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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슬 Jul 30. 2024

여름휴가는 전주한옥마을에서 보내기로 했다.

소소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공간

한옥마을에서 일을 해본 경험이 있다. 처음에는 8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공간에서 리프레쉬나 해보자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3년이나 일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한옥 건물은 그대로 보전하면서 내부 시설만 현대식으로 리모델링해서 만든 사무실이었는데 커다란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대청과 사랑채가 연결되어 있는 큰 본채와 한 켠의 작은 쪽문을 열고 들어가면 고귀한 아씨가 살 것 같은 작은 안채로 연결되어 있었다.


봄이면 연둣빛 새싹이 뾰족뾰족 돋아나고 여름이면 청매실이 주렁주렁 열리고 가을에는 탐스러운 감이 흐드러지게 가지를 휘었으며 겨울이면 장독대에 포근한 눈이 가득 쌓여 계절이 지나가는 풍경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출근을 하면 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것처럼 생경한 풍경에 가끔 놀라기도 하고 신발을 벗고 대청마루에 올라서는 나의 루틴이 조금 웃기기도 했다.  


그리고 퇴사한 지 3년이 지났다. 본격적인 여름휴가가 찾아왔다고 느낀 건 아이의 어린이집 방학과 함께 체감된다. 하루종일 집에서 부대끼고 삼시세끼 만들고 거기에 또 먹여야 하는 일까지 쉽지 않은 여정이니 말이다.

어른인 나는 폭염주의보가 떨어진 오늘 같은 날엔 집에서 에어컨 바람이나 쐬며 소파에 누워 옥수수 하나 물고 좋아하는 드라마나 실컷 보는 일과를 추구하지만 우리 집 아이는 어디든 나가서 노는 것이 중요하기에 어제부터 내일은 어디에 갈지 계속 물었다. 계속되는 추궁에 머리를 굴리던 나는 무심결에 한옥마을이라고 대답했다.


오늘도 폭염주의보가 떴다. 아침부터 한옥마을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아이는 한옥마을에 간다고 즐거워한다. 이왕에 갈 거면 일찍 나서는 것이 좋다. 실로 오랜만에 가보는 한옥마을이었다. 거의 3년 만이었다. 그래도 머릿속에는 한옥마을 전체 지도가 그려진다.


운 좋으면 주차장옆 골목길에 무료로 주차할 공간이 있을 테지만 역시나 없다. 공영주차장은 생각보다 저렴하진 않지만 두 바퀴정도 골목길을 돌다 포기하고 들어갔다. 공영주차장은 2층으로 되어 있는데 이게 생각보다 풍경이 좋다. 가끔 맘 편하게 친구랑 수다 떨고 싶을 때 자주 애용했던 공간인데 이곳에서 풍경을 보면 야트막한 한옥들이 즐비하게 들어선 모습이 한눈에 보인다.


공영주차장에서 시작된 나의 여행은 큰길보다는 골목길을 선호한다. 한옥마을은 이런 골목길이 특히 예쁘다. 골목길에는 대부분 한옥 숙박들이 늘어서 있는데 1박 이상 계획한 여행자라면 숙박은 꼭 추천한다. 물론 족욕 간판이나 시설 홍보 문구가 약간의 시선을 헤치지만 낮은 기와담에 가정집 모습이 보여 편안한 느낌이다. 밤이 되면 깜깜한 툇마루에서 별을 보는 고요함도 느낄 수 있어 아늑하다.


골목길에서 나오면 인공으로 만들어 놓은 실개천 같은 태조로 물길이 나온다. 요즘처럼 더운 날씨에는 아이들이 안에 들어가서 시원한 물길질을 해댄다. 우리 아이한테도 들어가 보라고 했는데 크록스 신발이 젖는 게 싫은지 선뜻 못 들어간다. 옆에 있는 나뭇잎을 하나 따서 나뭇잎 배를 만들어 흘려보내주니 이거는 재미있단다.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걸어가면 배롱나무 옆 정자가 나온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장소다. 평소에는 너무 화려해서 싫던 배롱나무가 이곳에는 왠지 찰떡이다. 알록달록 사람들이 입은 한복과 어울려서일까. 일부러 정자에 올라가 배롱나무를 감상한다.    


아무리 더워도 경기전에는 꼭 들어가 봐야 한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커다란 나무들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기 때문에 시원하기도 하지만 왕의 어진이 있는 곳까지 통과해야 할 문이 여러 개 겹친 풍경이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나에게는 필수 코스기 때문이다. 시간이 되면 전동성당에서도 한 컷 찍고 싶은데 벌써 12시를 훌쩍 넘겼다. 전동성당이 보이는 스타벅스에 앉아있을까 고민하다가 여기까지 왔으니 아이랑 오붓하게 외식을 하고 싶다.


몇 군데가 생각난다. 한울밥상, 기와 같은 한정식도 괜찮고 베테랑 칼국수도 괜찮고 아 경아분식 라면 먹고 싶다! 이것저것 평소에 좋아하던 음식점들이 생각났는데 아이와 둘이 들어갈 자신이 없다. 외할머니 솜씨에서 팥빙수라도 먹고 갈까 싶다가 땀에 흠뻑 젖어 해맑게 웃는 아이를 본다. 에이 집에 가서 삼겹살이나 구워 먹자! 하고 발길을 돌렸다. 내일 오전에 다시 와야지.


점심때의 햇빛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지만 파란 하늘에 떠있는 뭉게구름의 모양이 너무나 선명하고 웅장해서 이걸 보려고 나왔나 싶기도 하다. 이번 여름휴가 동안 다시 한번 찬찬히 둘러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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