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토리노의 말

by 익수정

고지에 대한 안내 말씀


부가가치세 신고 후 신고세액을 무(과소) 납부하였으므로 고지합니다.


(중략)


과세표준은 부가가치세 89,705,825


세율 10.00%


산출세액은 8,970,581


여기에 가산세 60,626원을 더하고


각종 공제세액 3,788,810원을 빼면


납기 내 고지세액은 5,242,390원이 됩니다.


(중략)


이 납세의 고지에 대한 가산세별 세부내역은 아래와 같습니다.


가산세 구분 납부 불성실


대상 금액 5,181,771


세율 미납일 x 0.03 %


세액 60,626


(중략)


납부금액 5,462,560


납부기한 11-30까지




미납된 세금, 5백4십만 원. 고지서에 인쇄된 까만 숫자들을 주머니 속으로 구겨 넣고 현관문을 열었다. 공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의자에 앉아 핸드폰으로 통장 잔액을 확인했다. 월세를 치르고 나면 자릿수조차 의미 없어지는 금액. 날붙이 하나가 명치 끝에 걸린 듯한 이물감이 전신에 휘감겼다. 실망 같은 고상한 감정은 아니었다. 교도소에 수감된 남자에게 줄 만큼의 밑천 같은 건 진작에 바닥난 지 오래였다. 책상 위에 쓰러지듯 엎드렸다. 심장이 요동치다 멎기를 반복했다. 시야의 가장자리가 검게 번졌다. 다시 눈을 뜨자 눈앞에는 커다란 콘크리트 벽이 세워져 있었다.


넘을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나는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1억 5천이라는 채무를 등에 업고 살아보겠다고 버텨온 시간이 머릿속을 스쳤다. 건강보험료라는 균열은 꿈을 팔아 메웠다. 하지만 이제 더는 팔아치울 꿈조차 남지 않았다. 가진 게 없으니 포기할 권리도 없었다. 빈 주머니에는 메마른 먼지 조각만이 만져졌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돈을 낼 마음이 없었다. 공과금, 월세, 보험료, 그리고 세금. 방치된 숫자들이 ‘명의’라는 올가미로 묶여 있었다. 우연이 아니었다. 내 이름으로 된 모든 서류는 정교하게 설계된 낚싯바늘이었다. 그리고 나는 남자가 던진 미끼를 의심 없이 물어버린 멍청한 제물이었다.


눈물이라도 터져 나올 줄 알았지만, 안구는 뻑뻑하기만 했다. 시계 초침의 째깍거리는 소리만이 고요한 방 안을 찔러댔다. 다시 책상 위로 쓰러졌다. 얼마나 흘렀을까. 핸드폰 알람이 비명을 질렀다. 출근 시간이었다.

몸은 다시 일상의 궤도 위로 굴러갔다. 점장에게 휴무를 구걸하는 문자를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했지만, 결국 전송 버튼을 누르지는 못했다. 감정은 허기를 채워주지 않았다. 미납된 숫자들을 떠올리면, 하루치의 일당은 결코 거절할 수 없는 물리적 질량이었다. 540만 원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푼돈이었지만, 벼랑 끝에 몰린 짐승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삶의 리듬은 단조롭고도 비정했다. 낮에는 잠들고, 밤에는 카운터를 지켰다. 세금 기한은 하루하루 목을 조여왔다. 점장에게 부탁해서 주말 아르바이트까지 일정을 추가했지만, 그게 다였다. 주말 만근으로 고작 40만 원. 계산기를 두드렸다. 시급 6,000원. 30일. 144만 원. 허리띠를 졸라매어도 500만 원을 모으려면 적어도 여섯 달은 넘게 걸렸다. 해를 넘겨야만 완성되는 수식. 납부 기한은 당장 다음 달 말. 웃음조차 나지 않는 현실은 언 발에 오줌 누기만도 못했다. 시선은 자연히 은행 대출과 사채로 향했다. 친구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학자금 대출 이자에 허덕이는 사회 초년생들에게 500만 원이란 존재할 리 없는 숫자였다.




11월이 왔다.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다. 달력의 첫 장과 함께 소장을 하나 선물로 받았다. 합의 불발에 따른 재판 출석 통지서였다. 1억 5천만 원. 진짜 재판의 서막이었다. 500만 원에도 숨이 막히는 판에 1억 5천이라니. 비현실적인 금액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11월의 축복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재앙은 연쇄적이었다. 지역방송 회사가 보낸 찜질방 인터넷과 TV 회선의 독촉 문자 12만 원, 정수기 업체가 보낸 정수기 렌털 요금 150만 원. 가난의 공식은 늘 이런 식이었다. 악재는 마치 중력처럼, 서로를 필사적으로 끌어당겼다.

지역방송의 12만 원은 즉시 송금했다. 그 정도는 수습할 수 있었다. 하지만 150만 원은 아니었다. 게다가 내용이 이상했다. 미납금에는 찜질방 폐업 이후의 비용까지 고스란히 정산되어 있었다.


다음 날, 퇴근 후 쓰러지듯 잠들었다가 창틈으로 스며든 서늘한 공기에 눈을 떴다. 방 안을 떠돌던 초겨울의 냉기가 뺨을 찔렀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갈라진 쇳소리를 냈다. 몇 번 헛기침을 한 뒤 핸드폰을 집어 들어 정수기 회사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마음을 전하는 OO 정수기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 안녕하세요. 저… 미납 요금 때문에 연락드렸는데요.”


“네, 말씀해 주세요.”


“9월에 가게를 폐업했는데 문자가 저번 달 요금까지 내라고 와서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이 민호요.”


“이 민호 님, 대성 사우나 맞으신가요?”


“아, 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확인 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통화가 잠시 멎었다. 수화기 너머로는 익숙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전산 확인 결과, 대성 사우나에서 정수기 4대와 공기 청정기 2대를 현재까지 사용 중인 것으로 확인됩니다.”


“9월에 폐업을 했는데도요? 그럴 리가 없는데…”


“전산에는 사용 중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상담원의 목소리에는 의문도, 확신도 없었다. 그저 출력된 정보를 읽어 내려가는 무심한 전자음이었다.


“폐업을 했는데도 사용 중이라고요? 그건 말이 안 되지 않나요?”


“고객님, 폐업 여부와 관계없이 해지 및 기기 반환 요청이 접수되지 않으면 사용 중으로 간주됩니다. 혹시 반환 신청은 하셨을까요?”


나는 찜질방의 명의만 내 이름일 뿐, 실제 운영자는 아버지였기에 상세한 내용은 모른다고 답했다.


“사용자께서 해지 신청을 하지 않으셨다면 계약은 유지됩니다. 해지 접수 이력을 다시 조회해 보겠습니다.”

정적이 흘렀다. 전산망을 검색하는 타건음만이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확인되었습니다. 9월에 이 범재 님 성함으로 해지 신청을 한 기록은 있으나, 기기 반환 불가 사유로 자동 취소되었습니다.”


“반환 불가요? 그게 무슨 소리죠?”


“기기 반환이 완료되지 않으면 해지 절차는 진행되지 않습니다. 미반환 시 해지 신청은 취소 처리됩니다. 해지 접수를 다시 진행해 드릴까요?”


“아… 네. 해주세요.”


다시 한번 자판을 두드리는 건조한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상담원이 숫자를 뱉어냈다.


“현재 렌탈 요금 미납분 148만 5천 원, 중도 해지 위약금 236만 4천8백4십 6원입니다. 총액 3백8십4만 9천9백6십 6원으로, 이 금액은 해지 신청 일자로부터 일주일 이내에 기계 반환이 완료될 경우에만 유효합니다. 기간 내 미반환 시 해지 신청은 자동으로 취소됩니다. 결제는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잠깐만요, 위약금이요?”


“네. 3년 약정 계약이므로 중도 해지 시 위약금이 발생하십니다.”


“제 의지로 해지하는 게 아닌데도요? 건물주가 강제 집행을 해서 쫓겨난 거라고요.”


“개별적인 사안까지는 저희도 판단할 수가 없는 부분입니다. 위약금과 미납금을 전액 납부하셔야 해지가 완료됩니다, 고객님.”


“그럼 저번 달까지 나온 요금은요? 9월에 폐업하고 해지 신청까지 했다는데 왜 지금까지 요금이 나오나요? 쓰지도 않았는데요.”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기기 반환 미이행으로 인해 해지 신청이 취소되셨습니다. 전산상으로는 계속 기기를 사용 중인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9월에 폐업을 했다니까요? 찜질방도 문을 닫아서 정수기나 공기 청정기는 사용할 수가 없어요.”


“그 부분까지는 저희가 알 수 없는 부분입니다, 고객님. 규정상 해지 신청 취소로 계속 사용 중인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미납금 전액을 납부하셔야 합니다.”


대화는 지구를 떠도는 달처럼 공전했다. 나는 모른다, 전산이 그렇다, 규정이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에는 높낮이도, 강약도 없었다. 공감의 주파수가 거세된 기계적인 진동. 목소리에는 악의조차 없었다. 공감을 처리할 명령어가 할당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아버지, 진호, 부동산 아줌마, 그리고 상담원까지. 모두가 커다란 기계의 부품들이었고, 그게 현실이라는 이름의 시스템이었다. 과거, 인정을 베풀겠다며 사업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던 나의 어리석음이 상담원의 기계적인 대응 위에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단단하던 껍데기 안에서 무언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요… 뭘 아시겠어요.”


“네?”


상담원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겼다. 예기치 못한 입력값에 시스템이 오류를 일으키는 소리였다.


“어차피 상담원님도 시키는 대로 하는 거뿐이잖아요. 제가 실제로 썼는지 안 썼는지는 중요하지 않겠죠. 할 일만 처리하면 그만이니까요.”


“…”


침묵. 상담원의 매뉴얼에는 내 물음에 대한 응답 코드가 없는 듯 했다.


“제 말이 맞지 않나요?”


시스템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그런 생각이 드네요. 적어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면, 수화기 너머에 진짜 사람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나 하고요. 그런데 상담원님은 계속 ‘나는 모른다.’, ‘나랑 상관없다.’, ‘전산상에 나온 대로 처리할 뿐이다.’라고 말하고 계시잖아요. 저는 그게, 좀… 슬프네요.”


“…”


“상담사님한테 뭐라고 하려는 건 아니에요… 뭐, 어쩌겠어요. 상담사님도 시키는 대로 하는 것뿐일 텐데. 우리가 무슨 힘이 있겠어요. 안 그래요?”


“고객님, 해지 신청을 진행해 드릴까요?”


같은 질문이 돌아왔다. 수화기 너머에 정말 사람이 있긴 한 걸까… 실망한 건 아니었다. 누군가를 콕 집어 했던 말은 아니었으니까.


“아뇨… 괜찮습니다.”


“그럼, 계속 사용하시는 것으로 유지할까요?”


“폐업 상태라 쓰고 싶어도 못 씁니다.”


“…그럼 어떻게 처리해 드릴까요…?”


“어떻게 해 주실 수 있는데요?”


“…”


재차 오류를 일으켰다. 시스템에는 더 이상 처리할 수 있는 명령어가 없었다.


“그냥… 알아서 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고객님. 마음을 전하는 OO 정수기, 상담원 김 성은이었습니다.”


뚜- 뚜- 뚜-.


끊어진 신호음이 텅 빈 방 안에 울려 퍼졌다. 핸드폰을 책상 위에 내팽개치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눈을 감자 대학 교양 수업 시간에 들었던 어떤 철학자의 일화가 떠올랐다. 토리노의 광장에서 채찍질을 당하고 있는 말의 목덜미를 붙잡고 울다가 이내 미쳐버렸다는 한 남자. 왜였을까.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채 짐승의 고통에 몸을 던진 남자의 고독은, 어쩐지 지금 내 방의 공기와 닮아있었다.


다시 두통이 밀려왔다.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어 앉아 뒤통수를 쿵, 쿵 찧었다. 후두부의 통증으로 두통을 덮고 싶었다. 벽을 때리는 진동이 뇌를 흔들며 온몸으로 번졌다. 몇 번을 더 반복하다가 멈췄다. 영문 모를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코끝이 매워졌고, 그 모습을 들키기 싫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미처 눈으로 흘러나오지 못한 액체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며 꺼억- 꺼억- 하고 거친 숨소리를 뱉어냈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목구멍을 압박하는 꿀렁임과 뺨을 타고 흐르는 미지근한 액체의 온도만이 한 칸짜리 방 안에 존재하는 유일한 실재였다. 제어장치가 고장 난 댐처럼, 제어할 수 없는 감각들이 멈출 줄 모르고 쏟아져 나왔다.


화장실로 달려가 찬물에 얼굴을 처박았다. 계속 울고 있을 수는 없었다. 출근 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세면대에서 고개를 들자 거울 속에 퉁퉁 부은 얼굴이 보였다. 수건으로 대충 물기를 훔쳐내고 방으로 돌아왔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운동화를 꺾어 신은 채 골목으로 나섰다. 일상은 그랬다. 슬퍼하고 괴로워할 틈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정교하게 설계된 레일 위로 끊임없이 나를 밀어 올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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