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 되었다. 하루에 한 번씩 정기적인 연락이 왔다. ‘아빠를 살려달라’던 몇 바이트의 짧은 문장은 ‘자식이 되어서 부모를 못 본 척하느냐’는 장문의 데이터로 변환되어 수신되었다. 가끔씩은 ‘불효자’라는 3음절이 튀어나왔다. 답장을 생략하는 것으로 수신 거부를 대신했다. 하지만 전화는 아니었다. 전화벨의 진동음은 통화를 수락하기 전까지 몇 시간이고 물리적 파동을 멈추지 않았다. ‘미숙 아줌마’라고 저장된 연락처를 차단 목록에 등록하는 것으로 소음 공해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010으로 시작하는 미등록 번호가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을 시작으로, 일상의 모든 것은 원상 복구되었다. 결국, 달력의 숫자가 바뀌는 것 말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금요일. 최 문기 씨 재판에 출석했다. 나는 이전과 동일하게 ‘계약서는 제가 쓴 게 아닙니다’라는 대답으로 일관했다. 계약서에 찍힌 지장의 소유주를 묻는 말에도 ‘제 지문은 아닙니다’, ‘모릅니다’라는 대답을 반복했다. 이에 대해 원고는 지문 감정을 요청했다. 판사는 지문 감정 작업은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패소할 경우 부담해야 할 액수가 커질 것이라며 신중하게 결정하라고 충고했지만, 원고는 상관없다고 했다. 판사는 원고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다음 이번에는 나의 의견을 물었다. 원고의 제안에 동의하느냐는 말에 나는 ‘상관없습니다’라고 답하고는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판사는 지문 감정은 장난이 아니라며 나를 향해 주의를 주었다. 그러고는 재판을 마무리하며 다음 기일을 두 달 뒤, 같은 시간이라고 통보했다. 지문 감정에 소요되는 시간을 고려해서라고 했다. 나는 다음 재판까지의 공백이 너무 길다고 생각했다. 지루한 두 달이었다.
지문 감정은 법원을 통해 개별적으로 연락이 올 거라고 했다. 연락이 오면 지정 날짜에 맞춰 감정 기관에 출석해서 지문 채취를 받으면 된다고 했다. 그게 언제쯤일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나는 판사에게 일정을 조율할 수는 없느냐고 물었다. 날짜를 지정하는 게 어렵다면 시간대 조정이라도 가능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업무의 효율을 위해서라도 퇴근 직후의 오전이나 출근 전의 오후 시간대이기를 바랐다. 나는 판사에게 매일 근무하는 아르바이트 때문에 마음대로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고 사정을 설명했다. 하지만 판사는 ‘그런 개인적인 사소한 일정에 맞춰줄 만큼 법원은 한가하지 않다’며 나의 요청을 기각했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재판은 그렇게 끝났다.
법정을 나가려던 찰나, 건너편에 서 있던 원고와 눈이 마주쳤다. 인사라도 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대신 문을 나서는 내 등 뒤로 도둑놈의 새끼라는 쇳소리 섞인 고음이 들려왔다.
수요일. 이 점례 씨의 두 번째 재판일이었다. 일주일 전, 담당 판사의 변경을 통보받았다. 등기에는 답변서를 다시 제출하라는 명령이 포함되어 있었다. 인터넷을 통해 동일 텍스트를 재전송했다. ‘계약 사실 없음’. ‘원고와 직접 만난 사실 없음’.
변경되었다는 판사는 이전 판사와 다를 게 없었다. 같은 법복에, 안경을 착용하고 있었다. 질문 내용도 복제된 것처럼 똑같았다. 원고 또한 먼젓번과 같은 대답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답변서에 적힌 내용을 그대로 성대로 옮겼다. ‘원고와 직접 만나 계약서를 작성한 적이 없습니다’. ‘계약서에 직접 도장을 찍은 적이 없습니다’. 판사는 나의 변론을 듣고는 아버지에게 명의를 빌려준 이상, 전대차와 같은 부가적인 계약이 발생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는 것이 사업상 일반적이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나는 판사의 질문에 ‘인지하지 못했다’는 답변과 함께 지금 판사가 말하는 ‘일반적’이라는 기준 또한 뭔지 잘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그러자 판사는 몰랐다는 대답이 정당화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며 언성을 높였다. 이어서 그런 식으로 답변을 해서는 안 된다며 나의 태도를 지적했다. 제출한 답변서의 내용 또한 예의 바르지 못하다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판사는 내가 피고인으로서 재판에 임하는 자세가 매우 불량하다고 훈계했다. 변론의 기회를 포기하고, 입을 다물기로 했다. 잘못해서가 아니었다. 상영 시간이 길어질 것이 명백했기 때문이었다. 필요 없는 이야기로 재판을 길게 끌고 싶지는 않았다. 나의 침묵이 확인되자, 그제야 판사는 재판 종료를 선언했다. 예상된 수순이었다.
다음 기일은 한 달 뒤로 정해졌다. 판사는 끝으로 원고에게 추가 입증 자료를 제출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나에게는 다음부터는 더욱 조심하라는 주의를 통보했다. 알겠다고 대답했다. 판사는 나에게 말투를 고치라고 충고했다. 서둘러 법원을 빠져나와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출근 전까지 한 시간이라도 더 자야 했다. 등받이에 기대 판사가 말한 ‘피고인 다운 태도’가 뭔지 잠깐 생각해 보았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그대로 고개를 버스 벽면에 기댔다. 노면의 진동이 두개골을 타고 직접 직접 전달되었다. 쪽잠에 들었다. 피고인이라는 배역을 연기할 기력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월요일. 퇴근 후 세무서에 들렀다. 부가가치세 540만 원. 납부 기한이었던 11월 30일은 이미 훌쩍 지나 있었다. 입구에서 경비원에게 안내를 받아 부가가치세과가 있는 3층으로 올라갔다.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남자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무슨 용무로 찾아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미납된 부가가치세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직원은 ‘이쪽으로 오세요’라고 말하며 나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말없이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남자가 도착한 곳은 사무실 맨 끝에 있는 구역이었다. 한쪽에 기다란 철제 책상이 놓여 있었고, 머리끈으로 뒷머리를 묶은 여자가 책상에 기대어 서 있었다. 여자는 한 손으로는 책상을 짚고 다른 한 손으로는 머그잔에 담긴 무언가를 마시고 있었다. 냄새로 짐작건대 커피인 것 같았다. 여자는 나에게 ‘무슨 일로 오셨느냐’고 물었다. 나를 데려온 남자 직원이 ‘부가가치세 때문에 오셨다고 합니다’라며 여자에게 대신 보고했다. 남자의 대답에 여자는 머그잔을 책상 위에 내려놓더니 나를 향해 ‘이쪽으로 오세요’라며 자신의 앞을 가리켰다. 나는 말한 대로 여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여자는 나를 안내한 남자에게 이제 가봐도 된다는 손짓을 했다.
여자는 나에게 ‘무슨 부가가치세 때문에 그러시느냐’고 물었다. 주머니에서 고지서를 꺼내 여자에게 내밀었다. 여자는 고지서의 내용을 훑어보더니 책상 건너편의 컴퓨터 앞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키보드를 몇 번 두드리더니 나에게 대성 사우나가 맞느냐고 물었다. 나는 맞다고 대답했다. 여자는 나에게 부가가치세 산출액에는 문제가 없다고 했다. 나는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명의가 문제라고 말했다. 그리고 찜질방의 실제 사업주는 내가 아니라 아버지이며, 아버지는 현재 사기죄로 교도소에 수감 중이라는 사실도 함께 전했다.
여자는 내 말을 듣더니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 마우스 휠을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드르륵거리는 톱니바퀴의 마찰음이 컴퓨터 쿨링팬의 웅웅거리는 소음 위로 중첩되었다. 회전음은 몇 번이나 더 반복되었다. 소리가 멈추자 이윽고 여자가 입을 뗐다. 여자는 나에게 ‘지금 방문하신 선생님이 이 민호 씨 본인이 맞느냐’고 물었다. 모니터 너머의 시선이 나의 눈과 마주쳤다. 나는 맞다고 대답했다. 여자는 다시 한번 마우스 휠을 긁더니 ‘대성 사우나의 사업주는 이 민호 씨의 명의로 되어있다’고 말했다. 이어서 ‘부가가치세는 이 민호 선생님 앞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선생님이 내셔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재차 실제 사업주는 내가 아닌 아버지였음을 강조했다. 여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산상 사업주는 이 민호로 나와 있다’, ‘실질적인 사업주가 누구인지는 저희들로써는 알 수 없는 부분이다’. 여자는 단호하게 내뱉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사업주 본인 명의로 되어 있는 이상 저희들이 해드릴 수 있는 건 없다’. 그게 여자의 결론이었다. 나는 여자에게 돈이 없다고 말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가 수입의 전부라고 했다. 여자는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하며 뒤통수로 손을 가져가 깍지를 꼈다. 그러고는 기대고 있는 몸통을 한층 뒤로 젖혔다. 거의 눕다시피 앉은 자세였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처음 들어왔던 문으로 돌아 나왔다. 나를 안내했던 직원이 조심히 살펴 가시라는 인사를 건넸다.
23시. 편의점에 출근했다. 반복되는 교대 정산 프로세스. 포스기의 버튼을 누를 때마다 익숙한 비프음이 울려 퍼졌다. 시재 점검. 찰캉. 돈통 열리는 소리. 플러스마이너스 제로. 오차는 없었다. 정산 화면 위에 출력된 숫자들 위로 고지서에 적혀있던 540만 원이라는 수치가 오버랩되었다.
의미 없는 계산을 시작했다. 부가가치세 540만 원. 시급 6,000원. 5,400,000을 6,000으로 나눈다. 결괏값 900. 하루 근무 시간은 10시간. 약 90회의 야간 근무가 필요했다. 물론 단 1원도 소비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의 물리적 시간이었다. 여기에 재판 패소 시 발생할 예상 금액을 추가 입력했다. 연산 결과는 무한대에 수렴했다. 게임 오버. 나를 위한 엔딩 시나리오는 존재하지 않았다. 경미한 현기증과 함께 낮은 주파수의 음성이 문 쪽에서 들렸다. ‘민호야’. 오늘도 나를 불렀다. 발원지를 확인하는 동작은 생략했다.
시재 점검이 끝나자 전 시간대의 아르바이트생이 퇴근했다. 익숙한 적막이 편의점 내부를 점유했다. 새벽의 고요. 덜덜거리는 냉장고 컴프레서의 진동음만이 유일한 실재의 증거였다. 이따금씩 발생하는 환청의 데이터는 무시했다. 청각 정보의 단순한 노이즈일 뿐이었다. ‘민호야.’ 잡음이 증폭되어 입력되었다. 나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 민. 호!’. 음성이 갑작스레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고주파 신호가 되어 귀를 찢었다. 상체를 틀어 출입구를 살폈다. 도어벨의 작동 흔적은 없었다. ‘그럼 그렇지’. 오작동의 오류 기록을 삭제하고 매대 쪽으로 다시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유리창에 낯익은 형체 하나가 불규칙하게 일렁였다.
출입문 너머, 유리창의 반대편에는 누런 수감복을 입은 아버지가 서 있었다. 아버지는 무표정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손에는 법정에서 목격했던 백색의 포승줄이 묶여 있었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눈두덩이를 꾹 눌렀다가 다시 떴다. 다시 눈을 뜬 곳엔 아무도 없었다. 시각 데이터의 초기화. 망막의 잔상은 연기처럼 휘발되었다.
순간, 어지럼증이 일었다. 카운터 상판을 양손으로 짚어 몸을 지지했다. 편의점 천장의 백색광이 빠르게 점멸했다. 형광등의 루멘(lm) 값이 임계치를 초과하며 폭주하고 있었다. 천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장에 눈이 부셨다. 이윽고 시야가 하얗게 타들어 갔다. 광원은 칼날처럼 내 망막을 도려냈다.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컴프레서의 낮은 진동음이 거대한 드릴의 회전음으로 치환되었다. 소음의 진동은 바닥을 뚫고 올라와 머릿속까지 파고들어 뇌를 흔들었다. 평형감각의 붕괴. 눈을 감았는데도 빛이 보였다. 형광등의 새파란 주파수가 시신경을 잠식했다. 눈을 멀게 할 셈이었다. 백색으로 가득 찬 세상에는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견딜 수 없었다. 나는 그대로 편의점 밖으로 뛰쳐나갔다.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고막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나는 시내 외곽에 있는 하천을 걷고 있었다. 새벽의 하천가에는 나 이외의 다른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졸졸 물 흐르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나는 하천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바람에 스치는 풀 소리가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멀리 가로등 불빛에 조약돌이 반짝였다. 아무도 없는 길 위에 완벽하게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잡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양팔을 벌려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차가운 밤공기가 코끝을 시작으로 몸속 구석, 발가락 끝 언저리까지 훑고 지나갔다. 이어서 물비린내와 풀 냄새가 따랐다.
계속 걸었다. 얼마나 걸었는지는 모르겠다. 왼편에서 흐르던 냇가의 작은 물길은 어느새 커다란 물줄기로 변해 있었다. 이제는 그 물줄기를 따라 걸었다. 냇물은 고가도로를 따라 이어진 대교 아래를 교차해 한강까지 이어졌다. 산책로는 거기에서 끝나있었다. 길옆의 계단을 타고 대교 위로 올라갔다. 다리 위에도 사람의 형체는 보이지 않았다. 오렌지빛의 가로등 아래로 차들이 달리고 있을 뿐이었다. 쉬잉-. 쉬잉-. 차량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났다. 티셔츠에 걸친 편의점 조끼가 펄럭였다. 바르르 몸이 떨렸다. 편의점에 그대로 두고 나온 회색 패딩 점퍼가 떠올랐다. 나는 조끼 앞섶의 지퍼를 목 끝까지 잠갔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한숨을 내뱉자 하얀 입김이 가로등 불빛 사이로 입자가 되어 흩어졌다.
다시 걸었다. 다리의 난간을 따라 가로등 몇 개를 더 지나쳤다. 가로등 불빛 너머 저 멀리, 고층 빌딩의 외곽선을 따라 빨간 불빛이 깜박이고 있었다. 발바닥에 묵직한 피로감이 전해졌다. 언제부터인가 단단해진 종아리는 점멸하는 적색광의 리듬에 맞춰 욱신거리고 있었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왜 걷고 있는 걸까. 다리를 건너고 싶었던 걸까. 이유를 찾아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왔던 길을 그대로 되밟을 생각이었다. 다리 건너까지 남아 있는 가로등을 뒤로하고 몸을 돌렸다. 반대편에는 남아 있던 만큼의 가로등이 줄지어 서 있었다. 다리를 다 건너는 것도, 돌아가는 것도 어중간해져 버린 그 어딘가쯤의 좌표에서, 나는 표류하고 있었다.
난간에 기대어 수면을 내려다보았다. 검푸른 강물이 광원에 일렁였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담배를 찾았다. 만져지는 것은 핸드폰뿐이었다. 직사각형의 플라스틱을 꺼내 화면을 보았다. 01:43. 화요일. 메신저 앱을 켜고 친구 목록 버튼을 눌렀다. 새롭게 프로필을 변경한 사람들의 상태 메시지가 상단 목록에 나열되어 있었다. 맨 위에서부터 하나씩 차례대로 메시지를 읽어 보았다. 김준민 ’생일 축하해’, 박희주 ’노력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신 성빈 ‘♡200일♡’, 이슬기 ‘이제부터 시작’, 이진호 ‘좆같은 인생’…
동생의 프로필에는 피에로 분장을 한 인물의 사진이 업로드되어 있었다. 그리고 피에로의 눈 아래에는 별 모양의 눈물자국이 그려져 있었다. 피에로 사진과 메시지를 보자, 한쪽 입꼬리가 덩달아 씰룩거렸다. 실소(失笑). 이제 입꼬리는 양쪽이 모두 올라가 있었다. 한 번 더 헛웃음을 짓고는 마이 프로필이라고 쓰여 있는 버튼을 클릭했다. 거기엔 언제 찍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바다의 풍경 사진 하나와 ‘워홀 준비 중’라는 문자가 나열되어 있었다. 프로필 메시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상태 변경 창을 열었다. 그리고 삭제 버튼을 눌렀다. 프로필 이미지에도 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상태 창은 기본값으로 회귀했다. 창을 닫고 플라스틱 덩어리를 다시 주머니 속에 안치시켰다.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철제 난간의 냉기가 팔뚝의 피부로 전달됐다. 울렁거리는 수면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검은 강물 위를 표류하던 쓰레기들이 가로등 불빛을 반사하며 이따금씩 반짝거렸다. 그중에 하얗게 빛나는 비닐 상자 하나가 포착되었다. 찌그러진 담뱃갑이었다. 상자는 물결을 따라 수면 위로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더니, 마지막 반짝임을 끝으로 수면 아래로 완전히 침몰했다.
몸을 일으켰다. 바람 소리가 낮은 음정으로 귓가를 스쳤다. 귓바퀴가 얼얼했다.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일렁이는 강물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미련은 없었다. 문득, 교과서에 실려있던 시 한 편이 떠올랐다. 청 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돌아와 버렸다는 나비의 이야기였다. 고개를 들었다. 새파란 초생달은 없었다. 달도 뜨지 않은 하늘은, 그저 먹빛으로 칠해져 있을 뿐이었다.
헐렁해진 신발 끈을 고쳐 매고 걸음을 뗐다. 돌아갈 시간이었다. 더 오래 자리를 비웠다간 정말 큰일이 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리를 건넜다. 하천을 걸었다. 횡단보도를 지나 먹자골목을 통과했다. 치킨집에서 나와 어깨동무를 하며 2차인지 3차인지 모를 다음 행선지를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한 무리의 취객을 마주쳤다. 사거리의 소방서를 지나 동네 골목으로 들어갔다. 공실(空室)이 된 유리창마다 점포 임대라는 종이가 써 붙어 있었다. 마지막 골목을 돌자, 편의점 간판 불빛이 보였다. 간판등이 지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깜박였다. 활짝 열려 있던 유리문을 닫았다. 도어벨이 딸랑 거리는 종소리를 냈다. 카운터 안쪽의 내 자리로 돌아갔다. 잠갔던 조끼 지퍼를 내렸다. 자세를 고쳐 잡았다. 밤은 아직 길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