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을 자유자재로 표현하는 건 그리 쉽지 않습니다. ‘타다’라는 동사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용돈을 타는 것도 ‘타다’이고, 애간장이 타는 것도 ‘타다’이고, 간지럼을 타는 것도 ‘타다’입니다. 그리고 계절을 타는 것도 ‘타다’입니다. 여러분이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정말 어렵지 않을까요? 비행기를 타는 것은 ‘타다’가 맞는데, 여름을 타는 건 왜 ‘타다’라고 하는 걸까요?
‘쓰다’도 그렇습니다. 글을 쓸 때도 ‘쓰다’, 도구나 사람을 이용할 때도 ‘쓰다’, 노력해야 할 때도 ‘(애를) 쓰다’, 조심해야 할 때도 ‘(마음을) 쓰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씁쓸할 때도 ‘쓰다’고 말합니다.
한 단어가 가지고 있는 ‘원래의 의미’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문장에서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뿐 아닙니다. 화자가 말하고자 했던 의미를 청자가 일부러 전복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안이야?”라는 말을 “아니야!”로 받거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예처럼) ‘이야기(tale)’를 꼬리(tail)로 바꾸는 예가 그렇습니다. 이때 언어유희가 일어납니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기형도, 2019, 73쪽 ‘빈 집’)”에서의 ‘쓰네’는 씁쓸하다는 말일 수도 있고 시를 쓴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화자의 말을 청자가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 의미의 전복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바다의 황제'라는 '전복' 아니고요!)
화자가 원래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라져 버리고 그 자리에 청자의 의미가 자리 잡게 되는 의미의 뒤바꿈, 그것은 전복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시작이기도 합니다. 뱀-사다리 주사위 놀이 아시죠! 종착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썼건만, 뱀머리를 만나는 바람에 원점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그 게임처럼, 의미의 전복은 '미끄러짐'이기도 합니다. 미끄러져서 다시 시작해야 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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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은 또한 새로운 채움이기도 합니다.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비우고,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채우는 과정에서 (노자가 말한) 비움과 채움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부재가 존재를 의미한다는 것을 몸으로 배울 수도 있습니다.
관례적인 표현 방법을 다양하게 익히는 것도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어 ‘말놀이’로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관례적 표현을 익히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가면 좋겠습니다. 누군가의 말을 다르게 해석해서 비틀고, 원래의 의미를 일부러 바꾸고, 재가공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 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텍스트를 무한하게 생성할 수만 있다면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훌륭한 언어의 마술사가 되지 않을까요?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이해할 수 있는 능력도 중요하고, 상대방의 말에 담긴 숨은 의미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고, 상대방이 의도했던 것과 전혀 다른 의미를 채워 넣을 수 있는 능력도 중요합니다. 그런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많이 만들어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