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림애심 - 9

正臨愛心 - 9

by 요즘씨

# 9



2001년 가을이다. 옷 장을 열어 하얀색 셔츠를 고른다.


곱게 개어 놓은 청치마를 집고 옷을 갈아입는다.




“어머니, 세탁소에서 찾아 둔 옷 어딨어요?”

“주방 식탁 위.”




짧게 답한 어머니는 TV에서 중개되는 뉴스에


정신이 팔린 듯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식탁 위에서 노란색 가디건을 찾아 걸쳤다.




“어머니 옷 확인해줘요.”




TV에서 시선을 뗀 어머니는 위아래로 나를 살피고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노란색? 한나 만나러 가려고?”

“응. 이야기만 하고 들어올 거야.”

“그래라.”

“다녀올게요.”



집 밖을 나서기 전 잠시 TV를 본다.


민간 항공기를 납치해 세계무역센터를 테러한 대규모 사건.


추정되는 사망자만 약 2,500명 이상이라 한다.


화면 안에서 피를 흘리며 오열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체를 찾지 못해 막연한 표정이다.




“애심아. 오늘 며칠이냐?”

“9월 29일 수요일이요.”

“너 오늘 인연길일(因緣吉日) 사주가 있다.
주변 살펴라.”

“어머? 남자면 좋겠네.”

“실없는 소리.”

“네, 네. 다녀오겠습니다.”




인연길일(因緣吉日)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되는 길한 날.


어머니는 그런 사람을 만나도 피하라고 해주신 말일 거다.


그렇게 나는 26년이라는 시간 동안,


사람들을 피해 살아왔다.


어머니의 걱정과 나의 안부를 위해.


그리고 혹시 모를 피해를 막기 위해.



나는 평범하지 않다.


지금 입고 있는 노란색 가디건은


중앙과 연결되는 황색의 기운을 지닌다.


조화와 균형을 상징하기 때문에


주로 누군가 만남을 가질 때 입곤 한다.



오늘 약속은 동대문에서 남성복매장을 운영하는


한나를 만나기 위해서다.


청치마를 입은 이유가 그러하다.


동쪽 방위와 연결되는 청색은 풍요와 번창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위 별 색상은


나를 최대한 보호해주기도 한다.


이것이 내가 살아 온 삶이다.




+




“애심아. 너도 버티는 데 한계가 있을 거 아냐?”




한나는 또 같은 이야기를 한다.




“안 버티면? 나 그냥 무당 되라고?”

“아니, 그래도 그렇게 답답하게 살 거면,
그냥 차라리 신내림 받고 가업을 이어서
편하게 사는 것도 방법이란 말이지.”

“네가 보기에 우리 어머니가 좋아 보이던?”

“나쁠 건 뭐니?”

“그 탈색 머리가 지겹긴 하지?”

“얘는 또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
동대문에서 남자들 상대하려면 노란색 머리가
유리해서 하는 거라니까?”

“괜히 신경 쓰여서 그러지.”




한나의 노란색 머리는 나를 위해서이다.


노란색 머리는 조화와 균형.


내 유일한 친구가 나로 인해 부정이 옮지 않게


어머니가 내린 특단의 조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나는 6년이 넘게


노란색 머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겉보기와 다르게 마음이 여리고 정이 많은 한나.


그런 내 하나뿐인 친구를 지키기 위해


어머니는 귀한 부적과 액막이굿으로 우리의


우정을 지켜주셨다.




“나는 무당이 될 생각은 조금도 없어.
내가 뭐 어머니처럼 할머니 신령을 모실 그릇도 아니고,
그냥 그런 환경에 살아서 영안이 열린 것뿐인데.”

“에휴. 그래 그래서 위대한 어머니를 두고도
잡귀들이 원한 풀어달라고 다 너한테 달려드는 거지.
여전히 여기에도 있지?”

“됐어. 괜한 이야기 하지 말고 저기 손님이나 봐.”

“아, 저 아이는 알아서 옷 고를 거라 괜찮아.
여기 단골이야 쟤.”

“근데 저 사람. 조금 특이한데?”

“왜? 쟤는 그냥 평범한 대학생인데?”

“아니, 달라.”

“뭐가 보이는데?”

“보여. 두 사람. 30대 남자 여자.
저 사람이 줄로 묶어 데리고 다니고 있어.”

“줄?”

“응. 줄. 보이지 않는 영적 끈이야.
저거 좋지 않은데? 줄이 굵고 강해
신령을 연결하는 줄이어서 굵고 강할수록
신줄로 거듭나거든.”

“신줄은 또 뭐니?”

“나랑 같은 팔자라고.”

“쟤가?”

“그만 이야기 하자. 저 사람 자꾸 우리 쳐다봐.”

“애심아. 정확히는 우리가 아닌 너를 쳐다보고 있어요.”

“아, 또 눈 마주쳤다.”

“쟤랑? 너한테 한눈에 반했나 본데?”

“아니 저 두 망령이랑.
너 쟤 좀 데리고 와야겠다.”

“나서게? 너 이런 거 싫어하잖아.”

“아니 나도 그러고 싶은데, 두 망령.
아무래도 저 남자 부모 같아서.”




끈으로 엮인 두 망령. 30대 중반의 여성과


30대 후반의 남성. 그들의 모습에 원한은 없어 보였다.


그저 남은 것은 슬픈 사연뿐.



한나는 결국 계산을 마친 남자를 구슬려


자리로 데려왔다.


나는 조심히 남자의 굵은 실 줄을 이어


영안을 열었다. 그들의 메시지를 듣기 위해서다.




[불쌍한 아이 정림이.]
[내 아들 정림이.]
[기다릴게.]
[용기 내야지.]
[내 아들 정림이.]
[기운 내아지.]
[인정해야지.]
[놓아줘야지.]
[기다릴게.]
[기다려야지.]
[내 아들 정림이.]
[소중한 아이.]




제대로 된 소통이 아니었기에


그들의 사념만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애달픈 소리에


괜한 동요가 일어났다.



마음이 무거웠다.


그들은 원한이 아닌, 슬픔에 귀속되어


묶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묶여 있다는 것은 곧,


정림이라는 저 남자가 두 분을 떠나보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내 옆의 한나는


나보다 더 들떠 열심히 내 신상을


남자에게 떠든다. 평소 같았으면


불편한 상황일 법도 한데,


왜인지 나 대신 나서주는 한나가


고맙게 느껴진다.



시선은 주로 내게. 대화는 한나와.


신경 쓰인다. 저 남자.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이내 남자는 한나가 아닌 나에게 시선을 두고


망설임 없이 말을 한다.




“괜찮다면 언제 같이 밥이나 먹어요.”




남자와의 데이트.


상상은 했었지만, 그 일이 성사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인연길일(因緣吉日)




“제가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 그럼, 영화도 같이 볼까요?”




소심하게, 그리고 수줍게 물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자고 말한 것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나는 정림의 부모를 달래주고 싶었다.


정림이 두 분을 놓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


두 분의 마음이 떠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있기에,


저 신 줄은 계속해서 굵기를 키워 갈 것이다.



그리고 달래주고 싶었다.


두 분뿐 아니라, 이상하게 신경 쓰이는 저 남자를.




+




“괜찮겠어?”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남자는 떠났다.


뒤돌아서는 남자의 뒤에 끈으로 묶인 두 망령의


슬픈 표정이 아른거린다.




“뭐가?”

“나야 너무 신나서 적극적으로 밀어줬지만,
너 이런 만남 처음 아니니?”

“맞아. 처음이야.”

“혹시. 너도 뭐 첫눈에 반했다거나,
너 스타일의 남자라거나. 아니, 그래
정림이 정도면 내가 봐도 듬직하고 남자답고,
또 쟤가 진국이야. 가벼운 성격은 절대 아니거든.”

“그래? 한나 네가 조금 앞서간 감은 있지만,
어머니가 그러더라. 오늘 귀인 만난다고.”

“귀인? 정림이가 그럼 귀인이야?”

“이대로 내가 집에 귀가하는 동안 또 다른
만남이 없다면 거의 확실하겠지?
나는 이제 곧 집에 들어갈 예정이고.”

“어머! 뭐야 너. 아니 근데, 너희 어머니가
귀인 만난다고 데이트해도 된대?”

“아니지. 피하라고 말씀해 주신 거겠지.”

“근데? 너 맘대로 그렇게 약속 잡아도 되는 거야?”

“우리 어머니가 모신 신령이 누구지?”

“할머니 신령?”

“응. 보호와 수호. 액운을 막아주는 존재. 그리고
한풀이의 사명을 지닌 신령님. 우리 어머니도,
절대 지나칠 수 없을 거야.”

“야, 뭐 그런 건 잘 모르겠고, 제발 잘 됐으면 한다.”




기대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솔직히 설레는 마음은 사실이다.


정림. 괜히 신경 쓰이는 남자다.


바보같이 노란색 가디건과 청바지를 고른 남자.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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