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첫째 주.
8월의 끝자락부터 시작된 비는 일주일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뉴스에서는 장마라고 떠들었다. 계속 내리는 비 탓에 벽지가 축축하게 부풀어 올랐다. 이사 이후 나는 줄곧 방 안에 처박혀 있었다.
일과라고 할 것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 새벽녘에 도시락을 사러 편의점에 다녀오는 게 전부였다. 가끔은 돈을 아끼기 위해 굶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몸은 멀쩡했다.
그제는 지방법원에서 고소장이 날아왔다. 이사를 한 건 어떻게 안 건지, 우체부는 정확하게 내 방문을 두드렸다. 수취인 이 민호. 다른 이름으로는 피고 1. 그 아래에는 피고 2, 이 범재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원고는 이 점례. 원고가 요구한 금액은 1억 5천만 원. 민사 소송. 증거로 첨부된 것은 내 인감도장이 찍힌 임대차 계약서였다.
출석은 3주 뒤였다. 재판은 아니고, 조정이라고 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조정은 재판까지 가기 전에 원고와 피고가 원만한 합의를 통해 분쟁을 끝내라는 제도라고 했다. 합의라… 내 수중에 남은 건 이사를 끝내고 남은 고작 130만 원 남짓이 전부였다. 이걸로도 합의를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얼마든지 할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상대 쪽에서 받아들일지는 의문이었다. 1억 5천이라는 숫자 앞에서 1백3십만은 먼지보다 가벼웠다. 고소장을 방구석으로 집어 던지고 다시 이불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비 내리는 방은 아직 여름이 다 끝나지 않았음에도 뼈가 시리도록 싸늘했다.
어제는 미숙 아줌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민호야, 이사해야 된다며?”
나는 이미 끝냈다고 짧게 대답했다.
“아유~ 아줌마한테 연락하지~ 이삿짐 싸는 거라도 도와주고 그랬을 텐데… 아줌마가 아빠한테 면회 다녀왔는데 이사할 때 챙겨야 할 짐이 있다고 하시더라고~”
그 또한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고 대답했다. 아버지의 짐은 잊지 않고 챙겼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전했다.
“어휴~ 민호가 다 컸네~ 어른이네, 어른이야. 역시 큰아들은 다르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잘 지내고 있느냐는 안부 끝에 나는 법원에서 온 고소장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 큰일이네… 아줌마도 지금 아빠 재판 때문에 변호사 선임하고 그러느라 정신이 없거든… 안 그래도 오늘 변호사 사무실에 다녀올 건데, 민호 이야기도 해 둘게. 전에 변호사님이 민호 꺼도 같이 봐주신다고 했었거든~”
‘감사합니다’라고 짧게 답했다. 통화는 밥 잘 챙겨 먹으라는 당부와 함께 끝이 났다. 빗줄기는 점점 거세졌다. 이불을 머리 꼭대기까지 덮어 올렸다. 방 안에는 여전히 빗소리가 고여 있었다.
9월 둘째 주.
오랜만에 외출을 했다. 법원 앞 변호사 사무실. 11시 약속이었으나 미숙 아줌마는 30분이 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공허한 신호음만 반복될 뿐이었다. 테이블 위 검게 식어버린 커피에는 얇은 기름막이 떠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냐며 물어보던 여직원도 이제는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한적한 사무실에는 딸깍거리는 마우스 소리와 복사기의 기계적인 소음만이 건조하게 울려 퍼졌다. 지루한 기다림 끝에 아줌마가 도착한 건 12시가 다 되어서였다.
“민호야, 아줌마가 좀 늦었지? 볼일이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바람에…”
전화조차 받지 못할 만큼 대단한 일이었을까. 나는 ‘네’라고만 짧게 답했다. 따져 물을 수도 있었을 테지만 구태여 그러지 않았다.
“들어가자. 우리 때문에 변호사님이 오래 기다리셨겠다.”
아줌마는 ‘우리’라는 단어로 자신의 지각을 공동 책임으로 돌렸다. 거슬리는 표현이었지만, 거슬려하는 것조차 이제는 귀찮은 일이었다.
“아유~ 변호사님 죄송해요~ 저희가 너무 늦었죠~”
변호사의 이름이 적힌 방문을 열며 아줌마가 말했다. 그 뒤를 따라 들어가며 목례를 했다. 방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가죽 소파가 있었다. 광택이 나는 새까만 소파였다. 소파 뒤의 안쪽 벽에는 커다란 책상 하나가 놓여있었고, 그 뒤에는 책장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책장에 꽂혀있는 두꺼운 책들에는 무슨 무슨 법이라는 한자가 잔뜩 쓰여 있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마침 오늘 오전 중에는 예약도 없었어서.”
뿔테 안경을 쓴 변호사가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안경을 썼음에도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변호사는 ‘우리’에게 소파 쪽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아줌마를 따라 소파 한쪽에 나란히 앉았다. 변호사는 우리가 앉은 자리의 반대편에 자리에 가볍게 다리를 꼬고 앉았다.
“전에 저희 꺼 봐주시면서 민호 꺼도 좀 봐주신다고 하셨잖아요~?”
변호사가 의자에 앉자마자 아줌마가 말을 꺼냈다.
“민호요?”
변호사는 처음 듣는 이름이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그 아드님.”
가볍게 쥔 주먹으로 허벅지를 치며 변호사가 말했다. 이어서 나에게 소장은 가져왔느냐고 물었다. 가방에서 고소장을 꺼내 봉투째 건넸다. 남자는 건네받은 봉투에서 서류뭉치를 꺼낸 다음 익숙한 손놀림으로 훑어 내려갔다.
“음… 답변서 쓰시면 되는 거네요?”
소장의 마지막 장을 넘기던 변호사가 종이 너머로 슬쩍 나를 올려다보았다. 뿔테 안경 너머의 시선이 차갑게 꽂혔다.
“네?”
“이거, 답변서 쓰시면 되는 거냐고 말씀드린 겁니다.”
“아뇨, 전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도 몰라서… 일단 아주머니가 가져오라고 하셔서 가져온 거거든요. 변호사님이 제 소송도 같이 봐주신다고 하셨다고 해서…”
“아니요. 그런 적은 없습니다만…”
남자의 눈동자가 내 눈에 고정되었다. 단 한 방울의 습기도 없는, 건조하고 사무적인 눈빛이었다.
“오해가 생길까 봐 확실하게 말씀드리는 건데, 제가 정확히 이 민호 씨 사건을 같이 맡아 드린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소장을 받으시게 되면 거기에 대해 상담을 해 드린다고만 말씀드렸었습니다.”
변호사는 딱 잘라 말했다. 명확한 선 긋기였다. 미숙 아줌마는 분명 내 것도 같이 봐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딘가 익숙한 배신감. 모래 맛이 나는 버석함. 나는 지금도 구치소에 있을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래서, 이 건 같은 경우는 답변서를 작성해서 보내시면 됩니다. 답변서가 뭔지는 아시죠?”
“아뇨… 모르는데요… 그건 뭔가요…?”
변호사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아니, 그냥 숨을 들이마신 거였는지도.
“답변서는요, 소장 내용에 반박하는 서류입니다. 형식은 법원 사이트에 가시면 다 나와 있고요. 그 양식대로 작성을 하신 다음에 법원에 가셔서 원고랑 법원에 한 부씩 보내면 됩니다. 작성 기한은 송달받으신 날로부터 30일, 그러니까 한 달 내에 보내시면 되고요. 이해하시겠어요?”
“아, 네…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저 같은 경우는 출석이 3주 뒤던데… 그런 건 상관없나요?”
“상관없습니다.”
“그럼… 답변서에는 뭘 적어야 하나요?”
“소장 내용을 보시고, 거기에 있는 내용들이 있으면 반박을 하시고 증거자료로 첨부하실 게 있으면 첨부하시면 됩니다. 없는 내용을 굳이 더 쓸 필요는 없고요.”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다른 질문은 없으신가요?”
목소리에는 서둘러 대화를 종결짓고 싶어 하는 기계적인 무정함이 섞여 있었다. 궁금한 점은 산더미 같았으나, 말이 되지 못한 채 목구멍 안으로 사라졌다. 무언가를 묻기에 나는 법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나도 적었고, 법이 말하는 것들 또한 나의 실생활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었다.
“지금은… 없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질문에 당황한 아이처럼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모른다는 사실이 혀끝에서 씁쓸하게 맴돌았다. 입술을 깨물었다. 감각은 금세 모멸감으로 번졌다. 아무 대답이 없자 변호사는 기다렸다는 듯 다음 예약을 준비해야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짧은 목례를 주고받았고, 아줌마와 나는 쫓겨나듯 사무실을 나왔다.
돌아오는 차 안,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미숙 아줌마였다. 수임료가 비싸서 당연히 내 몫까지 포함된 줄 알았다는 지겨운 목소리가 비좁은 공간을 채웠다. 나는 소음을 무시한 채 창밖의 풍경에 시선을 고정했다. 적절한 대답도, 어색한 분위기를 조율해야 할 의무도 없었다. 자동차 낮은 진동음만이 간신히 침묵을 메꾸고 있었다. 집 근처 사거리에 이르렀을 때, 나는 차를 세워달라고 했다.
“골목이 워낙 좁아서요. 차 돌리실 때 불편하실 거예요.”
핑계였다. 아줌마의 부채감 섞인 목소리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도망치고 싶었을 뿐이었다. 인사를 하고 차 문을 닫자마자 골목 안으로 몸을 숨겼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컴퓨터를 켰다. 법원 사이트에 접속해 변호사가 말한 답변서 작성법과 서식을 찾았다. 인터넷상으로도 답변서 제출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팝업 알림이 브라우저 화면에 커다랗게 떠 있었다. 법원까지 다시 가기는 귀찮았다. 보안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온라인 답변서 양식에 내용을 채워 넣었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니라는 사실을 적기만 하면 될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완료 버튼을 누르는 순간, 열려 있던 브라우저 창이 비정하게 꺼졌다. 다시 접속해 답변서를 작성하자 이번엔 로그인 시간이 만료되었다며 작성했던 문장들이 증발했다. 재로그인을 거쳐 같은 내용을 다시 기재했지만, 인증서 오류라는 장벽이 앞을 막아섰다. 편의라는 이름의 시스템이 나를 고문하고 있었다. 모니터의 하얀 불빛이 망막을 찔러댔다. 눈이 시려 왔다.
답변서는 몇 번의 반복 끝에, 차라리 직접 법원에 가서 종이를 내미는 게 속 편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쯤에야 겨우, 완료 메시지를 띄웠다.
9월 마지막 주.
첫 번째 조정, 1011호 조정실. 맞은편에 앉은 아줌마가 아까부터 나를 정면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거친 숨소리가 좁은 테이블을 넘어와 내 얼굴에 닿았다. 나는 시선을 피해 테이블 위에 놓인 고소장으로 눈을 떨어뜨렸다.
“그러니까, 지금 피고는 아예 지급이 불가능하다는 말씀이신가요? 흠… 당장은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일정 금액은 일시 지급으로 하고, 나머지는 매달 지급하는 걸로도 가능은 할 텐데요…”
자기 몸보다 한 치수는 더 큰 정장을 입은 남자가 말했다. 두툼하게 튀어나온 셔츠와 반쯤 벗겨져 번들거리는 머리. 이 남자가 내 사건의 조정인이었다.
“그것도 힘들 것 같습니다. 지금 사는 곳도 월세이고… 직업도… 아르바이트도 아직 못 구한 상태입니다. 1억 5천을 달라고 하시는데, 드릴 수만 있다면 저도 드리고 싶지만, 없습니다.”
“지금 사는 데가 보증금이 얼마인데요?”
“500만 원입니다.”
“그럼 매달 지급 금액으로 해서 하는 건 어떠신가요. 한 달에 백만 원 정도씩이라도.”
“백만 원을 드리면 저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게 지금 제가 가진 돈 전부니까요. 알바를 한다고 해도 매달 백만 원이면 번 돈을 거의 다 드려야 할 텐데, 그럼 저는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지급 의사가 없으신 거군요?”
조정인이 서류를 넘기며 툭 내뱉었다.
“그걸 의사가 없는 거라고 하시면…”
“그게 없는 거지 뭐! 돈 떼먹은 새끼가 어쩜 저렇게 당당하대?”
여자가 말을 잘랐다. 한껏 당겨 묶은 머리 탓에 찢어진 눈이 더 날카롭게 치켜 올라가 있었다.
“아주머니… 의사가 없는 게 아니라 이건 어쩔 수가 없는 거잖아요. 그리고 제가 돈을 떼먹은 게 아니라 아버지가 제 명의를 도용한 거구요. 계약하실 때 저랑 직접 하신 것도 아니잖아요.”
감정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여자는 비웃음을 흘렸다.
“기가 차서 원. 어이가 없어서 말이 다 안 나오네. 누가 사기꾼 놈의 새끼 아들놈 아니랄까 봐 입만 산 것도 똑같네! 니가 지금 나한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있어?! 그 돈이 어떤 돈인데!!”
“원고, 진정하세요. 계속 감정적으로만 말씀하시면 자리에서 퇴장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조정인의 단호한 경고에 목청을 높이던 원고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조정인은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피고는… 계속해서 본인에게 책임이 없다고 하는데, 아버지에게 명의를 빌려준 거기 때문에 대리인 신분으로 계약이 효력을 가질 수도 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발뺌하시는 건 좋지 않아요.”
“하지만 전 이런 계약을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찜질방 명의를 빌려줬다고 하지 않았나요?”
“네. 하지만 찜질방 계약뿐이었습니다. 나머지는 몰랐습니다.”
“이 정도 규모의 사업이라면 보통 그 안에 또 다른 임대나 다른 계약들이 들어갈 거라는 건 상식적으로도 알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조정인이 한숨을 내뱉었다.
“그 상식이라는 게 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몰랐어요. 그리고 아버지도 저한테 다른 계약은 없을 거라고 했고요.”
“그 말을 믿었다고요?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됩니까?”
상식, 또 상식. 지겨운 단어가 반복되었다.
“그럼 반대로, 아버지가 아들한테 와서 몇 번이고 그렇다고 말하는 걸 ‘상식적으로’ 의심해야 하나요? 속인 사람이 잘못인 거지 속은 사람 잘못은 아니지 않나요?”
“확인하지 않은 본인의 과실입니다. 당연히 기본적으로 확인해야 할 사항 아닙니까.”
조정인의 힐난은 멈추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나를 가해자로 상정해 둔 듯한 태도였다. 원고, 그리고 피고. 아, 이 말은 바로 이런 뜻이었구나.
“아까부터 상식, 당연, 기본 이런 말씀을 하시는데, 그럼 아들 명의로 사기 치고 구치소에 들어간 아버지는 상식적이고 당연하고 기본적인 인간입니까?”
조정인은 이번에는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앞에 놓인 컴퓨터로 무언가를 검색하더니 스크린에 법 조항 하나를 띄웠다.
“여기 보세요, 여기. 여기 조항을 보시면 ‘계약자의 대리인이 계약을 체결한 것도 계약자에게 책임이 있다’라고 나와 있죠? 피고가 지금 자꾸 책임이 없다고 하시는데, 아버지에게 사업자 명의를 빌려준 것 자체가 대리권을 준 거라고 볼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공동 책임을 물을 수 있고요.”
“전 대리권 같은 건 준 적이 없습니다. 대리권을 줬다고 하시는데 만약 제가 대리권을 줬다고 하더라도, 아버지가 다른 계약을 하려고 한다면 조정인님 말씀처럼 ‘상식적으로’ 제가 그 계약서를 확인하거나 알고 있어야 하지 않나요? 아니면 아버지가 저한테 받은 위임장이라도 가지고 있던가요. 그런 게 있었나요? 없잖아요. 계약서에 있는 이름도 제가 쓴 게 아니라구요. 그럼, 대리권을 줬는지 안 줬는지 판결을 해봐야 아는 것 아닌가요? 조정인님은 조정인이지 판사가 아니지 않나요? 왜 아까부터 판결을 내리고 있으신 건가요?”
“그런 부분은 제가 말씀드리거나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니, 궁금하시면 법무사를 찾아가서 상담을 받아보십쇼.”
“방금은 저한테 책임이 있다면서요!”
“책임이 있을 수도 있다고 한 것이지, 책임이 있다고 한 것은 아닙니다.”
비겁했다. 중립을 지켜야 할 입을 마음대로 열어 나를 압박할 때는 언제고, 내가 반박하자 슬그머니 발을 뺐다. 나는 가만히 조정인을 노려보았다.
“…선생님, 그럼 얼마까지는 합의가 가능하실까요?”
갑작스러운 호칭 변화. 나는 순식간에 피고에서 선생님으로 격상되었다. 터져 나오는 실소를 참으며 대답했다.
“제가 한 계약이 아닌데 어떻게 드립니까. 못 드립니다.”
“그럼, 뭐 원고 측에 제안 드릴만한 다른 건 없나요?”
“다른 제안이요? 고소를 취하해 달라는 말 말고는 없습니다.”
“뭐 이새끼야?”
잠자코 듣고 있던 원고, 이 점례 아줌마가 소리를 질렀다.
“원고, 주의하세요.”
“아니 선생님, 선생님도 지금 저 새끼가 뭐라고 하는지 들으셨잖아요. 고소를 취하해 달라고? 1억 5천을 훔쳐 가놓고? 그게 말이 돼?”
“저랑 계약한 거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 점례 아줌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뭐 인마? 어떻게 양심도 없이 저런 말을 할 수가 있지? 저 쌍판때기 좀 봐봐 저, 저…. 어휴 내가 진짜 니 새끼랑 니 애비 때문에라도 제명에 못 죽는다, 진짜! 뭐, 책임이 없다고? 한 푼도 못 줘? 야 이놈의 새끼야, 그게 사기 쳐 놓고 할 소리야?”
“아주머니, 다시 한번 말씀드리는데 저는 아주머니께 사기를 친 적이 없습니다. 계약은 아버지랑 하신 거잖아요.”
“이 뻔뻔한 놈의 새끼 봐라… 이젠 지 애비 탓으로 돌리겠다? 그래~ 어디 한 번 니 애비한테 덤태기 씌워봐라, 그게 씌워지나. 누가 그 애비에 그 아들 아니랄까 봐 아주 쌍으로 사기꾼이야, 둘 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그 말에 위액이 역류했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떴다.
“사과하세요.”
“뭐?”
“사과하시라구요. 저야말로 아버지한테 사기당한 피해자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 취소하시고 저한테 사과하세요. 다른 말은 다 참아도 아버지랑 제가 똑같다는 건 못 참겠습니다.”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턱에 무거운 통증이 느껴졌다.
“못 참으면 어쩔 건데? 어? 뭐 어쩔 건데!? 그리고 사과? 사과는 무슨 놈의 사과야! 내가 너한테 사과를 왜 해 이 새끼야! 내 돈 떼먹은 건 네놈 새낀데! 너 처음부터 니 애비랑 짜고서 나한테 사기 친 거지? 그치? 너는 아주 그 얼굴만 봐도 사기꾼티가 나~ 아주 그냥 니 애비랑 똑같이 생겼잖아. 어휴~ 저 새끼도 깜빵에 들어갔어야 되는 건데…”
아줌마는 멈추지 않았다. 독설은 이제 광기에 가까워졌다.
“그렇게 말씀하지 마시라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하든 말든 내 맘이야 이 새끼야! 하면 어쩔 건데?!”
“조정인님, 저분 저러시는 거, 제지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까 퇴실 조치한다고 하신 거 아닌가요? 저렇게 막말해도 되는 겁니까?”
“원고, 말투 조심하세요.”
“막말~? 내가 틀린 말 했냐, 이 사기꾼 새끼야? 너 사기꾼이잖아, 사기꾼!”
조정인의 소극적인 주의는 방치에 가까웠다. 그 사무적인 태도가 여자의 비명에 기름을 부었다. 조정인은 제 할 일은 다 했다는 듯 서류를 뒤적였다.
일순, 눈앞의 조정인도, 되는대로 욕을 지껄이고 있는 저 여자도 모두 꼴 보기가 싫어졌다. 테이블 아래로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마른침을 삼키고, 조용히 조정인을 불렀다.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언제까지 저렇게 두실 건가요.”
“원고, 나가 계세요.”
“내가 왜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안 나가시면 직원 부르겠습니다. 나가세요!”
조정인이 소리치자, 여자는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방금까지 길길이 날뛰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었다. 여자는 시무룩한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나는 기괴한 그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이건 아무래도 피고 2께서 출석을 하셔야만 해결될 문제 같네요. 이 범재 씨는 아예 안 나오시는 겁니까? 출석을 안 한다는 건 소송 내용을 인정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일 텐데요.”
“잘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아닙니까?”
“맞습니다.”
“가족인데 그걸 모릅니까?”
“구치소에 계셔서, 모르겠습니다. 면회도 안 가고요… 가고 싶지도 않습니다.”
조정인은 내 대답을 듣고는 서류에 무언가를 기계적으로 적어 넣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원고한테 주소 보정 신청을 하라고 말을 해 둬야겠네요. 상황을 보아하니 두 분이 같은 자리에서 합의하기는 힘들어 보이니 따로 말씀을 좀 나눠야겠습니다. 선생님은 먼저 가셔도 좋습니다. 합의 의사가 없는 것 맞으시죠?”
“네.”
“알겠습니다. 그럼 나가시면서 원고 좀 들어오시라고… 아니다, 제가 들어오라고 하겠습니다. 그냥 가시면 됩니다. 결과는 몇 주 뒤 우편으로 송달될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하고 방을 나왔다. 방문 옆에 있는 의자에 원고가 침울하게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거품을 물며 날뛰던 광기는 사라지고, 전 재산을 잃은 초라한 여자만이 남아 있었다. 원고는 나를 보고는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원고를 지나쳐 복도 끝에 있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혼자만 남은 법원 엘리베이터 안. 11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그 짧은 시간의 낙하 동안, 영원에 가까운 슬픔이 밀려왔다. 왜 그토록 화를 억누르려고 했는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 점례 아줌마는 명백한 피해자였다. 전 재산을 잃은 사람의 분노는 정당했다. 나라도 아줌마처럼 날뛰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원고의 입장에 공감할 수 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나 역시 살기 위해서는, 원고의 정당한 분노를 온몸으로 부정해야만 했다.
더는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서로의 처지가… 피해자와 피해자가 마주 앉아 서로를 물어뜯어야 하는 이 지옥도가 어쩐지 서글펐다.
1층이라는 안내음이 울릴 때, 나는 황급히 눈물을 훔쳤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쏟아지는 군중을 지나 아직 태양 빛이 쨍쨍한 가을의 한복판으로 걸어 나왔다. 하늘은 시리도록 푸르렀고 구름은 무심하게 높았다. 그 눈부신 일상 아래에서 나는, 아줌마는, 서로의 지옥을 지키기 위해 있는 힘껏 발버둥 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