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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림 Aug 18. 2023

너와 내가 연결되는 시간

진심은, 보이진 않지만 단단한 끈을 통해 결국 전해지리라는 믿음

드디어 3월 8일, 나뭇가지와 땅을 뚫고 새싹이 돋아나는 이른 봄, 센터에서 청년들을 처음 만나는 날이다. 그들과 무얼 할지 기획하고, 상상하며 보냈던 지난 한 달이 눈앞에 스쳤다. 며칠 전부터 긴장되기 시작한 나머지 수업 전날인 내 생일에는 가족들과 장어를 어떻게 먹었고 케이크는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온통 청년 숲해설 프로그램에 정신을 빼앗겼던 날들이었다.


며칠 전에도 답사를 했었기에 숲은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1시간 반쯤 미리 도착해서 강의실에 먼저 들렀다. 요청해 둔 대로 책상은 조별로 잘 배치되어 있었고, 그 위에는 수업 때 쓸 준비물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마음속이 울걱울걱 새순이 돋는 듯했고, 두 다리가 뿌리처럼 단단하게 땅을 지지하는 것 같았다. 허리와 어깨가 절로 펴졌다.


'그래. 여기가 오늘 나의 무대란 말이지.'


깊게 쉰 호흡을 가볍게 툭 내뱉은 다음 앞쪽에 서서 강의실을 둘러보았다. 정말 저 뒤까지 다 보였다. 학교 다닐 때 선생님들이 "여기 나와서 보면 다 보인다" 했던 말씀이 진짜였다니! 그래서 친구와 수업시간에 몰래 쪽지를 주고받던 것도, 교과서 안에 만화책을 껴놓고 보던 것도 다 들킨 거구나.


숲에서는 나무와 풀들이 이야깃거리를 던져주면서 도와주니까 괜찮은데, 시멘트와 플라스틱으로 둘러싸인 강의실에서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쓰고, 실제 강의하듯 서서 말해보고, 여러 번 녹음해서 들어보며 목소리 톤과 발음, 속도를 체크했다. 지하철 안에서도 내내 면접준비 하는 취준생이 된 것처럼 중얼중얼 시나리오를 읊으면서 왔다. 강의실 앞에 서서 36명의 청중이 앉아 있다고 상상하고 실제로 강의를 하듯 말해봤다. 이리저리 왔다 갔다 움직이고, 여러 군데로 시선을 보낼 수 있도록 신경 쓰고, 자세도 고치고 손짓도 연습하면서. '나는 스티브 잡스다. 지금 능숙하게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중이다.' 계속해서 최면을 걸었다.






시간이 되자 청년들이 강의실로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나는 진작에 산을 한 바퀴 돌아보고 와서 자리에 앉아있었다. 강연대 옆에 있는 강사용 의자 대신 참여자들이 앉는 자리에. 조금 짓궂을 수도 있겠지만, 청년들 사이에서 분위기를 보고 싶었다. 어떤 사람들인지, 오늘 컨디션은 어때 보이는지, 이 프로그램에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들끼리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서로 잘 모르기도 하고 비슷한 또래여서 인지 청년들은 나도 참여자라 생각하고는 프로그램*(청년도전 지원사업 프로그램)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왔다. 잘 모르겠다 답하고는 그들에게 물었다.


"지금 이건 어떤 프로그램이에요?"

"숲해설?이라는 거 같아요."

"아~ 숲이면 밖으로 나가려나요?"

"어? 그런가? 생각을 못해봤는데... 잘 모르겠어요. (웃음)"


예상대로 숲해설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분위기를 파악하면서 청년들끼리 이야기하는 걸 듣고 있다 보니 어느새 오후 1시, 수업을 시작할 시간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강의실 앞으로 걸어 나왔다.


방금 전까지 같은 조에 앉아 있던 사람이 앞에 나가 "안녕하세요. 숲해설가 소림입니다." 하고 인사하니 청년들이 입을 벌린 채 쳐다봤다. 그러더니 이내 웃으면서 손뼉을 치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수업 직전까지는 그렇게 떨리다가 막상 나가서 인사를 하고, 준비한 자기소개를 마치고 나니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즐겁고 재미있었다. 청년들은 마스크 속에서 미소 짓기도 하고 고개도 끄덕이고, 손 들어 질문도 하면서 앞에 선 사람의 어설픈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따분해하는 사람들 앞에서 3시간 동안 혼자 웃고 말할까 봐 걱정했는데, 그들의 따뜻한 환대에 용기를 듬뿍 얻으며 첫 수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3월에서 6월**까지 총 92명의 청년들과 만났다.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이들과 소통했다. 달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면 반갑고, 세 번의 수업이 끝나고 헤어질 때면 무척 아쉬웠다. 마지막 시간에는 마음을 꾹꾹 담아 그들에게 항상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사실, 보이지는 않지만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 이곳에, 이 시간에 우리가 만난 것도 사실 엄청난 인연이에요. 수많은 우연과 인연이 씨실과 날실처럼 얽혀서 우리가 여기에서 만날 수 있게 된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이 인연을 소중히 하면서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으로 서로를 응원해 주면 좋겠습니다."


매 시간 이런 마음으로 그들을 만났다. 한 명 한 명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때에도, 나의 이야기를 전할 때에도, 나무와 풀과 곤충에게서 배울 점을 찾을 때에도 항상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마음을 가졌다. 지구의 수많은 나라 중 대한민국에 태어나, 우연히 이 프로그램을 알게 되고, 신청해서 선발되고, 하위 프로그램에 숲해설이 선택되고, 진행 강사가 나로 정해져 결국 우리 모두가 한 곳에서 만나게 되기까지. 크고 작은 사건들이 얼마나 많이 얽히고설켜 있을까. 엄청난 확률을 뚫고 만난 거다, 우리는. 그러니 실로 어마어마한 인연일 수밖에.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길에서 잠시 말을 나눈 사람, 1회성 프로그램을 통해 만난 아이들, 우연히 들른 가게의 점원들도 결코 가볍게 대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번 청년 숲해설 프로그램 테마를 '연결'로 잡았다. 회차를 거듭하며 숲에서의 시간들이 쌓여갈수록 자연과 내가 연결되어 있음을, 그리고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그들이 느낄 수 있길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테마에 맞는 세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것은 물론, 내가 먼저 그런 마음을 갖고 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진심은 통하기 마련이니까. 비록 세 번의 만남이 짧을지라도,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라도 그들을 향한 마음이 닿길 바랐다. 그들이 나의 이름을 잊어도 좋다. 이게 어떤 풀이고 나무인지 기억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그저 길을 지나다가 길섶에 핀 들꽃에 눈길 한 번 더 보내고, 한 번쯤 가을 낙엽을 주워도 보고, 벌레를 발견하고 놀랄지언정 해치지 않고 그저 지나가게 두어 준다면. 그러면서 그때 다 같이 숲에서 보냈던 장면을 어렴풋 꺼내봐 준다면, 그걸로 더할 나위 없겠다.





    *청년도전 지원사업 프로그램. 그 안에 청년의 취업을 돕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있고, 내가 맡은 숲해설 도 그중 하나다. 청년들은 여러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일정한 과업을 수행하고 이수 시간을 채워야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사업 초반에 참여자들이 몰리며 인원을 초과달성한 덕에 원래 예정되어 있던 7월 수업은 취소되었다. 갑작스러운 일정 변화에 당황스러웠지만, 6월부터 무척 더워졌고 우리 수업은 하루 중 가장 더운 13~16시였기에 7월에 시원하게 쉬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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