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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텀민 Jan 26. 2023

당신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것

시간과 공간의 힘에 대하여

 당신에 관련된 것 중 당신을 가장 잘, 가장 많이 나타낼 수 있는 것을 보여주세요.


 당신은 무얼 보여줄 수 있을까? 핸드폰? 범죄 수사처럼 핸드폰을 감식이라도 하지 않는 한 당신에 대해 그다지 많은 것들을 알 수는 없다. 가방? 당신이 얼마나 계획적인 사람인가를 알 수 있을 뿐이다. 일기장? 당신의 내면에 대해서는 알 수 있겠지만 외면에 대해서는?


 하지만 집이라면 어떨까. 집을 보면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삶을 대하는 태도, 생활 패턴, 식습관 그리고 성격까지도.


 인간에게 집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기본적인 기능으로서의 집은 인간에게 안전한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이지만, 현대인에게 집은 보다 더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지친 몸을 누일 수 있는 곳이자 가족들과 따뜻한 음식을 나누며 도란도란 얘기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집이란 나의 취향을 오롯이 반영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자 내가 정한 나만의 기준을 적용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그래서 나는 집이란 곧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취향을 반영할 수 있는 대상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의복이나 액세서리, 헤어 스타일, 혹은 매일 가지고 다니는 각종 소품들에도 하나하나 나의 취향을 가미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들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남들에게 보이는 물건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개성을 마음껏 드러내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이런 물건들을 고를 때 왠지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조금은 신경 쓸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집이라는 공간은 극히 개인적인 공간이며 이 공간에서는 내가 어떤 물건을 어떻게 배치하든, 무슨 컬러를 사용하든 그 누구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으니 취향을 오롯이 반영할 수 있다. 완성된 후에 남들에게 보여질지언정 이 공간을 꾸미는 과정에서 타인의 시선이나 의견은 힘이 없다. 오렌지색이 가장 좋아하는 색이라 해도 오렌지색 바지를 사기는 어렵지만 오렌지색 소파는 살 수 있는 것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물건과 환경이 내 취향에 꼭 맞는 것으로만 구성될 수 있는 공간은 집뿐이다.


 집과 나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내가 바쁘고 마음에 여유가 없을 때는 집도 돌봐지지 못해 엉망진창이 되곤 하고, 내가 여유롭고 마음이 편안한 때에는 집도 포근하고 아늑한 기운을 내뿜는다. 또는 반대로 집안이 엉망일 때 내 마음도 곧 흐트러지거나, 깨끗하고 포근한 집에 돌아왔을 때 힘들었던 마음이 잔잔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낀다. 공간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생활 패턴도 달라진다. 예를 들어 요즘은 거실을 서재화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주로 학령기 자녀들을 둔 집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인데, 이렇게 하면 아이들이 자연스레 책을 접하면서 독서 빈도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는, 나와 남편이 TV가 없는 다이닝룸에서 식사할 때, 거실 TV 앞 테이블에서 식사할 때에 비해 훨씬 대화도 많이 하고 식사도 천천히 하게 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서로의 회사생활, 혹은 이직에 관련한 조언이나 2세 계획 같은 모든 건설적인 이야기는 TV가 없었던 식사 시간에 이뤄졌다.


 요즘은 여러 가지 SNS가 발달한 덕분에 과거 어느 때보다 자기 자신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사람들의 이런 욕망(혹은 본능)을 가장 잘 반영한 것은 바로 인스타그램이다. 나는 인스타그램에서 인테리어 관련 계정을 운영하고 있어서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자주 소통하는데, 인스타그램에서는 사진 속 우리 집 공간의 모습이 곧 나의 얼굴이다. 사람들은 나로서 나를 기억하기보다 우리 집 모습으로 나를 기억하게 된다. 사람의 얼굴이 같을 수 없듯 집집마다 공간의 모양도 제각각이고, 개성 있는 집은 개성 있는 얼굴이 그렇듯 오래오래 기억에 남게 된다. 이렇듯 집은 곧 나 자신이 된다.


 당신이 집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장소는 어디인가. 시간을 가장 많이 쓴다는 것은 가장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며 그 자체로 나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그 장소는 서재의 책상 위가 될 수도 있고 거실의 소파 한 귀퉁이가 될 수도 있으며 혹은 주방 싱크대 위가 되기도 한다. 책상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의 경우는 그 사람의 책상만 봐도 그의 50% 정도는 이미 알게 된 느낌인데, 책상 위 스탠드 조명이나 연필꽂이, 마우스 패드나 키보드, 탁상시계 등의 물건에서부터 물건의 배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서 취향과 성격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책상 앞 벽을 좋아하는 엽서들로 꾸미거나 좋아하는 화분을 잔뜩 갖다 놓기도 한다. 또는 Black & White나 초록 또는 파랑 같은 특정 계열의 컬러로 모든 소품의 컬러감을 통일하기도 한다. 내가 아는 한 지인은 데스크테리어를 즐기는데 책상 위 모든 소품의 컬러를 초록 계열로 통일하고 주변에 크고 작은 초록 잎의 화분들을 배치함으로써 Green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를 알게 된 후부터 나는 초록 아이템만 보면 그 사람이 떠오른다.


 나의 경우엔 거실 소파와 테이블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TV에서 유튜브를 틀어 좋아하는 플레이 리스트를 재생하고 소파 오른쪽 구석에 몸을 파묻고 책을 보는 것, 그리고 거실 테이블에서 좋아하는 커피와 디저트를 먹는 것이 나의 힐링이다. 거실에서 나의 시선이 가 닿는 곳은 모두 내 취향이 가득 담긴 아이템으로 채워져 있다. 소파에는 쿠션이 여섯 개나 있는데 쿠션 커버는 하나하나 세심하게 골랐고 모든 커버에 각각의 사연이 있다. 초록 쿠션 커버는 딥그린색의 린넨 쿠션 커버가 갖고 싶다는 나의 말에 엄마가 시장에서 린넨을 떠 와 손수 만들어주신 쿠션 커버이다. 기하학적 패턴의 쿠션 커버는 신혼집 입주 후 첫 번째 이케아 방문에서 신나게 고른 것들이며 푸른색의 작은 쿠션 커버는 핀란드를 여행할 때 알바 알토의 손길을 느껴보겠다며 구매한 아르텍(artek) 제품이다. 아이보리색의 쿠션 커버는 어떤 홈패브릭 업체로부터 선물 받았는데 패턴이 아기자기하고 다른 커버들과 달리 화사해서 마치 홍차에 우유를 탄 것처럼 이전보다 분위기가 살짝 부드러워졌다. 찬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에는 이렇게 딥그린이나 네이비를 위주로 한 커버를 사용하지만 따뜻한 계절에는 톡톡 튀는 컬러로 바꿔주는 편이다.


 소파 뒷벽에는 좋아하는 그림이나 포스터를 걸어둔다. 이 벽에 그림을 걸기 위해 인테리어 할 때 미리 액자레일을 몰딩 안에 심었다. 그림은 계절이 오고 감에 따라 바꾸기도 하고 어느 날 충동적으로 바꾸기도 하는데, 그림이 주는 분위기는 마치 샐러드 위 토핑처럼, 혹은 프라푸치노 위 드리즐처럼 거실 전체 분위기에 생각보다 큰 영향을 미친다.


 내가 소파만큼이나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장소는 거실 테이블이다. 커피를 내려 좋아하는 디저트를 먹기도 하고, 남편과 저녁을 먹으면서 하루의 이벤트를 나누기도 하며, TV로 유튜브 플레이 리스트를 틀어두고 책을 읽기도 한다. 핸드폰 사진첩을 들여다보면 거실 테이블 사진의 지분이 가장 많을 만큼 이 공간에서의 시간을 좋아하고 또 즐기는 편이다.


 소파 위 쿠션에서도, 거실 벽의 그림에서도, 그리고 테이블 위 홈카페 플레이팅에서도 속속들이 나의 취향이 드러난다. 깔끔하거나 단순하다기보다는 일관성 없어 보이는 여러 가지 물건들의 조화를 좋아한다는 것도, 쉴 때는 음악을 듣거나 홈카페를 즐기면서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다.  


 당신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것, 그것은 당신이 집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다. 그 공간엔 당신도 모르게 당신의 이야기가 가득 담겨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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