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림애심 - 4

正臨愛心 - 4

by 요즘씨

#4




[잘 지냈어요? 내일 12시
삼성역 6번 출구 잊지 않았죠?
행복한 토요일 되세요!]



사람은 참 간사하다.

방금까지 이 놀이터는 슬픈 곳이었다.

내가 슬펐기에 그러하다.

하지만 이 짧은 문자 내용에

지금 내 마음은 벅참으로 가득했다.

가슴이 뛰고 막연함이 뚜렷함으로 변해갔다.



[네, 잊지 않았어요.
영화는 제가 먼저 예매해 둘게요.
듣기로 정말 재밌는 영화라고 해요.]


내가 선택한 영화는 며칠 전 개봉한

‘엽기적인 그녀’였다.

당대 라이징 스타로 주목받던 차태현과

신인이지만 매스컴에서 많은 관심을 받는

전지현 주연의 영화이다.



개인적으로 쥬라기 공원 3를 보고 싶었지만,

로맨틱 코메디 영화를 선택했다.

무언가 우리 관계에 도움이 되길 희망해서다.



손에 꽉 쥔 핸드폰에 진동이 느껴졌다.




[저도 그 영화 소식은 들었어요.
보고 싶었던 건데, 기대되네요!
오늘 하늘이 정말 맑네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




문자를 계속 이어가고 싶었지만,

문자를 계속 멈추려 하는 마지막 문구에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답장을 했다.




[네, 저도 밖인데 하늘이 참 맑아요.
내일 늦지 않을 게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그리고 답장은 오지 않았다.

하지만 기분은 좋았다.

아니 다시 좋아졌다.

그녀가 먼저 연락을 준 것도,

혹시 약속을 잊지 않았을까 하는 우려도,

다른 일이 생겨 만남이 미뤄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모두 의미 없는 순간이었다.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무리지어 놀고 있었고,

나는 흐뭇한 모습으로 구경을 했다.



+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부모님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분명 나는 가위눌림에 대해 상황을 전했다.

차라리 그런 말을 하지 말 것을.



‘귀신 들렸다고 생각하시겠지.’




나는 그런 자식이 되고 싶지 않았다.

특별히 잘난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모난 부분도 없는, 그래서 아무런 걱정이

필요 없는 그런 아들이고 싶었다.



고민의 이유는 아마도 이런 나의

작은 목표에 지장이 생겼기 때문일 거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혹시 나를 불편하게 생각하진 않을까?

앞으로 나를 무서워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물꼬를 트니 끝이 없었고,

한숨만 계속 나왔다.


차라리 이럴 시간에 영화표나 미리 예매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불편한 자리에서 영화를 감상하는 것 보다

좋은 자리에서 영화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냥 그런 마음이 들었다.



+



지하철을 타고 삼성역에 도착했다.

주말 오전이라 해도 많은 인파들로 북적였다.

6번 출구를 빠져나와 코엑스 몰에 들어가 걸었다.



다양한 사람들.

손을 맞잡고 걷는 연인들.

운동복 차림의 중년 아저씨.

매장 오픈 준비를 하는 젊은 여성.

교복 차림의 여고생들.

양복 차림의 회사원들.

아이 손을 잡은 젊은 엄마.

메트로 신문을 읽는 노인들.



커다란 기둥을 끌어안고 있는 남성.



난 순간 걸음을 멈췄다.



이상했다.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

이상한 사람을 보았다.



개량 한복을 입은 남성이었다.

노란색과 검은색이 얼룩덜룩하다.

옷의 색상이 일반적이지 않기에

사람들의 시선이 몰릴 법도 한데,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고 지나친다.



팔과 다리를 벌린 채 기둥을 끌어안는

모습으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어 있었고

키는 2미터를 족히 넘을 것 같다.



펑퍼짐한 옷차림새에 다부진 체격이

느껴졌다.



화려한 코엑스의 모습과는 다르게,

지나치게 대조적인 남성의 모습을

신경 쓰는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이었다.



나는 그 기둥과 거리를 벌린 채

계속 남성을 주시하며 통로 가에 위치한

상가쪽에 가깝게 그를 지나치려 했다.



느낌만으로 알 것 같았다.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눈을 뗄 수 없었다.

갑자기 나를 향해 달려들지 모른다.


집에서의 이상행동은 가족이기에

견딜 수 있는 수준이라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밀집된 공간에서의

어제와 같은 행동을 하게 된다면,

내 정신은 그러한 순간을 감당할 수 없다.


내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차라리 더 빠르게 그를 지나칠까 생각했지만,

그 남성의 거대한 존재감이 나를 진정시켰다.

마치 야생 곰을 만날 때 이러하지 않을까.


나는 최대한 신중한 걸음으로

이 공간 최대한 그와 멀리 떨어져

조금도 시선을 떼지 않고 나아갔다.


하지만,


이곳은 나 혼자만의 공간이 아니다.

이런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그 중 한 사람.

갓난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끌고 가는

한 여성이 그 기둥으로 향하고 있었다.


- 약 15미터.


제발 뒤돌아 가기를.


- 약 12미터.


제발 옆에 상가에 들어가기를.



약 10미터가 되자,

그 거대한 남성의 상체가 들썩인다.


마치 짐승의 들숨 날숨을 보듯,

성난 황소가 빨간 망토에 달려들기 직전의

거친 호흡이 느껴졌다.



유모차 안의 아이.

깊게 잠들어 있었다.

아이의 엄마는 그런 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유모차를 끈다.



나는 좀 전의 조심성과는 다르게

일부러 발소리를 더 키우며,

뛰듯이 걸어갔다.



심장은 터질 듯이 요동쳤고,

내 시선은 그 여성이 아닌

거친 호흡의 남성에 고정되어 있었다.

혹시 아이가 깰까 조심하며 유모차를 끄는

여성의 걸음은 다행히도 느렸다.


다가가는 그 순간에도

이게 맞는지 머릿속에서 수십 번 선택이 오갔다.


어쩌면 이미 선택은 기둥으로 첫발을 뗀 순간

결정되었는지 모른다.


결국, 나는 그 기둥으로 뛰어들며 외쳤다.



“아주머니!”



약간 놀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 엄마의

시선이 불안해 보였다.

뒤에 느껴지는 엄청난 존재감.

절로 어깨가 움츠러 들었다.

터질듯한 감정을 최대한 갈무리 한 채 물었다.



“여기 메가박스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해요?”



여성은 이내 불안감을 지우고 등을 돌려

어딘가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을 했다.



“저쪽, 방향으로 쭉 가시다가 왼쪽에 있어요”



사실 나는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내 등 뒤 고작 2미터 남짓한 거리에

그 거대한 남성이 몸을 들썩이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숨을 내쉬고,

숨을 내뱉고,
숨을 내쉬고,
숨을 내뱉고,



그 소리는 마치,

거대한 파도를 연상하게 하듯,

형용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불안한 나의 표정과 잔뜩 상기된 내 모습.

나는 최대한 감정을 숨긴 채 말을 했다.



“제가 정말 심각한 길치라, 조금만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아, 멀지 않은 곳이니 그렇게 해요.”



- 쿠엉!



그때였다.

거대한 포효 소리.

이것은 짐승의 소리일까.

아니면 도깨비의 울음일까.

생전 처음 들어보는 귀청을 때리는

폭발적인 소리에 나는 어깨를 들썩이고 말았다.


앞의 여성은 괜찮냐고 물어보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왜일까?

나는 결국 뒤돌아 그것을 보고 말았다.


그 커다란 기둥을 양손과 양발을 이용해

성큼성큼 기어 올라가는 거대한 남성.

이치에 맞지 않은 움직임.

느리지 않지만, 빠르지도 않게,

또 한편으로는 우아하지만

패도 적인 모습의 우악스러움이.

그렇게 그 거대한 존재감은

기둥 끝의 천장을 뚫고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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