正臨愛心 - 6
#6
작은 실수를 했다.
어제 정신없이 예매한 탓에
상영시간 12시 30분을 골랐다.
정식으로 처음 만나는 상황에,
보자마자 영화관람부터 시작한다니,
섬세하지 못한 내가 한심했다.
“괜찮아요. 영화가 정말 재밌다던데,
오히려 영화 보고 나면 공감대 형성이
더 잘되지 않을까요?”
공감이란 단어가 이렇게 달콤한 거였을까.
눈치 없는 내 양쪽 귀가 달아올랐다.
“그래도 식사 먼저 하고 여유 있게
영화를 봐도 좋았을 것 같은데,
제가 너무 정신이 없었나 봐요.”
“근데, 혹시 은근히 소심한 성격?
정말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요.
근데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아, 네 물어보세요.”
“며칠 만에 안색이 많이 안 좋아진 것 같은데,
혹시 무슨 일 있어요?”
아침에 거울을 봤을 때부터 걱정했던 질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 질문에 대해 나름 고심하여
괜찮은 대답을 준비해 왔다.
“오늘 얼굴 뵌다는 생각에 며칠 전부터
잠을 설쳤어요. 저, 정말 많이 기다렸거든요.”
“어머, 원래 이런 캐릭터에요?
거침없이 막 들이대시네.”
다행히 그녀는 웃었다.
속이 뒤집히는 나의 멘트에
조금의 불편함도 없어 보인다.
최근 겪었던 믿지 못할 경험들.
나는 누구보다 진지해야 했고,
누구보다 불안해야 했지만,
지금 이 곳에 있는 그 어떤 사람들 보다
행복했다.
수많은 사람,
문득 어제의 그 거대한 남성이 떠올랐다.
그녀와 함께 걷고 있는 이 길은,
어제 그 남성이 기둥을 부여잡고 있던
그곳이다.
다행히 오늘은 그 불가사의한 존재가
없었다. 이곳은 내가 알고 있던
사람들이 유난히 많은, 코엑스 몰 그대로였다.
+
영화는 기대 이상이었다.
그녀는 여운이 남는다며 한참이나 영화 이야기를 했다.
“제가 진짜 감이 좋은 편인데,
여자 주인공 있잖아요. 그녀.”
“네, 전지현이라는 이름의 배우예요.”
“네, 그 전지현 그 사람은 정말 크게
유명해질 것 같아요.”
“저도 그 여자 주인공 때문에
더 몰입한 거 같아요. 엄청 뜨겠죠?”
“네, 확실해요. 그럼 마지막에 결국
견우랑 이루어진 거라고 봐도 되겠죠?”
“열린 결말 아닐까요?
그런데, 개인적으로 꼭 이루어졌으면 해요.”
“왜요?”
“글쎄요. 견우의 그 심정이 크게 공감 가서?”
“아, 진짜 뭐예요!”
“진짠데…”
“근데, 그 말 듣기 나쁘지 않네요.”
사실 나는 영화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영화를 마치고 끊임없이 영화 이야기를 하는
그녀였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는 장면은, 몇 없다.
나는 영화보다 그녀를 보는 것이 더 좋았다.
웃는 얼굴,
진지한 표정,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
선홍빛 입술을 앙 다문채,
코를 훌쩍이는 사랑스러움.
나는 단순히 첫 눈에 반한 그런 감정이 아니다.
전생이 있었다면, 그때도 나는 그녀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견우의 심정이 공감 갔다.
운명적인 만남. 그리고 그 만남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에피소드. 부디 바라 건데, 현실에서는
영화 속의 그녀가 애심이길, 견우가 나이길.
+
밥을 먹으면서도 우리는 영화 이야기를 했다.
오히려 식사 전 영화를 본 것이 신의 한 수였다.
서로의 공통 관심사가 많지 않은 탓에,
어색한 질의응답이 이어질 것을 우려했지만,
우리는 영화 이야기로 어색함을 지울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의 적지 않은 근심이 무색해졌다.
혹시라도 그녀와 함께 있을 때,
귀신을 보게 된다면,
그리고 이상행동을 하게 된다면,
부모님에게 그 모습을 보인 것 이상으로
큰 충격에 시달렸을 것이다.
“혹시 놀이기구 같은 거 안 무서워해요?”
“전혀요. 소풍 가면 바이킹만
연속으로 10번씩 탔어요.”
거짓말이다. 고소공포증에 아찔한 감각을
싫어하는 나는 놀이기구를 무서워한다.
“괜찮으면 우리 롯데월드 갈래요?”
“주말이라 사람 많을 텐데 괜찮아요?”
주말이라 사람이 많을 거고,
적지 않은 대기시간 동안 둘만의 시간이
주어진다는 사실에 설렌다.
“줄 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나 하면
더 좋을 거 같은데요?”
“제 말이 그 말이에요!”
“네?”
“아, 아닙니다. 롯데월드 지금 당장 가죠.”
사실 걱정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식사 후에는 무엇을 해야 하지?
미리 알아 둔 스타벅스라는 커피 전문점에서
여자들이 좋아한다는 바닐라 라테를 시켜야 하나.
아니면, 서점에 들러 책을 봐야 하나.
그 무엇도 그녀에게 특별한 기억을 심어줄 수 없는
그저 그런 데이트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런 고민을 그녀의 제안으로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었다.
나는 점점 더 그녀에게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가장 길게 기다린 놀이기구조차
30분 이상 줄을 서지 않았다.
나는 그 시간이 오히려 불만이었다.
조금 더 길었으면,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롤러코스터를 타도, 바이킹을 타도,
예전과 같이 겁에 질리지 않았다.
변해가는 그녀의 표정만 멍하니 보았다.
그녀에게만 집중하게 되니,
무서울 겨를이 없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바이킹.
그때 짓는 그녀의 꾹 참는 표정.
바람을 타고 유영하는 그녀의 검은 머리칼이 좋았다.
후룸라이드의 마지막 구간,
물이 튀는 그 순간 잔뜩 일그러진 얼굴.
그리고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웃는 그녀.
물에 젖어 얼굴에 붙은 머리칼을 떼어주며 말했다.
“좋아해요.”
.....
“저도요!”
당황스러웠다. 그 어떤 망설임도 없이
밝게 웃으며 대답하는 그녀의 모습에,
정말 많이 당황했다.
“애심씨. 좋아한다고요.”
“네. 나도 그쪽 좋아해요!”
나는 웃었다. 혹시라도 뻔한 클리셰로,
놀이기구를 좋아한다거나,
물 튀는 것을 좋아한다는 대답이 들려오면 어떨까.
짧은 순간 걱정했지만,
그녀는 정확히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돌발적인 나의 고백은 있었지만,
그 용기는 게 눈 감추듯 사라지고 없었다.
남은 것은 부끄러움과 설렘 그리고 터질 듯한
감정뿐이었다.
우리는 직원들의 안내에 따라 배에서 내렸다.
사람들은 달리듯 빠른 걸음으로 출구를 향해
빠져나갔다.
우리는 그보다 느린 걸음으로 서로를 보았다.
그녀는 내 오른편에 서서 자신의 왼손을 보여주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조금 차가운 손.
그렇지만 아이의 그것처럼 작고 보드랍다.
낯선 이의 손이었지만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마치 당연히 내 손에 쥐어져야 하는 소중한 보물처럼,
이 소중한 그녀의 손을 절대 놓지 않겠다는 각오로
꽉 쥔 채 출구를 나섰다.
그녀는 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뗐다.
“첫째. 절대 누나라는 호칭은 금지예요.”
“첫째. 절대 누나라는 호칭은 금지.”
“둘째. 말은 편할 때 내가 먼저 놓을게.”
“둘째. …?”
그녀는 벌써 말을 놓은 듯하다.
“셋째. 우리 빨리 사진 확인하자!”`
“네. 아니? 그래! 사진 확인하자!”
출구로 빠져나간 한 무리의 사람들은
제각각 운행 중 촬영된 사진을 확인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양팔을 벌린 채 소리를 지르는 모습으로,
또 어떤 커플은 그 순간 뽀뽀를 하는 모습으로,
누군가는 팔짱을 낀 채 무표정한 모습으로.
우리는 맞잡은 손을 놓지 않고,
모니터에서 우리의 사진을 확인했다.
“응? 뭐야! 내 얼굴 왜 저래?”
“어딘데?”
“저기 두 번째 줄 세 번째 화면 봐!
내 얼굴만 일그러진 거 같이 나왔잖아.”
화면을 확인한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모니터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형체를 제대로 확인할 수 없는,
얼굴만 블러처리가 된 것 같은,
마치, 밤마다 나를 괴롭히던 그 형체의 것과 같은,
기괴한 모습으로 출력되어 있었다.
“물방울이 튀었거나, 가끔 그런 경우가 있대.
기념으로 사진 인화해서 가지고 있으려고 했는데,
우리 처음으로 찍은 사진인데 망쳤네?”
나는 그녀를 보며 능청스러운 연기를 했다.
“어머! 그러고 보니까 우리 첫 사진이네?
이거 엄밀히 따져야 하는 문젠데?”
“집에 디지털카메라 있으니까, 다음에
그거로 예쁜 사진 많이 찍어줄게.
아쉽지만 그냥 가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상황을 모면하려 노력했다.
다행히 그녀는 크게 불편해 보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발목이 시큰하다.
나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뒤돌아 모니터에 출력된 우리의 모습을
다시 보았다.
민자로 보이는 얼굴.
그리고 그 얼굴을 감싸고 있는 두 손.
그 손은 어제 내 발목을 쥔 길고 앙상한 손,
마치 그것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