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림애심 - 5

正臨愛心 - 5

by 요즘씨

# 5



영화표 예매를 마친 나는 알 수 있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매점 안에 일하시는 분들 주위로

새하얀 탈을 쓰고 있는 인영이 보였다.

사람 머리 하나는 더 있는 듯한 신장.

현실에서 보기 힘든 넝마 같은 옷.

동화 속에 등장하는 나무꾼의 옷 그것이다.



앙상한 팔은 마치 나뭇가지와 같았고,

사람들이 오갈 때마다 감시하듯 하얀 탈이

상하좌우로 움직인다.



눈이 없지만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입은 없지만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는 거 같다.



생각보다 놀랍진 않았다.

좀 전에 보았던 그 거대한 남성.

산발한 머리에 패도 적인 형체를 보인

그것에 비하면 놀랍기는 해도 기괴하진 않다.

이런 것이 기가 쎄졌다고 하는 거라면,

내가 그런 상태가 아닐까.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는 길에는

50년 전에 사용되었을 것 같은,

군복을 입은 소년을 보았다.

그것은 쉬지도 않고 내가 탄 칸을 돌며,

고개를 숙여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들의

치마 속을 올려보고 있었다.



눈동자가 없었다.

비정상적으로 두툼한 입술.

그리고 입술은 세로로 부르터 찢어져 있다.

어린 소년의 모습이었지만 얼굴에 주름이 상당하다.



나와 눈을 마주치자 얼굴의 모든 주름이

잡히며 무섭게 나를 노려보고 열차 밖으로

사라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오전에 잠시 시간을 보낸 놀이터에 들렀다.

벤치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보았다.

아직 해가 지려면 수 시간은 남았을 거다.

평범한 토요일. 평화로운 모습.


뛰어노는 아이들.


오전에 봤던 그 아이들이다.

아직 놀이터에 남아 놀고 있는 아이들.



왜 아까 눈치채지 못했을까.


한 아이는 발이 없었다.

발목으로 열심히 뛰어놀고 있었다.

한 아이는 미끄럼틀만 타고 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반복해서 미끄럼틀만 타고 있다.

마지막 한 아이는 두꺼비 집을 만들고 있다.

손으로 파 놓은 모래를 입에 가져 댄다.

우걱우걱 모래를 씹어 삼키며 모래를 판다.


다가가 볼까?

아직 용기가 없다.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시작되었다.

내가 이상해졌다.

아니, 내 주변이 이상해졌다.



+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급격한 피로감이 느껴졌다.

그녀에게 연락해볼까?

무슨 말을 하지?



[영화 예매했어요. 정말 좋은 자리
맡았어요. 벌써 기대되네요.]


이런 말은 어떨까?



[제 이야기 좀 들어주세요.
제가 귀신이 보여요.
가위도 매일 눌리고,
어떤 귀신은 뽀뽀뽀 노래를 해요.]


그냥 연락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해 보니 오늘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아니 사실 식욕이 없다.

어제 부모님 앞에서 보인 걸신들린 듯한 행동.

당신들의 충격만큼이나 내가 겪은 충격도 크다.

트라우마에 걸린 사람처럼

입에 무언가 가져다 댈 마음이 사라졌다.


눈꺼풀이 무겁다.

밤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이다.

이대로 기절해 내일 그녀를 만나는 시간까지

잠들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도 쉽게 하지 못한다.

잠들면 또다시 가위눌리고 또다시

그 형체를 볼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다.


음악을 들을 수도 없다.

어제처럼 정신을 잃어버릴까 무섭다.

항거할 수 없는 사로잡힘.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기억을 잃었으면 좋았을 것을.

나는 돌변하는 내 모습 그대로를 기억한다.


하지만 수면의 의지는 나의 정신력을 앞선다.

나는 결국 그렇게 잠들고 말았다.



+




누군가 있다.

어둠 속에서 정신을 차린 나는 알 수 있었다.

분명 누군가 있다.

내 몸은 속박되어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속박이 평범한 가위눌림이 아니라는 것.

누군가가 내 발목을 쥐고 있다.

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하지만 신체 모든 것들이 기능하지 않은 상태.

생각해 보라. 유일하게 움직이는 것은 눈꺼풀뿐.

나는 자연스럽게 눈을 뜨게 되었다.


방안에 불이 켜져 있었다.

방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다행히 문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빠르게 확인을 마친 나는 내 발목을 보았다.

검푸른 손이 내 발목을 감싸고 있었다.

손가락이 끔찍하게 길다.

그리고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다 갈라진 손톱에는 군데군데 말라붙은

핏자국이 떼처럼 끼어 있었다.


눈물이 흘렀다. 공포감이 극에 달해,

눈물이 하염없이 흐른다.

그 형체는 보이지 않았고,

뽀뽀뽀 노래는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그 어느 때 보다 큰 공포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내 발목을 움켜쥐고 있는 손의 위치가,

나와 반대로 누워 엎드린 채 쥐고 있는

그 위치였기 때문이다.


내 몸 위에 엎어져 반대로 누워

내 발목을 쥐는, 그 끔찍한 상황.


덮고 있는 이불이 살짝 들쳐진다.

그리고 이불 속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오는 것은,

푸르다 못해 보랏빛이 도는 양발이었다.


그 발이 점점 내 얼굴로 다가왔다.

영상에 슬로우모션이 걸린 것처럼 천천히.

뱀이 내 몸을 휘어 감는 것 같은 움직임으로,

그리고 그 발은 이내 내 양 귀의 위치에서


멈추었다.


내 귀에 대고 소곤소곤

노래를 부른다.


여전히 쇳소리로, 기분 나쁜 불쾌한 음정으로,


- 아빠가 출근할 때 뽀뽀뽀

- 엄마가 안아줘도 뽀뽀뽀
- 만나면 반갑다고 뽀뽀뽀
- 헤어질 때 또 만나요 뽀뽀뽀



그때,


내 발목을 쥔 손에 힘이 느껴졌다.

그리고 내 얼굴 양쪽의 발이 베개를 누른다.

이불이 사람 모양처럼 부풀어 오른다.

내 동공이 자석에 이끌리듯 힘겹게 눈을

내리깔며 이불 속을 보게 되었다.


이불 속에 엎드린 채로 고개를 가슴까지 숙인 채

나를 바라보며, 찢어지듯 웃고 있는

그 형체의 얼굴이 보였다.



그렇게 나는 정신을 잃었다.



+



아침 새소리에 눈을 뜬 거 같다.

눈을 뜨자마자 밤 중 일어난 일들이

꿈처럼 그려졌다.


말라붙은 눈물들이 소금가루 처럼

눈가에 즐비하다.


힘겹게 몸을 일으켜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은 이전과 달라져 있었다.

생기를 잃은 내 얼굴. 퍼석이는 피부.

그리고 힘없이 풀려 있는 눈동자.


아차 싶은 마음에 발목을 살펴보았다.

큰 이상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이상이 있었다.

발목을 손으로 꽉 쥐고 손을 떼니

내 손과 다른 모양으로 발목을 쥔

모습이 보였다.

피가 돌며 다시 본래의 피부톤으로

돌아와야 하건만,

발목을 쥔 모양 그대로 새하얗게

자국이 남아 있었다.


집이 조용했다.

거실로 나가 귀 기울여 보니,

부모님이 보이지 않는다.

아침 일찍 어디를 가셨는지,

괜한 생각까지 들었다.


‘나를 피하는 건 아니겠지?’


시간을 보니 9시 30분을 지나고 있었다.

2시간 30분 뒤에는 그녀를 만난다.

준비하고 나서면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녀와의 약속을 떠오르니 어제의 일들은

크게 개의치 않게 되었다.

부모님의 부재도 별 생각이 들지 않는다.



+


정확히 11시 30분 코엑스 6번 출구로 나섰다.

주말의 코엑스는 사람들로 붐볐다.

이 사람들 속에서 기다리는 나를 찾을 수 있을까?

괜한 생각을 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약속한

게이트 쪽으로 걸었다.

그리고 이런 나의 잡념은 이내 쓸모없어졌다.


수백의 인파 속에서 오롯이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는

그녀가 보였기 때문이다.


오늘은 머리를 묶고 있지 않았다. 유난히 짙은 검은 머리.

광채가 느껴지는 피부와 대비되는 선홍빛 입술.

하얀색 셔츠와 스키니 진 청바지.



애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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