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수하 씨 되게 말 잘했다~!
네, 저도 알아요. 제가 기똥차게 맞는 말만 한 거. 이를테면 “너는 왜 이렇게 다른 사람들처럼 무던하지 못하고 예민하게 구냐.”라고 묻는 차장님에게 “여기 아저씨들만 잔뜩 모여있는 데에 젠더 감수성 평균이 낮은 건 이해하지만, 그걸 기준으로 너는 왜 다르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네요.”라고 대답한 일이라든지, 북창동 단골 다운 말을 줄곧 내뱉는 차장은 두고 “듣기 싫으면 강대리가 귀를 막아.”라고 하는 팀장에게 “저 사람의 입을 막아야지 왜 제 귀를 막아요?”라고 대답했던 일은 정말 곱씹을수록 주옥같죠. 내가 한 말이지만.
근데 이건 하루아침에 나오는 스킬이 아니에요. 누구나 그런 상황을 처음 만나면 어버버버 하다가 그 순간은 지나가 버리고 집에 돌아가서는 이불속에서 하이킥을 할 거예요. 한 일주일 정도는 불쑥불쑥 뜬금도 없이 치솟는 분노를 주체 못 하기도 하고요. 이런 수많은 부조리를 온몸으로 받아내다가, 어느 날 ‘이건 아닌 거 같은데?’ 싶다가, 또다시 수많은 부조리 속에서 혼자 이불킥을 하다가,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통한 학습을 한 자 만이 이런 스킬을 습득할 수 있답니다.
그리고 이 스킬을 위해서는 또 한 가지 꼭 필요한 덕목이 있는데 그건 바로 무례함이에요. 어쩌면 ‘무례할 수 있는 용기'가 더 맞는 말을 수도 있겠네요. 내가 하는 말이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고 갑자기 분위기 싸하게 만들 수도 있을 거란 걸 알지만 개의치 않고 할 말을 할 수 있는 그런 거 말이에요. 이것도 혹독한 연습이 없으면 쉽지 않죠. 하지만 한 번 생각해 봐요. 저 치는 제 기분을 상하게 하는데 저는 왜 돌려주면 안 되나요? 게다가 제 말은 전부 맞는 말뿐인걸요.
어쨌거나 이런 일들을 통해 제가 단련이 되었으니 어쩌면 잘 된 일일지도 모르겠네요. 저도 처음에는 아무 말도 못 했거든요. 아니, 진짜 처음에는 말을 못 한 게 아니라 문제가 문제인지도 몰랐어요. 그래서 할 말도 없었죠. 그냥 거기서 헤헤 웃으며 다 이해하는 게 쿨하고 좋은 건 줄 알았어요. 아저씨들이란, 남자들이란 원래 다 그런 거니까. 뭔가 쎄한 느낌이 들더라도 기분 탓이겠지 했다니까요. 그러다가 이 스킬의 초보단계 정도였을 때는 내가 미친 것 같기도 했어요. 나만 웃자고 한 소리에 죽자고 덤벼드는 꼴이라서요. 하지만 저는 결국 다 이겨냈죠. 어쩌면 그분들은 저를 성장시키려고 이런 시련을 준 걸지도 몰라요.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땐 제가 진짜 미쳐간다는 거겠죠?
근데 말이에요, 제가 이런 말들을 하는 것을 두고 잘했다고 해주는 사람은 선생님뿐이에요. 저와 같은 입장인 친구들도 “난 그렇게 까진 못하겠던데.”라고 담담하게 말할 뿐이죠. 저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은 제 말을 이해조차 못 한답니다. 한 번은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이런 소리 들으면서 회사 다닐 이유 없고 다니고 싶지도 않다.”라고 정중하게 말했는데 팀장이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와이프 말을 다 이해해서 들어주나? 그냥 그렇다니까 그런 거지. 강대리가 싫다니 우리가 참아줍시다.” 저의 허탈한 마음을 좀 아시겠나요? 나중에 팀장을 불러내 커피를 사 먹여가며 뭐가 이해가 안 됐는지 물었는데 ‘나는 이해했지만 다른 사람이 안됐을 거 같아서’라고 얼버무리더군요. 내가 용기 내서 한 말을 그렇게 바보 같은 것으로 만들어 놓고요. 다시 생각해도 화나네.
그리고요, 이런 스킬을 장착하고 날이 한껏 선 말을 난사하더라도 제게 남는 내상은 마찬가지예요. 아주아주 오래가는 내상이요.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나의 기분을 지켜내려 고군분투했는데도 말이에요. 물론 효용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죠. 머저리들을 놀라게 해서 기를 좀 죽이고, 이불킥을 열 번 정도 할 일이라면 여덟 번 정도로 줄여주니까요. 하지만 그걸로 충분하지 않아요. 왜 나는 여덟 번의 이불킥은 피할 수 없는 걸까요? 그것은 원래 내 몫으로 주어진 걸까요? 이 정도 노력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는 걸까요? 제가 스킬을 쓸 때도 쉬운 것만은 아니에요. 이건 일반 스킬이 아니고 필살기라 제 HP가 닳는다고요. 그 소모가 이불킥을 두 번 정도 세이브하는 것과 맞바꿀 가치가 있을까요? 혹시 아직 더 레벨업을 해야 이 모든 것에 괜찮은 제가 될 수 있는 걸까요?
<아주 독립적인 여자 강수하>
- 냉정한 분노로 나를 지키는 이야기
“강수하는 강한 사람도 아닌 주제에,
너무나 꿋꿋하다.
강수하가 너무 독립적이지 않아도 되도록,
함께 옆에 서서 가고 싶다.”
- 서늘한여름밤(《나에게 다정한 하루》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