면 퍼지는 고소한 커피 향은 정신과 기분마저 정돈해 주는 듯하다. 드립커피를 내리는 방법을 모른다 해도 괜찮다. 요즘은 클릭 한 번이면 손쉽게 지식을 흡수할 수 있는 시대이니 3분 카레를 만드는 시간보다도 더 짧은 시간 안에 드립 커피를 내리는 방법쯤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드립커피 다음으로 좋아하는 것은 모카포트로 내린 커피이다. 얼마 전 이탈리아인들이 모카포트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이탈리아에서는 90% 이상의 가정이 구비하고 있을 정도로 모카포트가 필수품이라고 한다. 나도 10년 전 유럽 배낭여행길에 로마의 레퍼블리카 광장에서 산 블랙 컬러의 비알레띠 모카포트를 흠집 한 곳 없이 아직까지 잘 사용하고 있다. 모카포트는 캡슐 커피나 드립 커피에서는 쉽게 느낄 수 없는 슬로우 감성이 있는데, 불에 올려 끓이는 것부터가 그렇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수증기에 의해 커피가 추출되기 시작하고 그때의 푸닥푸닥 하는 소리는 모카포트만의 시그니쳐 포인트이다. 소리와 함께 진하게 퍼지는 커피 향도 내가 모카포트 커피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다. 이렇게 추출되는 커피는 지방층이 제거되지 않아 투박하고 거칠지만 그 또한 나름의 매력이 있다.
커피도구를 선택했다면 취향에 맞는 원두를 찾아보는 것 또한 즐거운 일이다. 전 세계적으로 산미는 여러 가지 맛 가운데 가장 훌륭한 맛으로 평가받고 있으나 한국 사람들은 유독 산미를 즐기지 않는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산미가 풍부한 원두보다는 고소하고 묵직한 맛의 원두를 즐긴다. 예를 들면 브라질 옐로버본이나 과테말라 안티구아 같은 원두들. 원두는 1kg 단위로 가장 많이 판매하고 있지만 요즘 인터넷에서는 200g 단위로 작게 파는 원두 샵들이 많기 때문에 여러 나라들의 원두를 한 팩씩 먹어보며 본인의 취향을 찾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잘 찾아보면 달마다 추천 원두를 엄선하여 보내주는 구독 서비스도 있다. 처음 도전하는 원두를 주문한 날이면 주문하는 시점부터 원두가 도착한 후 갈아서 드립을 내리는 순간까지 내내 기대에 가득 차서 일상의 새로운 활력이 되어주곤 한다.
홈카페를 즐기고 싶다면 취향에 어울리는 커피잔 한 세트 정도는 구비하는 것이 좋다. 커피잔이 없다면 가진 컵 중 가장 예쁜 컵을 꺼내 커피를 담아보자. 커피잔은 입에 닿는 림 부분이 얇은 것이 마실 때 감촉이 좋다. 정성스레 내린 커피를 좋아하는 잔에 담는 것은 스스로를 위한 작은 선물을 포장하는 것과도 같다. 내가 가장 아끼는 커피잔은 덴마크의 장인들이 핸드메이드로 만드는 로얄 코펜하겐 제품인데 입술과 손가락에 닿는 감촉이 좋아서 애용하고 있다. 특히 천 번이 넘는 붓질로 정성 들여 만든다는 점에서 홈카페의 슬로우 감성과 닮아있다.
커피는 그 자체로도 충분하지만 한 피스의 디저트와 함께라면 더욱 빛을 발한다. 케이크도 좋고 타르트나 파이도 좋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디저트는 스콘 한 조각이다. 그다음으로는 버터 쿠키. 쓰고 보니 그 둘 사이엔 버터가 잔뜩 들어갔다는 공통점이 있다. 버터가 잔뜩 든 맛있는 디저트와 함께 커피를 마시는 순간만큼은 그 어떤 걱정과 번뇌라도 잠시 떨쳐낼 수 있다. 어릴 적 엄마가 커피와 함께 에이스 크래커를 드시던 것이 생각난다. 내 성화에 못 이겨 가끔 에이스 크래커를 조금 떼어 커피에 찍어서 나눠주시곤 하셨다. 이제 그때의 엄마만큼 나이가 든 내가 그때의 엄마처럼 커피와 버터 쿠키를 먹고 있다. 엄마에게도 이 시간이 잠깐의 힐링이었을지 생각해 본다. 버터와 커피의 풍미가 뒤섞이는 순간에 잠시나마 일상을 잊었을까.
홈카페를 준비하는 시간, 그리고 커피 한 잔과 디저트를 누리는 사치만큼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나를 위한 시간이다. 나를 찾는 시간이 되기도 하고 재정비하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나는 주말이면 꼭 홈카페를 즐기는데,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읽기도 하고 남편과 함께 주중에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혹은 조용히 음악을 듣기도 한다. 어떤 날은 커피를 앞에 두고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있기도 한다(멍 때리기는 인간에게 꼭 필요한 활동이라 들었다). 이렇게 하고 나면 다음 주를 살아갈 힘이 생긴다. 홈카페의 매력을 아직 모르는 외향인이 있다면 꼭 추천해주고 싶다. 어딘가 시끌벅적하고 정돈되지 못한 일상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버리는 느낌이 든다면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나만의 홈카페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