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이사 II

by 익수정

월요일.


아침에 눈을 뜨자 온몸의 근육이 두들겨 맞은 듯 비명을 질렀다. 이불은 밤새 흘린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몸이 덜덜 떨렸고, 이는 서로 부딪치며 딱딱 소리를 냈다. 고열이 몸을 불태우고 있었지만, 감각은 한겨울에 맨몸으로 밖에 내던져진 것처럼 시렸다. 이불 속에서 몸을 태아처럼 둥글게 말았다. 근육통과 두통이 계속해서 몸을 짓눌렀다. 이를 악물어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대로 다시 의식이 끊겼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부딪치는 소리는 여전히 천둥처럼 귓전을 때리고 있었다. 십 초가 지났는지 십 분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는, 시간의 단위가 무너진 고통이 반복되었다. 이불 속에서 무어라 의미 없는 혼잣말을 뱉어냈다. 새벽까지 빗속에서 쓰레기를 퍼 나른 대가는 너무나도 정직했다. 간신히 팔을 뻗어 머리맡의 핸드폰을 낚아챘다.


‘형 돈 언제 줘?’


진호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보증금 이야기였다. ‘돈’. 그 짧은 단어가 열기로 부풀어 오른 머릿속을 더욱 거세게 조여왔다. 나는 갈라진 신음을 내뱉으며 자판을 눌렀다.


‘주말에 나 이사할 때 보증금 돌려받으면 그때 바로 보내줄게. 말한다는 걸 깜빡했다. 미안.’


‘뭐야, 바로 주는 거 아니었음?’


‘보증금에서 주는 건데 집을 먼저 빼야 받지.’


‘아놔 바로 주는 줄 알았는데. 나 비행기 예약해야 되는데 어제 계약금 낸 거 때문에 지금 못 하고 있단 말야. 주말에 언제 주는 거야?’


‘토요일에. 근데 웬 비행기?’


‘담달에 여친이랑 일본 가기로 했음. 그래서 빨리 예약해야 댐’


‘알았어. 받으면 바로 보내 줄게.’


‘ㅇㅋ’


대화는 건조하게 끊겼다. 핸드폰의 시계를 보았다. 오후 3시였다. 화면을 닫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짐을 싸야 했다. 아니, 다시 쓰레기와의 사투를 시작해야 했다. 일주일 내내 치워냈는데도 집안은 여전히 아버지가 쌓아둔 과거로 가득했다. 치울수록 오히려 증식하는 것 같았다. 엄마가 시집올 때 가져온 이 빠진 식기부터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린 시절의 낡은 옷가지들까지, 공간이란 공간마다 쓰레기란 이름의 유물이 숨 막히게 틀어박혀 있었다.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수십 번도 넘게 5층과 1층을 오르내렸다. 비인지 땀인지 모를 액체로 티셔츠가 흥건하게 젖어 등짝에 들러붙었다. 거실 바닥은 짐과 쓰레기가 뒤죽박죽으로 섞여서 난장판이었다. 지루하고 끝없는 반복이 몇 시간이고 이어졌다.


저녁. 뻐꾸기시계가 9번 울렸을 때, 나는 그제야 겨우 소파에 쓰러지듯 기대어 앉았다. 허리가 끊어질 듯 욱신거렸다. 집을 보러 밖으로 나갈 기력 같은 건 없었다. 핸드폰을 꺼내 맨 처음 갔던 부동산 아줌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혹시 500에 원룸이라도 괜찮은 방이 있다면 소개 좀 부탁드립니다.’

잠시 후 답장이 왔다.


‘지금 저녁 예배 중이라서 예배 끝나고 연락드릴게요.’


하지만 연락은 없었다.




화요일.


몸살은 여전했다. 관절마다 무거운 통증이 나를 짓눌렀다. 치우면 치울수록 더 어지러워지는 집안 꼴에 현기증이 났다. 정리는 질서를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 못 본 체하고 있던 혼돈을 끄집어내는 일이었다.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얼추 동생 방의 정리를 끝냈다. 주인이 빠져나간 방에는 변색된 벽지의 자국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쉬는 동안 핸드폰 앱으로 방을 뒤졌다. 투룸이라는 미련을 버리고 원룸으로 눈을 낮추자, 그제야 겨우 내가 들어갈 수 있을법한 구멍들이 보였다. 그중 몇 군데를 스크랩해 뒀다.


핸드폰 화면을 끄려다 우연히 통화 목록에 찍힌 유학원의 이름을 발견했다. 한참 동안 그 이름을 응시했다. 슬픔이나 미련 같은 것이 밀려올 줄 알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지독한 두통뿐이었다. 핸드폰을 던져두고 선풍기를 틀었다. 후텁지근한 공기를 가르며 툴툴거리는 선풍기 날갯소리가 공허한 거실을 채웠다. 눈을 감고 일정한 리듬에 귀를 기울였다. 기계적인 소음 속에서 두통이 아주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수요일.


열이 내렸다. 오전 일찍부터 고가구상에 연락을 했다. 가구상 주인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방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가구들을 훑어보았다.


“지지대가 다 내려앉았네. 이런 건 뭐 고쳐서 팔 수도 없어요.”


아버지가 호언장담하던 소파의 옆을 발로 툭툭 차며 업자가 말했다.


“그리고 다른 것도 다 나무가 삭아서 쓸모가 없어요. 이러면 출장비가 더 나올 판이여.”


결국 남자는 안방에 있던 장롱 하나만을 싣고 떠났다. 남겨진 가구들에 폐기물 스티커를 붙였다. 가구를 끌고 내려가는 다섯 층의 계단은 지옥의 통로였다. 옮기는 내내 쿵쿵거리는 둔탁한 마찰음이 아파트 층계를 때려댔다. 3층에서 아저씨가 나와 집에 수험생이 있으니 조심 좀 해달라고 주의를 주어 사과했다. 책꽂이를 옮기다 발등을 찧었다. 침대 프레임을 계단 아래로 밀어내다가 난간에 팔을 긁혔다. 따끔거리는 상처 틈새로 피가 흘러내리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간신히 모든 가구를 1층으로 내보내고 나자, 손가락 끝이 덜덜 떨렸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거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한쪽 양말이 붉게 물들여 있는 게 보였다. 양말을 벗어보니 패인 상처 주위에 검붉은 피멍이 들어있었다. 그대로 방바닥에 대(大)자로 뻗었다. 거대한 오물들이 빠져나간 공간을 낯선 정적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목요일.


스크랩해 둔 방들을 보러 돌아다녔다. 고작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 쓸만한 구멍들은 이미 타인의 차지가 되어 있었다. 세상은 나의 사정 따위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열심히 발품한 끝에 방 두 곳을 찾았다. 낡은 주상복합 건물 2층의 원룸과, 주택 1층을 개조해서 만든 원룸이었다. 주상복합의 집주인 쪽이 더 친절해서 그쪽으로 이사를 하려고 했으나, 집주인 노인이 토요일 입주는 곤란하다고 난색을 표해 불발되었다. 주택 1층의 다른 방은 토요일 이사가 가능하다고 했다. 결국 주택 1층의 방으로 계약하기로 했다. 서둘러 계약금을 입금했다. 이번에도 방을 놓칠 수는 없었다. 짧은 일주일 뿐이지만 그동안 내가 배운 건 가난한 자의 선택권은 시간 앞에서 무력하다는 사실이었다.


저녁에는 아버지 방의 정리를 했다. 방 정리는 금요일 새벽이 되어서야 마침표를 찍었다.




금요일.


늦잠을 잤다. 오후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 마지막 전장인 거실, 부엌과 사투를 벌였다. 내 방은 이미 저번 주에 정리를 해 두었기 때문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부엌의 쓰레기들을 먼저 정리했다. 냉장고 문을 열자, 빼곡하게 들어찬 정체불명의 음식물들이 나를 맞이했다. 냉동실에서 녹아내린 고기 핏물은 액체가 되어 흘러내렸다. 썩은 내에 연거푸 헛구역질을 했다. 문득, 무너져가는 빌라 앞에 쌓여있던 쓰레기 더미가 떠올랐다.


거실의 잔해들을 대형 폐기물 봉투에 담아 내놓았다. 등받이가 없는 높은 바 의자에 대형 롤스크린, 찢어진 낡은 족자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들이 어떤 사연이 있어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이제 더는 궁금하지 않았다. 의자를 들고 1층으로 내려갔을 때 분리수거함을 정리하고 있던 경비 아저씨가 어디서 난 거냐며 출처를 물었다. 나는 ‘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짧게 대답했다. ‘웬 가정집에 이런 게 다 있냐’라며 아저씨가 말을 덧붙였지만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5층으로 돌아왔다.


저녁 무렵 용달차를 예약하고 집주인과 정산 약속을 잡았다. 내일 아침 이삿짐을 가지고 출발하기 전에 부동산에서 만나 돈을 정산하기로 했다. 텅 빈 집안을 둘러보았다. 허망한 거실 너머로 푸른 달만이 밤의 한가운데에 싸늘하게 걸려있었다.




토요일.


맞춰놓은 알람 소리에 바로 눈을 떴지만, 몸은 반응하지 않았다. 근육 마디마디가 쥐어짜는 듯한 통증으로 비명을 질렀다. 관자놀이는 누군가 송곳으로 찌르고 있는 듯했다. 팔다리는 무언가에 짓눌린 듯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앓는 소리를 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이를 악물고 벽을 짚으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거실로 나오자, 창밖이 유난히 어두웠다. 온 하늘에 잿빛 구름이 낮게 깔려있었다.


가벼운 짐부터 1층으로 옮겼다. 싸놓은 짐보다 버린 쓰레기가 더 많아 가져갈 짐은 의외로 단출했다. 아버지가 부탁한 옷가지들도 잊지 않고 챙겼다. 그대로 다 버려버리고 싶었지만, 끝내 그만큼 매정하지는 못했다. 어쩌면 그게 나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짐을 모두 내려놓은 뒤 곧바로 관리사무소로 향했다. 전기와 가스 요금을 냈다. 수도 요금은 관리소 직원의 검침을 받은 다음 정산했다. 잊지 않고 영수증을 챙겼다. 지금은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겠지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때에는 나를 지켜줄 유일한 부적이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현관에 트럭 한 대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기사에게 짧은 사과를 건넸다. 짐칸에 서둘러 박스를 실은 다음 부동산으로 향했다.


도착한 부동산 사무실에는 먼저 도착한 젊은 집주인 여자와 그녀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자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부동산 아줌마가 앉아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줌마는 오늘은 껌을 씹고 있지 않았다. 약속했던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음에도 나는 사과하며 머쓱하게 목례를 했다.


“아이고~ 일찍부터 오느라 고생이 많으셨어요~ 호호호.”


부동산 아줌마가 과장된 말투로 나를 반겼다. 저번에 앉았던 소파 끝자리가 비어 있길래 그 자리로 가서 앉았다.


“아무튼 여기 민호 씨가 갑작스럽게 이사를 가신다고 하셔서~ 그래서 저희가 이 자리에 이렇게 모이게 됐네요, 그래~”


내보내는 쪽은 분명 그들이었으나, 아줌마는 마치 내가 먼저 나가겠다고 한 것처럼 표현했다.


“안 그래도 민정 씨는 결혼 준비하시느라 정신도 없으실 텐데 이렇게 시간까지 다 내주시고~ 참 친절하셔요.”


아줌마는 젊은 여자를 ‘민정 씨’라고 부르며 비위를 맞췄다. 전화기 너머로 들었던 목소리만큼이나 젊은 여자였다. 민정이라는 여자는 아까부터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민호 씨 아버지께서 안 좋은 일을 당하셔서 민호 씨도 지금 정신없으실 거구~ 이사도 빨리하셔야 할 테니까~ 저희도 빨리빨리 정산하면 될 거 같아요. 민정 씨도 많이 바쁘실 테구요~ 그쵸?”


아줌마는 여자 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말을 이어갔다. 여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손목시계를 계속 흘끗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젊은 사람이 고생이 많네요… 우리 딸하고 나이도 얼마 차이 안 나 보이는데 벌써부터 그런 일을 다 겪고… 여기 사장님한테도 아까 얘기 많이 들었어요. 동생분도 계시다구요?”


여자의 옆에 앉아 있던 -엄마로 보이는- 아줌마가 말을 꺼냈다.


“동생은 저번 주에 나갔습니다.”


나는 손목시계를 보며 건조하게 대답했다. 아파트에서 기다리고 있는 트럭 기사 때문에 되도록 빠르게 정산이 끝나기만을 바랐다.


“어휴, 어쩌면 좋아… 그럼 따로 사는 거예요? 어려울 때일수록 가족이 함께 뭉쳐야지 어떡해… 그래야 힘든 일도 이겨낼 수 있고 그런 건데…”


“엄마! 그만해. 그거 오지랖이야.”


민정이라는 여자가 말을 잘랐다.


“아줌마, 아무튼 어떻게 하면 돼요? 저 진짜 시간 없어요. 빨리 가 봐야 돼요. 이따 드레스 보러 가기로 약속 잡아놨다고요.”


여자의 차가운 태도에 나는 고마움을 느꼈다.


“아~ 네네. 해야죠. 호호호. 어디 보자~ 원금 1,500에 월세 밀린 것까지 하면…”


부동산 아줌마는 슬쩍 집주인 여자의 눈치를 보더니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타닥거리는 타건음을 사이에 두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잔 세 개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나는 소리가 멎을 때까지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잔의 둥그런 모서리를 응시했다.


“3개월 치 240만 원 빼고~ 민호 씨가 돌려받아야 하는 장기수선충당금 6만 4천3백2십 원을 더하면…”


“잠시만요, 아줌마. 장기수선 뭐요? 그게 뭐예요?”


집주인 여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 장기수선충당금이요? 이게 그 아파트 관리비 예산인데~ 원래는 임대인이 내야 하는 건데 매번 내고 그러는 게 번거롭다 보니까 보통은 임차인이 대신 내거든요~ 그래서 나갈 때 한 번에 정산해서 돌려받는 식으로 하고 그러는 돈이에요~”


“그럼 제가 이분한테 드려야 된다는 거예요?”


여자가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네~ 원래 주인이 내야 하는 걸 대신 내고 계셨던 거니까요~”


“아, 네, 알았어요. 저도 처음 들어보는 거라서… 그래서 얼마죠?”


아줌마는 계산기를 들어 집주인 여자에게 보여주었다. 여자는 액수를 확인하고는 계산된 금액을 내 계좌로 송금했다.


“확인해 보세요.”


여자가 말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계좌 잔액을 확인했다. 숫자는 정확했다.


“네, 입금됐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된 거죠?”


이번에는 부동산 아줌마를 쳐다보며 여자가 물었다.


“네~ 이제 처리는 다 되셨어요. 아휴~ 그런데 민정 씨가 참 똑 부러지는 분이시네요. 보통은 이렇게 10원짜리까지는 잘 계산 안 하거든요~ 푼돈은 빼고 계산하는 게 보통이라… 10원까지 다 계산해서 입금하시는 분은 저도 처음 보네요~ 젊은 분이라 그러신가보다~”


부동산 아줌마가 너스레를 떨었지만, 이번에도 여자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줌마는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러고는 내 쪽을 돌아보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민호 씨. 전에 계약할 때~ 아버지께서 지금 하고 계신 사업이 너~무 힘들다고~ 수중에 돈도 없구 그렇다고 하셔서~ 그래서 제가 그때 복비를 안 받았었거든요~”


아줌마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부릅뜬 두 눈이 마치 두꺼비 같았다.


“그건 확실하게 주고 가셔야 돼요~ 아셨죠? 계약할 때 여기 분들도 같이 계셨으니까 잘 아실 거예요, 그죠?”

부동산 아줌마는 집주인 여자와 그녀의 엄마, 그리고 나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집주인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여자의 엄마는 그녀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속삭였고, 여자는 꼬고 있던 한 쪽 다리를 바꾸어 자세를 고쳐 앉았다.


“30만 원이에요.”


부동산 아줌마가 말했다. 나는 군말 없이 돈을 보냈다. 실제로 아버지가 돈을 줬는지 안 줬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어서 이 상황이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보냈습니다.”


“아휴~ 고마워요. 젊은 사람이 혼자서 큰 일 치르느라 고생이 많겠어요~ 제가 봤을 때 민호 씨는 심성이 착한 사람이니까 어디 가서든 열심히 살면 꼭 잘될 거예요. 성경 말씀에도 주님은 그 사람이 극복할 수 있는 만큼만 시련을 주신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민호 씨는 잘 해내실 수 있을 거예요, 힘내세요.”

아줌마는 성경 구절을 운운하며 나를 축복했다.


“그래요… 힘내요, 젊은이.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살아남을 수 있다잖아요. 기운 내요.”

집주인의 엄마가 거들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 용달차가 기다리고 있어서… 다 된 거면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서둘러 인사를 하고는 부동산을 빠져나왔다. 밖은 여전히 어두웠다. 실내보다 더 어두운 것 같았다. 구름도 아까보다 더 무겁게 내려앉은 것 같았다. 마치 커다란 납덩이처럼.


“저기요!”


골목으로 들어서려는 찰나, 집주인 여자가 나를 불러세웠다.


“집에 있는 쓰레기, 다 치운 거 맞죠?”


쓰레기…? 2주간의 시간이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네. 다 치웠어요.”


“확실해요?”


여자는 집요하게 되물었다.


“네…치웠어요.”


“확인해 봐야겠어요. 요새 집에다가 가구나 쓰레기 같은 걸 버리고 도망가는 사람들이 하도 많다고 해서요.”


나는 그 말에 여자를 데리고 함께 아파트로 돌아왔다. 입구에서 담배를 피고 있던 트럭 기사에게는 잠시만 더 기다려 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집에 도착하자 여자는 빠른 걸음으로 집 안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나는 현관문에 기대어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한 바퀴를 다 돌고 나자, 여자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이거는 왜 이래요?”


여자가 거실의 낡은 장판과 베란다의 깨진 타일을 가리키며 캐물었다. 나는 사실대로 이사 올 때부터 그랬다고 대답했다.


“진짜예요?”


“직접 보세요. 딱 봐도 엄청 오래되어 보이잖아요.”


“흠…”


여자는 내 대답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믿어드릴게요. 다른 데 보니까 다 깔끔하게 치우신 거 같기도 하고…”


‘그러시던가요’라는 말이 턱 밑까지 올라왔지만 그 대신 감사를 표했다. 먼저 가보겠다고 하자 여자는 그러라고 답했다. 자기는 보수해야 할 곳이 없는지 좀 더 보다 가겠다고 했다. 아파트 현관으로 돌아오니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기사에게 거듭 사과를 한 뒤 조수석에 올라탔다.


트럭은 10분 정도를 달려 어느 주택가 골목에 멈춰 섰다. 짐을 옮기는 건 계약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나는 혼자서 이삿짐을 옮겼다. 지붕 없는 트럭에 실린 종이 상자가 빗물에 젖어 잔뜩 흐물흐물해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박스를 들고 옮기느라 예상보다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기사는 다음 예약에 늦게 생겼다며 짐이라도 먼저 내려놓으라며 투덜거렸다. 하는 수 없어 트럭에 실린 짐을 바닥에 내려놓기 시작했다. 보고 있던 트럭 기사가 갑자기 안 되겠다며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렸다. 남자는 그대로 트럭 위로 올라가더니 내 쪽으로 이삿짐 상자들을 던지듯 건넸다. 몇 개는 가까스로 받았지만, 다른 몇 개는 받지 못했다. 그중 하나가 트럭 옆에 있던 전신주에 부딪쳐 '퍽' 하는 소리를 냈다. 옆구리가 터진 박스 틈새로 흠뻑 젖은 책들이 토하듯 쏟아져 나왔다. 들고 있던 짐을 내려두고 터진 박스 쪽으로 걸어갔다. 빗물이 흐르는 아스팔트 바닥 위에 전공책들이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잉크가 번진 페이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책장을 덮어 다른 책들 위에 쌓아 놓았다. 트럭은 이미 골목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새 집주인과의 계약은 금방이었다. 개인적인 질문도, 쓸데없는 위로도 없었다. 나는 그 건조함에 만족했다. 계약서 내용을 작성하고, 다른 내용이 없는지 확인하고, 입금을 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마지막으로 확정일자를 받으러 주민센터로 향했다. 가는 길에 은행 ATM에 들러 진호에게 보증금을 보냈다. 1분도 지나지 않아서 동생에게 확인했다는 메시지가 왔다.


“이사하는 날 비가 오면 부자 된대요. 꼭 부자 되세요.”


주민센터 직원이 말했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주민센터를 나왔다. 임대차 계약서를 쥔 오른손이 살짝 떨렸다. 하늘에는 여전히 낮게 깔린 먹구름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빗방울은 그칠 줄을 몰랐다. 내뱉은 하얀 입김이 젖은 아스팔트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 뿌옇게 흩어졌다.


어쨌든, 나의 짧고도 지독했던 이사는 이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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