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터 스펀지케이크
아침 일찍부터 눈이 번쩍 뜨였다.
'오늘부터 제과 클래스가 시작되지.'
9시 30분.
평소보다 일찍 아이를 등원시키고 달려가도 빠듯한 시간이라 혹시라도 일정에 차질이 생길까 봐 약간 긴장한 탓이었다. 다행히 늦지는 않을 듯싶다. 암막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약간 푸르스름한 정도라면.
'이 정도면 7시쯤 되었겠지.'
나는 자리에서 살며시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창밖은 열어보지 않고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거대한 포근함으로 가득 차 있다. 어젯밤 일기예보는 확인하지 않았다. 세상 밖은 한 뼘 정도의 눈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망했어. 계획에 없었잖아'
대체적으로 겁이 없던 나였는데 아이가 생기고부터 모든 게 달라졌다. 사소한 것인데도 두렵고 걱정스럽다. 이런 날씨에 운전이 가능할까로 시작한 걱정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지만 이내 마음을 독하게 먹자 등원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오늘부터 18일 동안 배우게 될 이 학원은 예전에는 바글바글 시끄럽던 시내 중심가였지만 지금은 한산해져 버린, 슬럼화가 한참 진행되고 있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하지만 이 학원의 시설만큼은 리모델링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구나 싶을 정도로 깨끗했다. 학원 간판 옆에 붙은 새빨간 크라운 표시가 인상적이었다. 뭔가 제과의 여왕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겼다.
불혹을 지나고도 첫 만남은 항상 설렌다. 어색하지만 짐짓 아무렇지 않은 채하며 들어간 제과 클래스는 묘한 긴장감을 견디지 못하고 각자의 핸드폰에 숨어버린 몇 안 되는 수강생들이 시작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커다란 세 개의 테이블에 모두 눈치껏 뚝딱뚝딱 앉아 있었는데 그나마 남는 자리가 있어 가방만 올려놓고 소싯적 입던 조리복을 챙겨 입고 구석에 있는 싱크대로 가서 손을 씻었다.
제과 선생님은 커다란 안경을 쓰고 긴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나타났다. 30대 초반쯤 되었을까. 안경너머로 보이는 동그란 눈이 닥터슬럼프의 아라레를 닮았다. 목소리가 우렁차고 여유 있게 날리는 조크로 보아 꽤 유쾌한 사람 같았다.
오늘 첫 수업은 버터스펀지케이크다. 오븐도 반죽기도모두 새로웠다. 업소용이란 이런 것인가 싶을 정도로 힘도 좋고 몸집도 크다. 그보다 더 놀라운 건 버터스펀지케이크에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재료를 보고 과연 먹어도 될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임신 중에 고혈압으로 고생해서 그런지 음식에 신경을 쓰는 편인데 밀가루는 차치하더라도 저 밀가루만큼 많은 백설탕을 보자 입이 턱 벌어졌다. 심지어 저 지방 가득한 버터 덩어리가 다 들어간다니 이러다 혈관이 콱 막혀버리면 어쩌나 싶은 게 내 속 깊은 곳에 있는 건강염려증이 슬며시 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시작해 버린 것을.
그러고 보니 이 수업을 안 받아야 하는 이유가 하나둘 떠오른다. 사실 나는 30대 초반에 제빵 수업을 들었던 경험이 있다. 자격증을 따려고 필기시험까지 다 봤는데 수업 시간에 발효시간이나 굽는 시간 등 대기 시간이 너무 길다 보니 지루하고 어색해서 중간에 뛰쳐나왔었다. 또 20대 초반에 빕스에서 실습생으로 일했을 때 오븐에 쿠키를 굽다 팔 안쪽을 심하게 데서 지금도 상처가 남아있는데 그때의 안 좋은 기억은 나와 오븐과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이런 진입장벽을 뚫고 난 여기에 앉아있다. 쓸데없는 생각을 날려버리고 선생님이 시연한 대로 만들기 시작한다. 물론 혼자는 아니다. 세 명이 한 조다.
1. 먼저 박력분과 바닐라향을 계량해서 체로 쳐놓는다
2. 버터는 중탕으로 풀어주고 계란은 전란을 사용하는 공립법이니까 잘 풀어서 소금과 설탕을 넣고 43도까지 중탕으로 저어 반죽기로 거품을 올려준다.
3. 반죽에 가루를 넣어 섞어주고 버터중탕물에 반죽을 조금 섞어 희생반죽을 만들어 본반죽에 섞어준다.
4. 팬에 반죽을 팬닝하고 예열된 오븐에 넣어준다.
그리고 팬을 오븐에 넣은 후부터는 다시 주부모드가 되어 설거지에 몰입하게 된다. 이제야 한숨 돌릴 수 있다. 그나마 내가 잘하는 것이니까. 반죽하는 볼도 크고 버터 같은 유지도 덕지덕지 붙어 있고 해서 쉬운 설거지는 아닌데 주부 짬빠가 무서운 게 거침없이 해치운다. 수줍게 주변을 둘러보니 10대부터 50대까지 수강생 연령대가 다양하다. 첫날답게 모두 조심조심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며칠만 지나면 본인의 개성을 뿜어낼 게 분명하다.
드디어 30분이 지나고 오븐벨이 울렸다. 설마 제대로 된 게 나올까 싶었는데 나오고야 말았다.
'이럴 수가, 오 마이갓'
선생님이 만든 것과 같은 것이 진짜 나왔다. 따뜻하고 김이 모락모락 나고 몰랑몰랑한 스펀지케이크. 고소한 빵냄새가 가득하다. 따뜻한 오븐 열기마저 기분 좋게 만들어준다.
'이런 기분이었나'
도파민이 샘솟는다. <반죽 인, 케이크 아웃>이다. 마치 백설기를 자르듯 두 손으로 빵을 떼어먹어 본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스펀지케이크의 맛이 아주 좋다. 아직은 어색한, 나를 포함한 3명의 조원들은 쭈뼛쭈뼛 비밀 봉지를 챙겨 빵을 챙긴다. 나름 자격증을 따보려고 고심 중이라 그런지 혼자 해보면 더 좋을 것 같지만 그래도 나름 작업량을 공평하게 할당하려고 서로 노력하는 모습이다. 내일은 내가 좋아하는 마들렌을 만든다니 더욱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