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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림 Aug 13. 2023

기회는 불현듯 찾아오는 법

어설프더라도, 준비가 덜 되었더라도 일단 시작해 보자

산림교육전문가 과정을 수료하자마자 '그것'이 오고야 말았다. 전 지구인들의 삶을 통째로 바꿔버린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가진 그것, 'COVID-19'. 나와 동기들은 마스크 없이 공부하고, 숲을 다닌 마지막 기수가 되었다. 자격증만 땄지 경험이 없기에 수료 후 곧바로 현장에서 일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예기치 못한 팬데믹은 숲해설업에도 혼란과 변화를 가져왔다. 초기에는 코로나 바이러스 양성 진단을 받으면 내가 무얼 했고 어딜 갔는지 낱낱이 공개되었으므로 사람들은 밖으로 나오길 꺼려했다. '바이러스 확산', '긴급비상대책회의', '위기경보 격상' 등 공포스러운 말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올 때라 자연의 정취, 숲에서의 여유, 아이들을 위한 생태체험학습 등은 저 먼 곳으로 일찌감치 밀려나버렸다.


전문가 과정 수료와 바통 터치하듯 찾아온 이 기막힌 상황에 앞으로 무얼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때 마침 공부한 기관에서 심화과정을 연다는 소식을 들었다. 두 달 반의 숲 공부가 너무 짧게 느껴지기도 했고, 정든 동기들도 여럿 참여한다고 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합류했다. 그 후 매주 월요일마다 우리는 파주 고령산에 가서 다양한 식물을 관찰하고 동정*했다. 라틴어로 이루어진 복잡한 학명을 외웠고, 식물 분류법, 식물 생리학, 식물조사법을 배우고 익혔다. 수직 상승한 난이도를 느끼며 이런 게 진짜 '전문가 과정'이구나 싶었다. 임학과 출신 동기도 학부생 때 해보지 않은 것들이라니 꼭 대학원생이라도 된 느낌이었다.

*동정: 생물의 분류학상의 소속이나 명칭을 바르게 정하는 일.


심화과정을 공부한 지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한 연락을 받았다. 기관 산하 숲학교에서 선생님을 구하는데, 나를 추천해도 되겠느냐고. 그럼요 되고 말고요. 반가우면서도 고맙고 설레는 연락이었다. 수료 후에도 심화과정에 참여하며 계속 기관과 교류했더니 나를 떠올렸나 보다. 예상치 못한 기회로 드디어 숲해설가로서 첫 발자국을 떼게 되었다.






숲학교가 있는 곳은 과천의 관악산. 가는 데에만 1시간 반이 걸렸지만 조용하고 온화한 느낌의 동네가 퍽 마음에 들었다. 숲학교로 향하며 9월의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보니 앞으로 이곳에서 즐겁게 일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숲학교에서는 영어권의 원어민이 진행하는 숲체험 프로그램도 진행하며 다른 곳과 차별화하고 있었는데, 내가 할 일은 원어민 수업의 보조 강사였다. 원어민 강사와 수업을 기획하고, 아이들과 강사의 의사소통을 도우며 아이들이 안전하게 자연을 체험할 수 있도록 이끄는 역할. 초보 강사가 걸음마 떼기에 알맞은 일이었다.


그곳에서 처음 맡은 반은 8~12살 어린이 8명으로 이루어진 주 1회 반이었다. 매주 2시간씩 아이들을 만나고 원어민 강사와 소통하면서 점차 숲과 아이들, 수업 진행에 익숙해졌다. 그 후로 반을 하나 둘 늘려갔는데, 두 달쯤 되었을 때 숲학교 대표 선생님이 보조가 아닌 메인 강사로 직접 반을 이끌어 볼 것을 제안하셨다. 고작 두 달을 해보고 혼자서 아이들을 맡는다니, 책임감을 넘어 부담으로 다가왔다. 조금만 더 성장할 시간을 달라는 말로 정중히 거절했으나 숲학교의 인기는 날로 높아지며 대기자들이 늘어가고 있었으니. 대표 선생님의 계속된 제안을 매번 거절할 수도 없고, 아이들을 하염없이 기다리게 할 수만은 없어 단단히 마음을 먹고 한 번 해보기로 했다. '모든 것은 마음의 문제'라는 지론을 믿으며. 

며칠 뒤 나는 모자와 목도리로 칭칭 감싸 알록달록 눈사람 같은 여섯 명의 5살 아이들 앞에 섰다.


첫 수업 2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떠올려 보려 하면 그날의 장면들은 시간 순으로 차분히 정돈된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음악방송의 현란한 화면처럼 요란법석하게 돌아갈 뿐이다. 무척 긴장했고 서툰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노련한 부모님들은 단번에 눈치챘을 거다. 게다가 아직 부모와 떨어지는 게 익숙지 않은 아이 두 어명은 엄마아빠를 찾으며 계속 울어댔다. 생각해 보면 11월의 추운 겨울날, 엄마아빠도 없이 낯선 사람(나)과 함께 낯선 장소에 들어선 아이들도 얼마나 당황했을까 싶다. 호랑이 굴에 던져진 사람처럼 정신을 바짝 차리려 애쓰며 아이들을 이끌었다. 그 마음과 노력에 화답하듯 아이들은 초보 선생님에게 웃어주기도 하고, 손 들어 발표도 하고 질문도 하며 마음을 열어주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아이들과 이런저런 활동을 하며 재미있게 논 순간들이 그날 찍은 사진에 담겨 있다. 사진을 보면 기억하는 것보다 엉망은 아니었구나 싶은 마음에 다시금 힘을 낸다.






모든 시작은 이토록 어설프다. 그럼에도 수년간 사무실에서 익숙한 일들을 반복하다가 공부를 시작하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니 가슴이 뛰었다. 모든 시작은 이토록 설렌다. 숲해설 일이라는 건 늘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 같았다. 매번 다르게 수업을 기획하고, 같은 주제라 하더라도 대상이나 계절, 날씨, 장소, 인원이 달라졌다. 어제의 숲과 오늘의 숲이 다르고, 수업 때 나타나주는 곤충과 동물이 매일 달랐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게 자연의 섭리일진대 자연 속에서 뛰노는 일이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매번 새로운 프로젝트였다. 정해진 틀과 반복적인 일을 선호하는 누군가에게 이 일은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새로운 도전과 경험의 기회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주어진 시간을 스스로 만들어간다는 느낌이 아주 재미있고 보람 있다. 아, 나는 내 일이 참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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