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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차 Jul 22. 2022

호캉스가 만병통치약이라는 착각

호텔 쟁이의 로망

포인트 호구들, 글로벌리스트가 되다.


호텔 쟁이인 우리들은 자주 호캉스를 간다.

호텔 예약 완료 직후가 대체로 행복지수가 급 치솟는 그런 인간들이다.

그동안 호텔에 갖다 바친 돈만 해도 원하는 차 한 대는 뽑았을 거다.

그렇게 이곳저곳 방황하던 우리는 어느 날 이제 한 호텔에 충성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곳은 하얏트였다.

모든 소비는 하얏트 카드로 했고 개미처럼 포인트를 쌓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얏트 글로벌리스트>가 되었고  

그 혜택은 역대급 겉멋을 부리기 충분했다.

이른 체크인 늦은 체크아웃 그리고 아침, 저녁 무료 제공은 정말 꿀이었다.

돈을 쓰면서도 포인트 호구가 되는지 모르고 즐거웠다.

우리의 포인트로 종종 친구나 가족들을 호캉스 보내줄 때

그 각별한 쾌감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포인트의 노예가 되어갔다.


호캉스는 나의 만병통치약

담배 중독 남편과 살면서 분노조절이 안되던 어느 날, 나는 집을 나왔다.

그 당시만 해도 남편의 개수작에 그냥 넘어가던 애송이었기에

그런 것에 대처할 묘안이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고막이 나갈 정도로 소리를 질러 봤다.

역시나 소용이 없었다.

남편은 내가 화를 내면 받아쳐주지 않고 납작 엎드리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런 걸 모른 채 나 혼자 천지를 모르고 달려들던 불나방 같이 화를 내뿜었다.

불에 데어 피가 날 땐 엉엉 소리 내서 울기보다

재빨리 응급키트를 꺼내서 정신을 차리고 드레싱 해야 한다.

인생에서 그런 작업이 필요할 때마다 나는 호캉스를 갔었다.

호캉스는 내게 만병통치약이었다.

그런데 하얏트 포인트를 쓰면 남편이 바로 나의 위치를 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 비자금을 탕진하기로 했다.

‘내가 사라져 걱정하게 만들기’가 내 목표였기에

5번쯤 남편의 전화가 울리자 비행기 모드로 바꿔버렸다.

줄곧 하얏트만 다녔기에 다른 호텔을 고르는 것 자체가 설레었다.

포틀랜드에서 유명한 <에이스 호텔>은 두 번이나 갔기에 제외했고

조금 색다른 인테리어의 호텔을 구글링 했다.

순간 모든 게 다 귀찮아져서 '그냥 지금 바로 내 눈앞의 호텔로 가자!'로 정했다.

다운타운에 있는 힐튼호텔은 규모가 꽤 컸는데

그래서인지 호텔이라기보다는 가성비 넘치는 아파트 같았다.

이게 얼마 만에 혼자만의 호캉스인지, 결제를 하면서

‘이 돈보다 더 뽕을 뽑았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열심히 놀아재껴야지!

룸서비스도 거나하게 시키고! 24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신나게 놀 거야!' 하고 마음먹었다.


호텔에서 지옥을 맛보다


그런데 방을 배정받고 누워있는데 요상한 기운이 엄습했다.

호텔에 왔는데 이렇게 설레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내 돈 내고 감옥에 온 느낌이랄까?

그 기분의 원초적 이유는 바로 화장실 물소리였다.

순수하게 호캉스를 즐기려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고요함을 즐기려 아무것도 틀어 놓지 않았는데

하수구를 타고 내려오는 위층 화장실 물소리가 거슬렸다.

그렇게 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층간 소음이라는 고통이 되살아났다.

내 일상에 타인의 소리가 엉키면서 내 인생도 엉켜버리는 느낌.

내가 집을 나온 건 집안 곳곳에서 소리 지르던 악마 같은 내 잔상이 남아서였다.

그런데 호텔에 와 화장실 물소리를 들으니 그것과 겹쳐지는 잔상들이 떠올랐다.

목동 오피스텔에 살 때 옆집의 오줌 소리, 심지어 롤 화장지 푸는 소리까지,

서교동 아파트에선 윗집 샤워기 물소리, 새벽에 부부싸움하는 소리 때문에

그 집 남편의 사생활까지 알게 됐다. 그리고 낮에는 두두두두 아기가 뛰어다니는 소리.


한밤중, 누군가 내 방문을 만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카드 키를 대보는 소리가 났다.

혼자 방안에 있는 사람은 공포영화의 도입부처럼 머리가 쭈뼛선다.

'설마 저 문이 열리면 어떡하지?'

다행히 방문이 열리지 않자 어디론가 그 사람은 전화를 걸었다.

나도 오래전에 방 번호를 착각해서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본 적이 있다.

그땐 아무 생각 없었는데 내가 당해보니 정말 미안한 짓이다.

호텔 카드키는 그나마 덜 무섭다.

띠띠띠띠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는 진짜 사람을 미치게 한다.

혼자 살던 집은 모두 비밀번호였는데

비가 오던 여름밤 누군가 우리 집 비밀번호를 눌렀다.

띠띠띠띠 그 소리는 심장을 조여 오는 공포였다.


아침에 하우스키퍼의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조금 늦게 대응하자 벌써 문을 따고 쳐들어오는 성격 급한 하우스 키퍼였다.

왜 체크아웃 시간도 아닌데 이러는지 내 시간을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영어로 항의하자 상대는 스페인어로 빠르고 길게 말했다.

그리고 일 때문에 중국 항저우 메리어트에서 지냈던 일주일이 생각났다.

거기도 신기하게 하우스키퍼들은 영어를 못했다.

그들은 중국어로 말했고 나중에 말이 안 통하자 손짓 발짓으로

서로의 의중을 읽었고 그럴 상황은 생각보다 많았다.

둘 다 말이 안 통하는 상황이지만 그때의 추억은 내게 특별하다.

언제나 그들의 표정은 최선을 다해 나를 환대해 주었다. 내가 그 어떤 부자가 되더라도 살 수 없는 진심이었다. 앞으로 내 남은 인생에서 그런 환대를 다시 받아 볼 수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 추억이 떠올라 나오는 길에 과도한 팁을 올려두고 나왔다.


망한 호캉스가 내게 알려준 것

나는 마치 극기훈련이라도 다녀온 사람처럼 집에 도착하자마자 샤워부터 했다.

“호캉스 가서 씻지도 않고 온 거야?”

호텔의 좋은 어메니티를 이용해서 샤워하는 걸 좋아하는 나였다.

남편은 호캉스 가서 씻지도 않고 온 나를 신기하게 여겼다.

나는 왜 집을 나갔었는지 조차 까맣게 잊어버렸다.

화장실 물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곳이 갑자기 천국으로 느껴졌다.

덕분에 분명해졌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집 앞 공원을 산책하는데 코끝에 아카시아 향이 가득 퍼졌다.

내가 원하는 건 호텔에 가져간 향수가 아닌 걸으면서 맡는 이 꽃내음이었다.


캉스 대신 집캉스

한국행을 앞두고 우리는 그간 아껴둔 모든 포인트를 탕진했다.

3주간, 하얏트 호텔에서  남이 차려주는 밥을 먹기만 하면 된다.

예전 같았으면 엄청 설레었을 텐데 더 이상 그렇지 않다.

남편은 성수기라 응당 글로벌리스트가 받는 업그레이드 혜택도 못 받고

포인트 차감도 더 많이 된다고 아쉬워하며 징징거렸다.

“우리 어차피 죽고 흙으로 돌아간다.”

차차스님은 그렇게 남편을 타일렀다.

얼마전까지 이런일에 같이 집착하던 호텔 쟁이가

달라졌다.

더 이상 내겐  보통 방이니 스위트 룸이니 이런 게 중요하지 않다.

호텔 대신 친구나 가족 집에 머물고 싶다.

신세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내가 그렇게 바뀌었다.

아무리 호텔 쟁이라지만 처음 방에 들어갈 때 두려운 건 사실이다.

얼굴을 모르는 타인의 머리카락은 소름 끼치게 짜증 난다.

혹시 청소가 잘못되어있지는 않을까 하고 동동거리는 것보다,

이젠 내 사람이 살아가는 집의 먼지와 함께 뒹굴고 싶다.

집주인 눈에는 보이지 않는 정겨운 욕실 물때를 좋아한다.

옷장을 열면 빙그레 웃음이 나오는 급하게 정리한 흔적을 사랑한다.

아침에 일어나 친구가 내려주는 커피 한잔이

과도한 친절로 부담스러운 조식보다 더 맛있을 거 같다.

더 이상 호텔 에어컨 냄새 말고 친구 집 냄새를 맡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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