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감정이, 뭐 이건 연민, 이건 존경, 이건 사랑. 뭐, 이렇게 딱딱 끊어져요? 난 안 그렇던데? 막 다 덩어리로 있던데?”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한 장면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염기정(이엘 분)이 조태훈(이기우 분)에게 했던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정은 덩어리라,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사랑한다.”와 같이 느낌을 담은 동사로는, 우리의 감정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써 느낌을 담은 동사로 감정을 표현하려고 한다면, 그건 단지 ‘고백이나 넋두리 혹은 하소연’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감정을 드러내고 쏟아붓는 일은 시작법(詩作法)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다. 슬프다거나 기쁘다거나, 당신이 보고 싶다거나 풍경이 아름답다거나 하는 감정을 그대로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우리는 고백이나 넋두리 혹은 하소연이라고 부른다. (안도현, 2009: 121쪽)
우리는 “사랑해!” 안에 살거나 “사랑 안 해!” 안에 살지 않습니다. 항상 “사랑해!”와 “사랑 안 해!”의 ‘사이’를 살아갑니다. 더구나 사랑이라는 것은 너와 나의 ‘사이’에 있고, 그 사이는 분명한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사이는 언제나 모호합니다. 우리가 흔히 사랑이라고 부르는 감정 안에는 미움도 있고 애틋함도 있습니다.
우리의 감정을 “기쁘다.”나 “슬프다.” 등의 형용사(그림씨)로 표현하는 것도 마땅치 않습니다.
형용사가 사물의 성질, 감각, 색깔, 시간, 수량 등 정지 상태를 표현하는 데 반해 동사는 사람이나 사물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역동적인 어휘다. 동사가 움직이는 선이라면 형용사는 고정되어 있는 하나의 점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니 당신은 가능하면 형용사를 미워하고 동사를 사랑하라. 동사는 경험과 실질의 세계다. 동사는 감각의 세계다. 동사는 우리가 사는 얘기다. 자고, 먹고, 누고, 낳고, 좋아하고, 미워하고, 울고, 웃고 하는 게 다 동사로 표현된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는 동사가 많이 쓰일 수밖에 없다. (안도현, 2009: 134쪽)
느낌을 담은 동사나 형용사로는 이야기를 전개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동사로 이루어진 일상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만든 이야기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래는 박수미 선생님 학급(만 4세 반)의 현지가 만든 이야기입니다.
귀여운 아기 북극곰이 있었어요. 귀여운 아기 북극곰은 커서 바나클 대장이 되었어요. 바나클 대장 북극곰은 강철처럼 튼튼하고 강했어요. 어느 날 방귀 뀌고 날라갔어요. 슝슝 날라갔어요. 방귀 뀌면서 우주까지 갔어요. 그리고 다시 우주에서 지구로 돌아왔어요. 북극곰은 너무 심심했어요. 왜냐하면 철창에 갇혔거든요. 그래서 상어가 철창을 부서서 북극곰을 구해줬답니다!
“예쁜”이나 “착한”과 같은 형용사를 사용한다면 현지처럼 긴 이야기를 만들기 어렵습니다. “방귀 뀌고 날아가는”이나 “우주 가는”과 같이 행동을 묘사한 동사를 사용했기 때문에 긴 이야기를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박수미 선생님은, 아이들과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바로 그 점을 간파했더군요. 정말 대단합니다!
아저씨, 아줌마, 복숭아 때도 이렇게 (긴) 이야기로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때는 왜 (긴)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을까? 아저씨, 아줌마, 복숭아, 그리고 이번 북극곰을 비교하면서 계속해서 읽어보니 분명한 차이점이 있었다. 그동안은 주제어를 형용하는 말로 표현했다면, 이번에는 움직이는 말로 표현하는 경우가 중간중간 있었다. 움직이는 말이 들어가니 주제어에 생동감이 부여되고 머릿속에서는 그림 또는 이미지였던 것이 만화처럼 움직이는 영상이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박수미 선생님 저널, 2023. 5. 8)
이 점은 플롯 구성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좋아한다.”나 “싫어한다.”와 같이 감정을 담은 동사로는 플롯을 구성하기 어렵습니다. “악당을 물리쳤다”와 같이 행위를 담은 동사이어야만 플롯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이 원고의 제목은 ‘딱 1 문장으로 시작하기’인데, 그 한 문장을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글이 길어졌습니다. ‘딱 1 문장으로 시작하기’가 아니라, 본격적으로 이야기 만들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욕심을 너무 부렸습니다. 미안합니다. 너무 먼 길을 와버려서 돌이킬 수는 없지만, 늦게나마 원래 하려고 했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려고 합니다.
처음부터 욕심부리지 않아도 됩니다.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하면 됩니다. 1 문장이 순식간에 2 문장이 되고 10 문장이 됩니다. 채근하지 않아도 되고 조바심 내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도 정말 조금은 욕심을 부려도 될 것 같습니다. 다음은 이지은 선생님 학급(만 5세 반) 아이들이 1 문장을 확장하여 만든 문장 가운데 일부입니다. 사실 문장을 확장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 '말이 안 되는 문장'이라고 생각하니까 아이들이 보충설명을 한 것일 뿐입니다. 특히 마지막 예는 상당히 깁니다. 그런데 그 경우에도 일부러 “이야기를 길게 만들어보자.”라는 식으로 시작한 건 아닙니다. 설명을 하다 보니 길어진 것일 뿐입니다.
첫 문장: “엄마가 과일을 아낀다.”
후속 문장: “엄마가 시장에 갔다가 과일을 보고 돈 주고 샀어요. 엄마는 과일을 너무 아끼거든요. 그리고 집으로 갔는데 너무 더워서 수영을 했어요.
첫 문장: “돼지가 옷을 던진다.”
후속 문장: “돼지가 옷을 던졌는데 갑자기 돼지가 바보가 되었어요.”
첫 문장: “돼지가 옷을 던진다.”
후속 문장: “돼지가 옷을 던져서 새끼돼지 똥꼬에 맞아서 새끼돼지가 엄청 큰 똥을 쌌어요. 그래서 ○○백화점까지 날아갔는데 어몽어스가 강남스타일 춤을 추고 있었어요. 그래서 새끼 어몽어스가 방귀를 껴서 똥이 나와서 반반유치원 피그스터가 죽었어요. 그래서 하늘나라에 갔어요. 피그스터에 회오리가 나왔고 운석이 엄청나게 빨리 떨어졌어요. 회오리에 사람들이 다 휩쓸렸어요. 그래서 모두 다 죽었어요.
※ 느낌을 담은 동사, 형용사 (그리고 부사) 등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이들은 문장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부사와 형용사가 많을수록 글이 살아 숨 쉬게 됩니다. 문장에 생기가 돌면 이미지를 떠올리기도 쉽습니다. 자연스럽게 리듬이 생겨, 자칫 단조로울 수도 있는 문장에 음악성을 더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문장이 길어지기 때문에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전달하기가 어렵고 오히려 지루해질 수 있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문장을 아름답게 만들기도 하고 부드럽게 만들기도 하고 풍성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다만, 플롯을 생각한다면! 만약 그렇다면 느낌을 담은 동사와 형용사 등은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형용사 등을 사용하면 안 된다고 말할 건 아니잖아요! 그냥 교사와 부모들만 알고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안도현(2009).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안도현의 시작법. 서울: 한겨레출판.
나의 해방일지(JTBC드라마 토, 일 16부작, 2022.4.9.~5.29) (16회 2022.5.29.(일) 방영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