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리차 Nov 15. 2021

아침에는 이혼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feat.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을 오마주한 제목입니다.


결혼을 하니 상대가 생각지도 못한 나의 모습을 모니터 해준다.

내가 양치질을 할 때마다 발꼬락을 둥글게 오므린단다.

난 남편의 발꼬락까지 관찰할 여유가 없다.

평생 알길 없었던 내 모습에 내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얼마 전 그가 알려주길

내가 집에 있는 뚜껑이란 뚜껑은 모두 열어 둔다는 거다.

요리할 때 쓰는 각종 재료들 간장, 참기름, 후추통 등등

나는 닫지 않았을 뿐인데 생각해보니 로션 뚜껑 같은 것도 잠가 본 적이 없다.

그걸 꽉 잠가야 한다고? 그냥 다들 덮어 두고 사는 거 아니었어?


뚜껑이든 뚜껑이 아닌 것이든 열어 놓는 게 나는 좋다.

그러고 보니 어릴 때 우리 집 대문은 항상 열려있었다.

열어놓았을 때 더 안심이 된다.

그래서일까? 모든 가능성도 열어놓는 걸 좋아한다.


절대 그만둘 수 없어! 보다는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는 마음이

그 일을 더 길게 지속시키는 힘이 된다.

"이제 그만 은퇴하지?" 요상하게도 엄마의 이 말 때문에

생각보다 아주 긴 시간 동안 방송작가를 해왔었다.

내가 방송작가 생활을 하며 체험한걸 단 한 줄로 요약하자면,

[‘가벼운 마음’이야말로 진짜 도움이 된다. ]이다.


친구들이 이제는 대놓고 물어본다.

언제 오냐고, 생각보다 오래 있는 다고.

그들이 생각하기에 끈기도 없고 아니다 싶으면 바로 손절하는 내가

생각보다 오래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나 보다.

결혼과 동시에 이방인이 된 고단함까지

지금쯤이면 비명 지르고 올 때가 되었는데 싶었던 거다.

내가 아직 이혼하지 않은 이유,

그 비결은 아침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이혼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결혼은 여자가 망하기 딱 좋게 설계된 시스템이었다.

결혼해서 망하는 여자는 있어도

결혼 안해서 망하는 여자는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나에게 있어 결혼은 인수합병 같은 거다.

서로가 서로를 서포트 해주는 관계.

내가 더 잘 되기 위해 전략적으로 가성비 있게 이 시스템을 활용하려 한다.

‘나를 사랑하기 위한 결혼은 가능할까?’가 궁금했다.

만약 가능한 것이라면 나를 통해 증명해 보이고 싶다.

내게 결혼은 이 궁금증을 해소시킬 하나의 실험이기도 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마음속으로 ‘아이 러브 마이셀프’를 외친다.

어디서 주워들은 건데 진짜 이걸로 아침을 시작하면

하루가 온전한 내 것이 된다.

침구정리를 그냥 하는 것(타이탄의 도구에 나온 성공한 사람들의 습관 중 하나) 보다

이 말을 외치고 하면 다르다.

하루를 나를 사랑하는 일로 채우고 나머지는 쳐낸다.

매일 나는 아침 ‘아이 러브 마이셀프’와 함께 질문을 던진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데 있어 이 결혼이 도움이 되는 가?

이 답을 매일 아침 생각해 본다.


첫째, 테슬라 메이트다.


우리는 서로에게 있어 테슬라 메이트다.

이 시대가 일론 머스크를 해석하는 시각은 두 가지다.

사기꾼인가, 영웅인가?

이건 내게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질문이 되었다.

최근 세금을 위해 막대한 테슬라 주식을 팔아치운 일론은 조금 외로워 보인다.

누군가에겐 정신병 관종 취급을 받지만 우리에겐 영웅이자 구원자이다.

전기차뿐만이 아니라 태양에너지 그리고 우주여행까지

각자가 테슬라에 대해 공부한 걸 공유하면서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아남는 전우애를 다지게 되었다.

불확실한 미래에 확실한 공동의 목표가 생겼다.

시대정신을 읽어 내는 일을 인생 최고의 가치로 두었다.

그 감각을 활용한 투자가 앞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에 설렌다.

최근 나는 테슬라를 떠나 양자컴퓨터 주로 옮겨 탔다.

이 선택이 앞으로 우리를 얼마큼 기쁘게 하고 불안하게 할지는 모르지만

이걸 두고 이야기하는 순간만큼은 그 어떤 애정행각보다 흥분된다.

늙으면 부부가 서로 할 이야기가 없다며 아이를 낳으라는 소리를 많이 들어왔다.

아니요? 그건 당신둘의 이야기구요

저희 둘은 늙어서도 서로 공부하고 투자한거 자랑하려고 덤비느라 바쁠겁니다


둘째, 연쇄 여행마다.


여행에 환장한 것들, 그게 우리다.

여행은 내가 나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명이다.

호기심이 생겨난 헌책방을 찾아가야 하고

핫한 레스토랑의 계절 한정메뉴를 먹어봐야 하고

낯선 공원에서 뒹굴어야 살 맛이 나는 인간이다.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새로운 곳에서 내 일상을 되짚어 보는 걸 좋아한다.

생각지도 못한 전환점을 만들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걸 좋아한다.

나의 일상이든 타인의 일상이든지 간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게 좋다.

그 거리감이 생겼을 때만이 인생의 흐름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일상에선 궁상맞더라도 여행에선 돈을 아끼지 않는다.

일상에서 영혼까지 끌어 모아 쌓아둔 포인트로

우리는 하야트 글로벌리스트가 되었다.

언제나 중요한 건 다음 여행!

연쇄살인마가 다음 살인을 계획하듯이

이번 여행이 끝나지도 않았지만 다음 여행을 계획하는,

우리는 여행에 미친놈들이다.


셋째, 기적 체험 동지다.


둘 다 퍼주면서 쾌감을 느끼는 케이 장남 케이 장녀다.

나 자신이 마음고생을 하더라도

동생에게 뭘 해주는 거 사주는 걸 지극히 좋아한다.

정작 나 자신에게는 그 정도로 못해주는 것 까지 우린 똑같다.

남편은 작은 비즈니스를 하는 사업자라 현금융통이 목숨 줄이다.

코로나로 생각지도 못한 고비를 만났고

그걸 넘겨야 하는데 신청한 융자는 계속 안 나오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서서히 목이 조여오자 힘든 티를 안내는 겉멋 쟁이가

어쩐 일로 힘들다고 하길래 나도 장난스러운 겉멋을 부려봤다.


“하늘에 있는 우리 엄마에게 부탁해보자

장모가 얼마나 사위 사랑하는지 보겠어! “

장모 찬스 한번 써보자고 “

나는 엄마에게 기도로 부탁했다.


그 말을 하고 24시간이 지나지도 않은 바로 다음날 융자 승인이 됐다.

“장모사랑 격하게 받네?”라며

나는 이미 그럴 줄 다 알고 있었다는 뉘앙스로 말했지만 소름 끼치게 신기했다.

남편은 믿기지 않는 다며 영상통화로 엉엉 울었다.

“워터파크 개장했어? 눈물 수압이 너무 쌘 거 아냐? “ 라며 그를 놀렸다.


그토록 기다렸던 일이 말 한마디로 성사된 게 실화냐고?

난 가끔 인간이 할 수 없는 하늘의 일들을 믿는다.

과학이나 논리로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분야의 일.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그냥 돌파하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런 우리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남편과 나 둘이서 체험한 기적이라 외롭지 않았다.

이 기적은 우리 결혼 생활의 뿌리가 되었다.

다른 게 다 사라진데도 이 소름 끼치는 기억만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혼자만 아는 기적은 재미가 없다. 맛도 없다. 겉멋도 안 난다.

기적을 만들어 가는 묘미를 나눌 사람이 필요한데

내겐 리액션에 진심인 사람이 필요했던 거다.

‘그냥 우는 건 별로이지 않나 울 거면 워터파크 개장식처럼 울어야지’

어린 시절의 감각을 끌어오는 순수하고 열정적인 리액션.

그러기 위해선 내게 이 사람이 필요하다.

대체할 사람조차 없고 완벽한 적임자다.


결론은 내 남편은 테슬라 전우, 연쇄 여행마, 기적 체험 동지다.

이 캐릭터를 동시에 멀티 플레이하는 남편의 고유함 때문에

이혼할 수 없다.

그것만으로도 구닥다리 결혼 제도를 유지하는 이유가 충분히 넘친다.

아침마다 나는 이걸 체크하고 나를 사랑하는데 방해가 되는 결혼이라면

그만두자고 다짐한다.


그날 저녁, 트레이더 조에서 정신없이 장을 보는데

내 앞에 11월에 피는 미친 코스모스가 나타났다.

딱 그런 표정으로 내 앞에 남편이 꽃을 들고 서있었다.

절대로 질리지 않을 신선한 표정.


“이쁘지 않아?”

내 스타일의 꽃이 아니라서 그다지 이쁘지 않았다.

내가 요즘 통 꽃을 사지 않길래 자기가 골랐단다.

난 꽃보다 어쩌면 이게 절실히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11월에 피는 미친 코스모스의 광기.

4월에 내리는 눈이랑은 조금 결이 다른 광기 말이다.

저작권이 중요한 시대라지만 이 표정엔 그딴 게 필요 없을 것 같다.

아무도 따라 할 수도 흉내 낼 수도 없다.

NFT로 발행할 필요도 없다.

복사, 공유, 불법유통도 안되고 누가 훔쳐갈 수도 없다.

왜냐면 이건 그 사람밖에 못하는 고유한 거니까.

도저히 다른 사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 순간이었던 거 같다.

매일 비 오는 우중충한 포틀랜드의 겨울,

무기력에 길들여진 내게

작은 전환점이 생겨버린 순간이.


나는 여전히 아침마다 이혼을 생각하지만

그럴수록 ‘이 사람 아니면 안 돼’ 남편의 미친 존재감이 드러난다.

남편은 노력하지 않아도 타인을 웃기는 축복받은 신체를 가지고 태어났다.

키는 보통인데 허리가 너어무 길어 다리가 종종 거, 그 귀여운 걸 매일 본다.

강아지로 치면 웰시코기다. 숏다리는 걸어가는 것만봐도 그냥 웃음이 난다.

내가 웃고 있으면 자기가 좋아서 웃는 줄 안다.

나의 실험 <나를 사랑하기 위한 결혼은 가능할까?>의

잠정적 결론은 ‘나를 사랑하는데 남편이 큰 걸림돌이 된다.’이다.

그에게 기웃거리느라 나에게 쏟을 에너지가 종종 바닥이 나 버리곤 한다.

이전 07화 인생에 한 번은 빌런을 만나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