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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차 Nov 22. 2021

남편 자랑질 같은 건 미리 준비해 두는 게 좋다.

속물들의 자랑질

나만큼 속물적인 T가 말했다.

“리스펙트가 없으면 힘든 게 결혼이야,

결국 돈이고 외모고 다 필요 없고

상대에 대한 리스펙트가 있으면 살아지는 게 부부 같아. “

그의 눈엔 내가 리스펙트 전혀 없는 남자와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는 게

걱정이 되었나 보다.


그가 말하길 결혼할 때 와이프 집이 망해서

단돈 500만 원을 들고 왔다고 했다.

그 당시엔 그게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은 그랬기에 그녀와 결혼할 수 있었다며 오히려 행운이라고 했다.

와이프는 의사이지만 기차 특실 같은 건 절대 타지 않는 다고 했다.

여유를 부리지 않는 점에서 강렬한 리스펙트를 느꼈다고 했다.


두 번째 모먼트는 진짜 힘든 상황이었는데도  동기가 당직을 바꿔달라 하자

만사 제쳐두고 그걸 들어주러 나갈 때였다고 한다.

그 동기는 간호사 출신이었는데 그 편견이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동기들이 서로 똘똘 뭉쳐 도왔다고 했다.

듣고 있자니 지 와이프 자랑질이었다.

자랑질은 여러 가지 버전으로 들어봤는데 글쎄  이건 좀 신선했다.

의사 와이프라 돈을 잘 번다 이런 식상한 자랑이 아닌

그 사람만이 만들어내는 고유한 빛깔의 자랑질이었다.

듣고 있으면 피곤해지는 게 자랑질인데

요상하게도 이건 계속 내 마음속에 깊은 울림으로 남았다.

난, 그때까지 남편 자랑질을 준비하지 못해 할 말이 없었다.


내 남편은 미국에서 구멍가게를 운영한다.

난 작은 가게라는 말보다 구멍가게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 구멍 안에는 어마어마한 게 있기 때문이다.

“너 미국 가서 마트 같은 거 하고 싶어?” 할 때 그 마트 맞다.

“월마트면 몰라도 우리 작가님 너무 아까워요.”

미국에서 구멍가게 하는 사람과 결혼하다고 했을 때 사람들의 흔한 반응 중 하나였다.


남편이 처음 이민 왔을 때 동네에서 가장 좋은 차와 좋은 집에 살았던 사람이

마트를 하는 사장이었다고 했다.

그때 결심했단다. 마트 사장이 되자고.

어린 마음에 그게 크게 와닿았나 보다.

그럼 그 사람이 만약 마약거래상이었다면?

지금 남편은 마약거래계의 왕이 되었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나는 내 남편이 구멍가게를 한다는 편견보다 더 싫은 게 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마트의 위치가 좋아서

노력 여부에 상관없이 그냥 굴러간다는 점이다.

그런 환경이 그를 한량으로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하루 종일 집에서 뒹구는 걸 꼴 보기 싫을 때가 종종 있다.

그 와중에 엄살도 피운다.

“나 방금 똥을 치웠는데 그거 개똥이 아닌 거 같아,”

시트콤처럼 개똥이 아니라 사람 똥을 치워야 하는 경우도 있고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이상한 사람 미친 사람 모든 손님을 겪는다.


어느 날 술 취한 사람이 큰 칼을 들고 나타났다.

남편은 계산을 해주면서 손으로는 경찰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지금 그 사람이 마트 앞에 있어요.”

계산하던 손님이 입으로 입술을 동그랗게 말더니

“she”

쉬라고 다시 알려줬다.

“아, 남자 아니고 여잡니다.”

나는 무슨 일이 나지 않을까 벌벌 떨며 창문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와 중에 남편은 “현진이 밖에 나가지마.” 나까지 케어하며

다시 경찰에게 이야기를 했다.

하드코어 공포영화를 보는 듯 무서웠다.

더 놀라운 건 모두가 침착했고 일상적으로 일을 처리했다.

남편이 전화를 끊자 1분 만에 6대의 경찰차가 술 주정뱅이를 에워쌌다.

그날 이후 남편의 일이 너무 위험하게 느껴졌다.

마스크 쓰라고 했다가 총살당한 마트 주인 뉴스가 내 일처럼 느껴졌다.

빨리 스타벅스 같은 대기업에 이 가게를 넘기자고

가장 좋은 타이밍에 가게를 팔 준비를 하라고 재촉했다.

넷플릭스가 생기면서 비디오 대여점이 서둘러 사라지듯

구멍가게가 대기업 편의점에 먹히는 건 불 보듯 뻔하다고 매일 소리쳤다.


어느 날 사색에 질려서 남편이 말했다.

“10년 단골 아기 엄마인데 맥주를 가방에 넣어서 그냥나가더라고.”

우연히 cctv를 돌려보다가 알게 됐다고 했다.

인생에서 가장 큰 반전영화라도 본 듯 정신이 나가 있었다.

정말 믿고 싶지 않아 했다.

“그냥 젠틀하게 말해 다음에 오면 지난번에 까먹고 계산을 안 한 거 같다고.”

그런데 남편은 그 말조차 꺼내지 못할 만큼 인간적인 유대감이 깊었던 거 같다.

그 사람을 믿지 못하면 이 세상 아무것도 믿지 못할 사람처럼 보였다.

그 아기 엄마는 아무것도 모른 채 계속 마트에 왔다.

남편은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결심한 거 같다.

조금 손해 보더라도 자기가 지키고 싶은 것을 선택했다.

대신 그 아기 엄마가 다시는 맥주를 훔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라 했다.

사정이 있겠지 분명? 그 사람이 나빠서 그런 게 아니라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10년간 주고받은 농담이나 인간적인 온기, 자기가 온몸으로 체험한 걸 믿기로 했다.

차라리 cctv가 틀렸으면 틀렸지 자신의 감각을 믿기로 했던 모양이다.

그 순간 리스펙트가 느껴졌다.

멋지다.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특별한 멋짐이다.

앞으로 기계가 인간을 대신하더라도

이런 인간적인 아름다움은 절대 대신할 수 없다.

이제 누가 내 앞에서 지 와이프 자랑질할 때 대적할 남편 자랑질 거리가 생겼다.


가끔 남편의 마트가 이 동네의 비빌 언덕 같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 그냥 주식으로 돈 벌고 마트는 그냥 굴러가게 놔두자”

내가 이런 어이없는 말을 하게 될 줄을 몰랐다.

말해놓고 보니 좀 쿨 내 진동인데?

이런 겉멋을 좋아하는 우리들이다.


이 구멍가게가 없어지면

남편이랑 싸우고 나서 기분 전환하러 오는 그 할머니는 어디로 갈 것이며

일 끝난 멕시코 일용직 노동자들은 어디로 갈 것이며

가게 앞 타코 트럭으로 몰려드는 축구부 학생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이곳을 스치며 끼 부리고 연애하고 결혼하고 이혼하고 ,

다시 서로의 안부를 듣는 요상한 곳.

보통 사람들의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무대이다.


나에게 있어 <순진 김밥>이나 <훈고 링고 브레드> 같은 공간이다.

마음이 없으면 절대 갈 수 없는 곳,

단지 먹을 것만 사러 가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의 위안도 얻으러 가는 곳 말이다.


가끔 가게에 내가 있으면 날 처음 보는 손님들이 누구냐고 물어보곤 했다.

남편이 “내 와이프야”라고 했더니

“아 그녀가 너의 보스 구나.”

난 그 말의 따스한 감촉을 평생 잊지 못한다.

세상살이가 맘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 닥쳐도 내가 리더라는 걸 잊지 말라고 그 사람이 말해줬다.

그 말의 힘으로 어쩐지 무엇이든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어마어마한 돈이 있더라도 도저히 살 수 없는 순간이라 생각한다.

이런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곳은 분명

대형 체인점이 아닌 작은 구멍가게다.


그리고 몇달 후 남편은 가게 앞에

물건을 훔치는 한 소녀의 씨씨티비 사진을 붙였다.

당장 떼 뭐하는 짓이야?”

나는 저 작은 사건으로 그 아이가 평생 입을

상처가 걱정 되었다.

남편은 자기가 옳다고 했다. 그게 어른의 도리라고, 지금 바로 잡지 않으면 평생 도둑질하며 살아간다고 했다. 바로 잡을 기회를 준다는 것, 남편은 돈보다 분명 행운을 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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