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정상궤도

by 익수정

[지난 2주일 동안 당신은 다음의 문제들로 인해서 얼마나 자주 방해를 받았습니까?]

일 또는 여가 활동을 하는데 흥미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함: 3점

기분이 가라앉거나 우울하거나 희망이 없음: 3점

잠이 들거나 계속 잠을 자는 것이 어려움 또는 잠을 너무 많이 잠: 3점

피곤하다고 느끼거나 기운이 거의 없음: 3점

입맛이 없거나 과식을 함: 3점

자신을 부정적으로 봄 - 혹은 자신이 실패자라고 느끼거나 자신 또는 가족을 실망시킴: 3점

신문을 읽거나 텔레비전 보는 것과 같은 일에 집중하는 것이 어려움: 3점

다른 사람들이 주목할 정도로 너무 느리게 움직이거나 말을 함 또는 반대로 평상시보다 많이 움직여서, 너무 안절부절못하거나 들떠 있음: 1점

자신이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해칠것이라고 생각함: 2점


집에 돌아오자마자 슬기가 알려준 자가 테스트를 했다. 24점. 심한 수준의 우울. ‘광범위한 우울 증상을 매우 자주. 심한 수준에서 경험하는 것으로 보고’. 추가적인 평가나 정신건강 전문가의 도움을 권함’. 창을 닫고 지도 앱에서 가장 가까운 병원을 찾아보았다. XX 클리닉. 평점 4.5점. 상세 정보에 등록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검사비는 초진 비용까지 포함해서 15만 원 정도 나오신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약 잡아 드릴까요?”


수화기 너머의 직원이 말했다. 15만 원. 1만 3천 원의 약 10배. 생각해 보겠다는 대답과 함께 회선을 끊었다. 이불을 펴고 자리에 누웠다. 반창고 주변부가 따끔거렸다. 눈을 감았지만 바로 잠은 오지 않았다. 피곤하다는 수면의 욕망 이면에 잠들지 못하는 내가 있었다. 슬기가 입고 있던 정장의 잔상이 새까만 시야 위로 반복해서 떠올랐다.


다음 날 저녁. 꼬박 하루를 잠이 들었다. 편의점에 지각했다. 핸드폰 알람이 울리지 않았다. 충전 케이블이 연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전 타임 근무자가 불평을 늘어놓았다. 사과를 하고 서둘러 근무복으로 갈아입었다. 아침 퇴근길, 점장이 ‘불성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주의를 주었다. 재차 사과했다.


퇴근. 집에 도착하자마자 입고 있던 패딩을 의자에 던지듯 걸쳐두고 이불 위로 쓰러졌다. 이부자리는 내가 빠져나왔던 형태 그대로 굳어 있었다. 이불 깊숙이 몸을 파묻고 턱 밑까지 끌어올렸다. 눈을 감고 코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코는 막혀있지 않았다. 다시 한번 숨을 마셨다. 방 안은 무향이었다. 이불에서 손을 꺼내 손등을 코 가까이 가져다 댔다. 여전히 냄새는 없었다. 몸을 일으켜 덮고 있는 이불 위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뇌에 전달된 신호는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벽면을 쓸어내렸다. 마찬가지였다. 벽지의 요철은 존재하지 않았다.


의자에 걸린 패딩 점퍼에 코를 박았다. 주머니 속의 열쇠를 꺼내 보았다. 여전한 무감각. 의자 등받이에 기대 고개를 젖혔다. 천장의 얼룩이 시야에 들어왔다. 익숙한 낯짝. 이사 전, 매일같이 마주하던 곰팡이와 같은 형상이었다.


순간, 담배 냄새가 비강을 찔렀다. 발원지는 책상이었다.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찌그러진 담뱃갑 하나가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코를 갖다 댔다. 진한 니코틴의 향.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건조한 종이의 질감이 입술을 타고 혀끝에 닿았다. 담뱃갑에 들어있던 초록색 라이터를 꺼내 불을 켰다. 치직. 마찰음과 함께 불꽃이 튀었다.


숨을 들이마셨다. 익숙한 담배 맛이 목구멍으로 넘어와 폐 속을 가득 채웠다. 숨을 내뱉었다. 회색 연기가 방안의 밀도를 수정했다. 손가락에서 금속 비린내가 났다. 의자 등받이가 삐그덕거리는 소음을 냈다. 바닥의 냉기가 발바닥의 신경을 타고 뇌까지 올라왔다.


그제야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의자에 기댄 채 천장의 얼룩에 시선을 고정했다. 스스로 타들어 가던 담배는 어느새 불이 꺼져 있었다. 타액으로 젖은 필터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다시 자리에 누웠다.


평소와 같이 출근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일자리가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모든 것이 평소의 궤도로 복귀했다. 점장은 내가 다시 ‘성실’해졌다고 평가했다. 무슨 요일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새벽마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다. 매번 내 이름을 불렀다. ‘이 민호!’. 여전히 돌아본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손님과 혼동할 일은 없었다. 손님들은 나를 ‘저기요’라고 불렀다. 같은 일상이었다. 항상 입는 청바지 사이즈가 점점 커져갔다. 허리에 맞던 바지는 이제 골반에 걸쳐있었다. 미숙 아줌마의 메시지는 정기적으로 도착했다. 매번 같은 값을 전송했다. ‘잘 지내고 있어요’.




이 점례 청구 보증금 반환 소송, 첫 번째 변론 기일. 지방 법원 제 O호 법정.


“20XX 가단, OOOOO. 임대차 보증금. 원고, 이 점례 씨.”


“네.”


“피고 1, 이 민호 씨.”


“네.”


“피고 2. 이 범재 씨.”


판사가 아버지의 이름을 불렀다. 재판장 내는 조용했다.


“이 범재 씨.”


호명이 반복되었다.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법원 직원이 판사에게 다가가 무어라 속삭였다. 판사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러고는 테이블 위의 서류를 집어 들었다.


“피고 2, 이 범재 씨는 불출석인 것 같으니 그냥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증거 자료 화면 좀 띄워주세요.”


선언과 동시에 판사 옆에 있던 커다란 스크린에 찜질방 계약서의 사진이 투사되었다. 판사는 서류를 넘기며 다음 페이지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었다.


“피고는 원고랑 계약을 하지 않았다고 답변서를 제출했는데, 그럼 계약은 누가 한 거죠?”


질문이 날아왔다. 판사의 시선은 서류 속 텍스트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하셨습니다.”


“여기 이 글씨도 본인 꺼가 아니고요?”


손가락이 화면을 가리켰다. 두 눈은 여전히 종이 위에 박제된 채였다. 판사가 가리킨 곳에는 내 이름이 확대되어 있었다.


“네. 제가 쓴 게 아닙니다.”


“그럼, 도장은 본인 꺼가 맞나요?”


“네. 도장은 제 꺼가 맞습니다.”


“이 도장도 피고가 찍은 게 아니란 소린거죠?”


“네.”


“그럼, 누가 찍은 거죠?”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아버지가 찍으신 것 같습니다.”


“정확히는 모르고요?”


“계약할 때 그 자리에 있던 게 아니라 모르겠습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흠…”


판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원고는 계약할 때 피고 1이랑 같이 안 있었나요?”


판사가 원고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판사의 시선이 닿자, 원고는 척추를 바로 세우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니, 그… 사장님이 오더니, 자기가 아버지라고 소개를 하더라고요… 아들이랑 같이 사업을 한다고… 소개는 용역 통해서 받은 건데… 그… 계약할 때…”


“아니, 그런 얘기는 됐고요. 그러니까 계약 당시에 피고 1이 같이 있었냐고요.”


목소리가 커졌다. 판사는 금테 안경을 낀 눈 위로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요…”


원고는 거의 들리지 않는 소리로 대답했다. 데시벨은 점차 작아져 0을 향해 수렴했다.


“위임장 같은 것도 안 받았습니까?”


“아니요… 안 받았는데요…”


대답과 함께 판사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계약을 하실 때에는 기본적으로 계약 당사자랑 서로 확인을 하고 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자기가 아버지라고 하니까 그냥 믿고 했죠…”


판사의 고개가 다시 한번 흔들렸다. 원고의 입은 닫혀있었다. 기록원의 타자기 소리만이 메아리쳤다. 소음이 멈추자, 판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피고 2는 출석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책임은 확실합니다. 그래서 지금 몸으로 때우겠다고 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거기도 할 테고요. 그런데 피고 1의 경우는 피고가 계약서를 직접 작성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는 이상, 원고가 위임장이나 원고가 피고와 직접 계약을 했다는 다른 증거자료를 제출해서 입증을 하지 못하면 피고 1한테 책임을 묻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다음 재판까지 증거자료가 있으면 제출을 하도록 하세요. 그럼… ”


“어유… 그건 다 뭐래요…”


원고의 탄식이 판사의 말을 끊었다. 책상 위에 놓인 원고의 두 손이 서로의 피부를 문대고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변호사분을 찾아가서 여쭤보도록 하십시오.”


판사의 어조는 한층 단호했다. 미간의 주름이 다시 한 번 깊은 고랑을 파냈다.


“그럼, 다음 재판은… 한 달 뒤 금요일, 같은 시간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원고 피고 모두 제출할 서류나 추가 답변 내용이 있으면 제출하도록 하세요.”


“네.”


“네…”


원고와 피고의 대답이 교차했다. 첫 번째 재판 종료. 소요 시간 10분 미만. 아버지의 선고와 동일한 속도였다. 재판소까지 지하철로 왕복 150분. 투입된 시간과 결괏값의 불균형이 발생했다. 재판의 진행 과정은 단순했다. 답변서의 텍스트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추가 증거 제출 필요. 한 달 뒤 같은 시각. 그게 다였다.




“민호야 괜찮니?”


자리에서 일어나자 방청인 석에 앉아 있던 미숙 아줌마가 말을 걸었다. 아줌마는 첫 번째 재판이라는 명분으로 동행을 자처했다. 통화 종료 직전 덧붙인 아들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 여전히 잔상으로 남아 있었다.


“네?”


“괜찮은가 해서… 이렇게 큰 일 겪고 있는데…”


“괜찮습니다.”


“고생했네, 우리 민호.”


아줌마가 어깨를 토닥였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갈까? 밥 먹으러 갈래? 민호 퇴근하고 바로 오느라 아직 밥 안 먹었지?”


밥. 식사보다 집에 남겨두고 온 두꺼운 이불이 먼저 떠올랐다. 최적의 답변을 선별할 여유도 없이 ‘귀찮다’는 결론이 뇌를 점유했다. 하마터면 그대로 뱉어버릴 뻔한 대답을 가까스로 삼켰다.


“아,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요. 그냥 집에 가서 바로 쉬어야겠어요.”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그럼, 집까지 데려다 줄 게. 그건 괜찮지?”


아줌마는 내 어깨를 한 번 더 두드리고는 엘리베이터의 하강 버튼을 눌렀다. 75분을 단축할 기회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엘리베이터는 B1층에서 멈췄다. 아줌마의 뒤를 따라 말없이 걸었다.


“요즘엔 좀 어떠니?”


자동차가 주차장을 이탈해 법원 앞의 사거리에 진입하자 아줌마가 물었다.


“네?”


“요즘에 지내는 건 좀 어떤가 해서…”


“아… 네. 맨날 똑같아요. 출근하고, 집에 와서 자고…”


자동차의 좌회전 신호가 점멸하며 딸깍거리는 반복적인 기계음을 냈다.


“많이 힘들진 않고? 살도 엄청 빠진 것 같은데… 뭔 일 있는 거 아니지?”


8차선 도로로 진입하자 속도계 바늘이 점차 상승했다.


“아, 그냥 뭐… 얼마 전에 우울증 테스트인가 하는 걸 해봤는데 그거 점수가 좀 높게 나온 거 말고는… 딱히 없어요.”


“우울증?!”


목소리의 데시벨이 급격히 높아졌다. 나들목을 통과한 차량은 어느새 한강 변 구간에 접어들어 있었다.


“아, 네. 그냥… 친구가 저도 한 번 해보라길래.”


“아유, 그렇구나… 힘들겠네…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병원은 가 봤니?”


검사 비용 때문에 병원에는 가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한강에 반사된 햇빛에 눈이 부셔 조수석의 선바이저를 내렸다. 아줌마는 주차장을 나오면서부터 이미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아줌마 아는 사람 중에도 우울증 걸려서 치료받는 사람이 하나 있거든…”


자동차가 한강 다리에 진입할 무렵, 다시 아줌마가 입을 열었다.


“옆에서 보니까 정말 안 돼 보이더라고… 약도 먹고 그런다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왔다 갔다 하고 그래서 견디기가 너무 힘들대.”


대답하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민호도 힘내. 우울증이 옛날에야 뭐 정신병이네 뭐네 그랬지만 요즘에는 정말 흔히들 걸리고 그런다잖아. 의사가 TV에 나와서 그러는데 우울증은 그냥 마음의 감기 같은 거래. 그래서 누구라도 걸릴 수 있는 그런 거라고…. 그리고 왜, 그 있잖아, 옛날에 유명했던 연예인…. 이름이 뭐더라? 아무튼 그 사람도 얼마 전에 TV에 나와서 사실은 오랫동안 우울증으로 고생했다고 그러더라고…. 민호도 알지?”


“아, 네.”


모르는 내용이었다. 방에 컴퓨터는 있었지만, TV는 없었다. 설사 TV가 있었다 하더라도 연예인의 상태가 어땠는지, 그런 이야기는 나와는 무관했다.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멀리 철교 위에서 전철 한 대가 반대 방향으로 빠르게 내달리고 있었다.


“그 사람도 이제는 다 낫고 TV에도 자주 나오고 CF도 찍고 그러잖아. 그치? 그러니까 민호도 ‘이것도 다 지나갈 거다~’라고 생각하면 금방 다시 괜찮아질 수 있을 거야. 뭐든지 마음먹기 나름이라잖니?”


“네… 감사합니다.”


“그래~ 아줌마는 민호 믿으니까… 민호도 아빠 아들이니까 아빠처럼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네, 알겠습니다.”


단답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아까부터 시선은 창밖의 풍경에 고정되어 있었다. 장면은 다리 위에서 나들목으로, 익숙한 도심의 데이터로 전환되었다. 잠깐을 더 달려, 자동차는 목적지인 동네 어귀에 근접했다. 아줌마에게 전방 사거리에 있는 횡단보도를 가리키며 차를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자동차는 비상등을 깜박이며 점차 감속하다 횡단보도 옆에 있는 갓길에 정차했다. 인사를 건네고 안전벨트의 버튼을 눌렀다. 차 문을 열고 내리려던 찰나, 아줌마가 나를 불러 세웠다.


“민호야, 잠깐 할 말 있는데, 괜찮지?”


“아, 네, 뭐.”


차에서 내리려던 신체를 다시 시트에 밀착시키고 안전벨트를 재연결했다. 아줌마는 아빠가 항소를 준비하려고 한다며 말문을 열었다.


“2년은 너무 길다고… 아빠도 건물주한테 당해서 그런 거라고 억울하시다고… 그래서 고등법원에 항소하실 거래…”


아빠라는 단어의 수신과 함께 왼쪽 눈꺼풀이 경련을 일으켰다. 나는 손가락으로 눈 주변을 문질렀다.


“그래서 그런데… 민호가 혹시… 법원에 탄원서 좀 제출해 줄 수 있겠냐고 물어봐 달라시더라고…”


‘탄원서요?’라고 짧게 대답했다. 아줌마가 상체를 틀어 내 쪽을 보았다. 시선이 교차했다. 두 눈이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응… 그 탄원서가 가족들이 내야 효과가 있다고 하더라고… 본인이 신청하는 건 의미가 없고 또 잘 받아주지도 않는다나 봐… 그리구 그… 쓰는 김에 가석방 신청서도 하나 써줬으면 해서…”


대답하지 않았다. 나를 보고 있는 동공을 나 또한 마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줌마의 속눈썹 위로 마스카라가 새까맣게 덩어리져 있었다.


“아빠가 민호에 대해서 부양의무가 있다는 걸로 해서 쓰면 어떨까 해… 우울증인 데다가 혼자 지내고 있다고… 아들이 이렇게 아프고 힘드니까 아빠가 빨리 나가야 한다고 하면 그래도 형량이 몇 개월이라도 좀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부릅뜬 눈이 더 깊이 나를 응시했다. 시선은 피하지 않았다. 눈두덩이에 덧씌운 보라색 화장품 자국이 주름을 따라 갈라져 있었다.


“우울증은 아줌마 아는 병원 가서 진단서 떼면 어떨까 싶은데… 비용은 아줌마가 내줄게. 검사비 꽤 비싸지?”


아줌마는 검사비를 들먹이며 우울증을 언급했다. 시장가치를 이미 파악했다는 듯, 자연스러운 제안이었다. 하지만 내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아줌마에게 아버지가 그렇게 시키더냐고 되물었다. 아줌마는 입을 굳게 다무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맞닿은 입가에 붉은 립스틱이 번져 있었다.


“아줌마는요? 아줌마는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생뚱맞은 질문을 던졌다. 이유는 모르겠다. 불현듯 떠오른 궁금증이었는지, 무언가를 캐묻고 싶었던 것인지… 그저 닫혀있는 입을 열어보고 싶었던 것 뿐일지도 모르겠다. 내 질문에 아줌마는 '어?'라며 짧은 대답을 내뱉었다. 나는 아줌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재차 물었다. 눈 앞에 있는 두개의 동공이 점점 커져갔다.


“아줌마도 민호가 해줬으면 좋겠어… 아빠 위해서 하는 거니까…”


아줌마의 양손이 내 손을 부여잡았다. 손바닥에 맺힌 끈적한 땀이 내 손등에 맞닿았다. 반사적으로 손을 빼냈다. 맞은편의 눈동자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눈은 더이상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안전벨트를 풀고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 횡단보도 신호는 마침 녹색으로 변해있었다. 등 뒤에서 호출음이 들렸다. ‘민호야’, ‘민호야 이러지 마!’, ‘민호야 아빠 좀 살려줘’…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보행 신호의 기계음이 아줌마의 목소리를 덮어씌웠다. 길을 건너 골목으로 진입했다. 졸음의 무게가 다시 쏟아져 내렸다. 잠들지 못한 아침의 반동은 크게 돌아왔다. 반쯤 닫힌 시야로 길을 더듬었다. 내 신체의 형상 그대로 함몰되어 있을 한 겹의 이불이 다른 무엇보다 간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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