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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수하 Sep 16. 2019

명절에 며느리가 스스로를 지키는 일

나의 결혼 후 두 번째 명절 이야기

 이번 명절은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양가 어른들을 방문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여행을 가지도 않았다. 그냥 남편과 집에서 놀거나 게임을 하거나 카페를 가거나 했다. 아주아주 오래전부터 남편이 이야기를 꺼내고 모두의 합의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시가가 멀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결혼 후 첫 번째 명절은 시가의 뜻에 따랐고 두 번째 명절인 이번은 우리 쪽 집안을 위한 스케줄을 돌아야 할 차례였지만 그건 내가 생략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했다. 우리만의 시간을 가지려 했다. 출근 사이의 꿀 같은 연휴를 즐기려 했다.


 그런데 시가에서 뒤늦게 난리가 났다. 그쪽에선 막연히 우리가 해외여행이라도 가려니 하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런데 그냥 집에 있으면서도 당신들을 찾아뵙지 않다니 깜짝 놀라고 화가 치미신 모양이었다. 자식들이 집에 있으면 놀고 있는 것이니 당신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에 대해서는 익히 잘 알고 있었다. 나의 조부모님이 그랬고 부모님이 그랬다. 그들을 설득하고 끊어내고 내 마음을 정리하는데에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맞닥뜨린 것이다. 연휴 전날에는 시아버님이 남편에게 전화해서 ‘엄마가 지금 너네 때문에 병이 났으니 너만이라도 내려오라.’고 하셨고, 그다음 날에는 모자가 전화로 대판 싸웠다. 추석 아침에는 다짜고짜 며느리를 바꾸라고 하셔서는 “아무리 문화가 달라도 문안인사차 전화를 해야지. 추석이잖냐. 안 그러냐. 대답해라.”라며 나를 다그쳤다.


 대충 ‘네’만 반복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그 댁 아드님은 문안 인사드렸나요? 이상하네요. 전 못 들었는데요. 그쪽 문화 속에서 배우고 자란 아드님도 부모는커녕 장인 장모님에게도 문안인사 한 번 드린 적 없는데요.’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의 경솔한 한마디 한마디가 돌아와 나와 내 남편의 관계를 영원히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서로 가슴 아프게 할 수도 있으니까, 이건 나의 문제가 아니라 남편과 남편 부모님의 문제니까 일단은 참았다. 한편으로는 어쩜 이렇게 시월드 클리셰를 그대로 따라가는지 맥이 빠졌다. 지금까지의 평온은 모두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늬들끼리 행복하게 잘 살아라.’고 하셨던 건 거짓말이 었을까. 남편도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결국 내려가지 않았고 나는 여전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 것이었다. 하지만 뭔가 지지도 않은 빚쟁이에게 쫓기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결혼했다는 것이 잘 알지도 못하는 어른들께 빚을 지게 되는 일인 것일까. 그래서 그분들께 보답과 대접으로 차근차근 채무를 갚아나가야 되는 것일까. 그럼 대체 누가 미쳤다고 결혼을 할까.


 재미있는 사실은 나와 같은 날 같은 시에 결혼한 남편에겐 빚쟁이가 들러붙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내가 지게 된 채무관계를 100% 이해하지는 못한다. 나는 빚을 진 적이 없는데도 자꾸 빚쟁이들이 내게 부담을 줘서 불편하다고 호소하는데 남편은 그저 ‘어쩌면 빚쟁이들과 잘 지내볼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만 한다. 그래,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건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평범한 인간관계가 아니라 불공정한 채무관계이기 때문이다. 나의 시부모님은 좋은 분들이시지만 말이다.


 나 없이도 육십 년 가까이 잘 살아왔던 사람들이 갑자기 명절에 내 얼굴을 보지 않으면 병이 날 정도로 나 없이는 불행해지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누군가를 병이 날 정도로 보고 싶다는 감정은 어떤 것일까. 찬찬히 생각해보면 그건 그냥 보고 싶은 것은 절대로 아니다. 나를 그렇게나 마음에 두고 계시다면 내가 명절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명절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 먼저 궁금해하시지 않았을까. 전화로 다짜고짜 요구사항을 말하고 대답을 강요할 게 아니라 먼저 밥은 먹었는지 궁금해하시지 않았을까. 당신의 아들에게 한 것처럼. 그래서 시어머니의 병은 나를 향한 상사병이라기보단 화병에 가깝다. 그분들이 나빠서라기 보다는 한국 사회에서 주어진 역할놀이를 하다가 너무 과몰입해버리신 탓이다.


 그리고 그분들이 보고 싶은 사람은 ‘인간 강수하’라기보단 ‘며느리 아무개’에 가깝다. 곱게 장가보낸 아들 옆에 응당 붙어있어야 하는 부속품에 가깝다. 내가 좋아서 나와 함께하고 싶다기보다 혹은 내가 진짜 필요하다기보다 그저 구색 맞추기에 내가 필요한 것이다. 나를 이토록 열렬히 원하시는데 그게 꼭 내가 아니어도 된다니, 나라도 나의 자아를 다시 꽉 붙잡아 본다. 나는 아무개가 아니라 강수하다. 타인의 행복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박 씨 집안 역할놀이의 마지막 퍼즐 조각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것은 그들이 말하는 가족의 정의와도 거리가 멀며, 자꾸 모두가 까먹는 것 같지만 나는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나의 가족이 따로 있다. 이쪽의 역할놀이를 고생해서 겨우 다 정리해 놨더니 다시 시작인 건가.


 명절마다 꼭 한 번씩은 이혼을 마음속에 떠올려 보게 된다. 내가 결혼만 안 했어도 이런 부당한 채무관계없이 자유롭게 살 텐데 하고 생각한다. 아마 그 방법만이 유일한 탈출구이자 근본적인 해결책일 것이다. 애초에 나는 남편과는 맞아도 결혼과는 맞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얼마 전에 들었던 이혼하고도 계속 같이 산다는 부부에 대해 떠올려 본다. 양가 부모님들로부터 자유롭고 싶어서 내린 결정이라고 했다. 그 과정을 어떻게 서로를 아프게 하지 않고 지나갔을까. 과연 부부가 관계를 이어가는데 결혼이 도움일까 장애물일까.


 그러니까 결혼이란 사랑의 서약 따위라기보다는 성인 남녀가 가부장제의 질서 안에 편입하고 복종하겠다는 일종의 선언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어르신들은 그렇게나 젊은이들을 결혼시키고 싶어 안달이 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선언을 해버린 셈이 되어버렸고 그것을 이행하지 않아서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않았으며 갚을 생각도 없다. 나는 아무런 선언도 하지 않았으며 내 자아를 내려놓고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데에 그 어떤 동의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세상의 보편이 그게 아닌데 시가에서 억울하지 않겠냐고? 그럼 그분들 능력껏 새 채무자 구하시면 된다. 그것까지 내가 어찌할 순 없으니까. 그저 나는 내게 무슨 일이 닥치든 스스로를 지키는 데에 최선을 다할 것이고 그 노력이 너무 소모적이라 더는 견딜 수 없어지는 순간에는 스스로를 구출할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법이니까.





<아주 독립적인 여자 강수하>

 - 냉정한 분노로 나를 지키는 이야기


“강수하는 강한 사람도 아닌 주제에, 

너무나 꿋꿋하다.

강수하가 너무 독립적이지 않아도 되도록, 

함께 옆에 서서 가고 싶다.”

- 서늘한여름밤(《나에게 다정한 하루》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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