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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호 노무사 Feb 16. 2018

팀장님, 다음 주에 연차 쓰겠습니다!

연차휴가, 시기지정권과 시기변경권에 대하여


"점장님, 여기 연차휴가 신청서입니다"



서연은 두려웠다. 하지만 젊었다.

적어도 분노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삼촌의 말이 하루살이 인생과도 같은 서연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까짓것. 한 번 저질러 보지 뭐. 잘리기밖에 더 하겠어? 서연아 너, 아직 젊잖아. 뭐가 그렇게 무섭니? 넌 잘못한 거 없어. 조그마한  법 하나도 지키지 못하는 이 사회가 잘못된 거지...'


서연의 휴가 신청에 점장은 잠깐 멈칫하는 듯했다.

하지만 곧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표정을 가다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알바생 주제에. 요즘 애들은 주제를 몰라. 조금만 잘 해주면 지들이 뭐라도 된 줄 안다니까"

"네? 점장님? 뭐라고요?"

"아, 아냐 연씨. 그냥 혼잣말이야."


'넌 혼잣말을 그렇게 남이 들리게 말하냐? 쳇. 유치하기는...'


혼잣말로도 갑질을 할 수 있구나.
서연은 생각했다.

점장은, 마치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미간을 한껏 찌푸린 채 연차휴가신청서를 째려보았다. 시선은 서류를 향해 있지만, 그 눈빛은 서류에 반사되어 서연을 향하고 있는 듯했다.


"이 신청서, 어디서 가져왔니? 우리 가게엔 이런 거 없는데."

"인터넷에서 구했습니다"


"음... 화요일. 다음 주네?"

"네"


"왜? 뭔 일 있어?"

"개인적인 일입니다."


"남자 친구랑 데이트하는 날이니?"

"개인적인 일입니다."


"그래도 연차휴가 신청하면서 이유는 얘기해 줘야 하지 않나? 그게 예의 같은데..."

"개인적인 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갑이란 존재는... 을의 예의를 들먹이면서 자신의 몰상식은 모르는구나.

서연은 '연차휴가는 사용목적을 알릴 필요가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휴가입니다. 이런 대규모 외식업체의 점장이 그런 기본적인 노무 상식도 모르시나요? 데이트는 도대체 또 뭡니까? 유치하게...'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을 아꼈다.

점장이 진짜로 알고 싶은 건 서연이 왜 연차휴가를 신청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이 휴가를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가에 있었다. 전략에 말리지 말자, 서연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내가 안된다고 하면 어쩔 거냐?"


점장은 생각보다 직설적이었다.

그걸 공격성이라고 이름 붙여야 하는 건지, 솔직함으로 이름 붙여야 하는 건지, 서연은 헷갈렸다.




"아무리 맘에 안 들더라도, 다른 사람의 감정도 생각하면서 말을 뱉어야 하는 거야. 그게 어른이야. 우리 서연이는 이제 다 컸으니까, 다른 사람의 마음도 헤아려 가면서 얘기해야 해. 그게 배려란다."


서연은 순간 아빠의 얼굴이 떠올랐다.

과연 우리 사회에 어른이 얼마나 있을까, 생각했다.

얼굴에 주름살이 있다고, 다 어른은 아니다.

서연은 적어도 자기가 일하는 가게엔 어른이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동료 알바, 민주가 더 어른스러워 보였다.  


"그런데, 아빠. 상대방이 영 아니다,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해? 얘기해? 참아? 참는 게 상대방을 배려하는 거야?"


삼촌은 정의를 위해 싸워야 한다고 얘기했고, 아빠는 그래도 참아야 한다고 얘기했다.

두 사람 다 순수했지만, 순수를 지향하는 방법은 달랐다.


아빠는 흐르는 물이 돼라, 했고,
삼촌은 튀어나오는 송곳이 돼라, 했다.


서연은 아빠를 사랑했다. 하지만, 혼란스러웠다.

사회에서의 아빠와 가정에서의 아빠가 달랐기 때문이다.

 

아빠는 대학 근처 원룸에 서연을 보내면서 신신당부했다.


"데모는 하지 마라. 네가 열심히 공부해서 정의를 실현하면 돼. 한두 명 피켓 들고 고함쳐봤자, 세상은 바뀌지 않아.  불만이 있으면 네가 출세해서 세상을 바꿔라. 징징거리는 건 애들이나 하는 행동이야. 알겠지?"


아빠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었다.

아빠는,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라고 얘기해 왔다.

세상은 소수의 희생으로 성장해 왔으므로, 그 희생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런 아빠가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서 침묵하라고 했다.    

아빠는 다른 가치관을 얘기했다. 아빠답지 않았다.  


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에 학생운동에 투신했던, 정의로운 아빠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서로 배려해야 한다면서, 짜장면 한 그릇조차 깨끗하게 씻어서 문 앞에 곱게 내어 놓는 착한 아빠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었다.

서연은 알고 있다.   

아빠는 그저 그 소수의 희생 속에 자기의 딸이 포함되지 않기를 바랐다는 것을...

서연은 그걸 지식인의 이중성이라고 비난하고 싶지 않았다.

아빠는, 서연에게 그런 존재였다.



근로자의 권리 : 시기지정권


서연은 생각했다.

아빠의 역사와 철학은 나의 것이 아니다.

언제까지 아빠의 품 안에서 응석을 부리며, 아빠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빠는 서연의 삶에서 사라졌다.

이제 아빠의 공간에서 독립해야 할 시간이 된 것 같았다.  


서연은 아빠를 거역하고, 삼촌을 따르기로 했다.

그게 더 좋아 보였다.

그게 더 맞는 것 같았다.  


"안된다고 말씀하시면 안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순간, 점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짜증이 묻어 나오긴 했지만 차분한 얼굴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 점장의 얼굴에 비친 감정은 단순한 짜증이 아니었다.

그건 분노였다.


갑은, 을의 용기에 분노하는 존재였다.
분노의 이유가 구차했다.  


"서연씨,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야?"

"예?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저는 연차휴가에 대한 제 권리를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서연씨, 자꾸 권리, 권리 하는데 그렇게 사회생활하는 거, 아냐. 어른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제가 뭐라고 했는데요? 그냥 법에 나와있는 대로 연차휴가를 신청한 겁니다. 점장님이 법을 잘 모르시는 것 같아서요..."


서연도 분한 마음에 점장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자기는 맨날 알바들 자존심을 건드리면서, 이 정도도 못 견뎌? 누군 자존심이 없어서, 당신 조롱을 견뎌낸 줄 알아? 왜 직원만 예의를 갖춰야 하지? 사장은 예외가 없어도 되는 거야?'


"음. 법대로 해보자 이거지... 자기 무덤을 파고 있군 그래."


장은 또 입에 무얼 넣고 있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법대로 하자는 게 왜 무덤을 파는 일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
우리 사회가 법치사회가 맞긴 한가?

"서연씨, 휴가라는 게 뭔지 알아?

"예?"


"휴가라는 게 말이지... 근로자가 가고 싶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게 아니야. 사용자가 허가를 한 그 날, 가야 하는 거지. 알아?"

"연차휴가는요... 노동자가 원하는 시기에 줘야 합니다. 사용자가 그 시기를 맘대로 정할 수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서연은 또박또박 지난번 연차휴가에서 배운 지식을 점장에게 전달했다.  


근로기준법 제60조(연차유급휴가)     
⑤ 사용자는 제1항부터 제4항까지의 규정에 따른 휴가(연차휴가를 말한다)를 근로자가 청구한 시기에 주어야 하고, 그 기간에 대하여는 취업규칙 등에서 정하는 통상임금 또는 평균임금을 지급하여야 한다.


"서연씨, 공부를 하려면 똑바로 해. 누가 그 정도도 모르고 있는 줄 알아?"

"네?"




사용자의 권리

 : 시기변경권(사업운영에 막대한 지장이 있는 경우)



"사용자가 시기를 변경할 수 있다는 조항, 못 읽어봤어?"

"아뇨. 읽어 봤습니다"


근로기준법 제60조(연차유급휴가)     
⑤... 다만, 근로자가 청구한 시기에 휴가를 주는 것이 사업 운영에 막대한 지장이 있는 경우에는 그 시기를 변경할 수 있다.


"그럼, 내 대답을 알겠네. 딴 날 가. 화요일은 안되니까."

"왜 안됩니까?"


"서연씨, 이런 내 권리를 사용자의 시기변경권이라고 해. 연차휴가날짜를 변경할 수 있는 사용자의 권리! 하도 권리, 권리 하니까, 나도 앞으로 법대로 해줄게."

"그런데, 점장님. 사업운영에 막대한 지장이 있는 경우에만 날짜를 변경할 수 있습니다. 제가 다음 주 화요일, 연차휴가를 간다고 해서 사업운영에 막대한 지장이 있습니까?"


"그래, 네가 그날 가면, 저녁 시간에 서빙할 알바생이 한 명 없어지는 거니까, 사업운영에 지장이 있는 거지."

"아뇨. 그냥 지장이 있는 게 아니고요... 막대한 지장이 있냐고요? 이런 대규모 외식업체에서 하루에 5시간 일하는 알바 노동자 한 명이 빠졌다고 해서 사업운영에 막대한 지장이 있다는 게 말이 됩니까? 무단결근한 것도 아니고, 법적으로 미리 연차휴가를 신청한 건데도 말이죠. 전 점장님 말씀처럼 법대로 연차휴가를 신청한 겁니다. 점장님은 거부하거나, 날짜 변경할 권리, 없습니다. 전 다음 주 화요일, 안 나옵니다. 결근이 아니라 연차휴가로요!"


서연의 분노는 논리적이었다. 마음 속에 꾹꾹 눌러 담아 두었던 정의감을 그대로 토해 냈다.

하지만, 논리가 권력을 앞설 수 있을지, 서연은 두려웠다. 얼굴에 그 두려움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연차휴가는 근로자가 신청한 시기에 가게 해야 한다.
그 시기에 연차휴가를 갔을 때 사업에 막대한 지장이 있다면, 그 경우에 한하여 사용자는 그 시기를 변경할 권리가 있을 뿐, 그걸 거부할 권리가 없다.
연차휴가는 노동자에게 부여된 중요한 법적 권리다.




서연은 깔끔하게 연차휴가를 정리했고, 점장은 침묵했다.

자신의 억지가 무너지는 것을, 점장은 느꼈다.

자기의 억지로 이겨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요즘 애들은 책임감이 없어. 지가 가면 다른 알바생이 두배로 뛰어야 하는데, 그건 생각도 안 하고. 참나.'


억지가 무너진 점장은 자기 합리화를 시도했다.

자신의 억지를 인정하기보다 상대방을 무책임하다, 생각하기로 했다.  

억지는 사회생활로 둔갑하고, 억지를 인정하지 않는 근로자는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무책임한 인간이 되었다.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머리를 긁적긁적하더니, 점장은 서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갔다 와. 하지만, 이후 일은 내 책임, 아니다. 네가 자초한 거야. 사회생활, 그렇게 하지 마."


서연은 6개월간 쉬지 않고 일했다. 최선을 다했다.

연차휴가를 신청한 적도 없었다. 지각을 한 적도, 자기 의사로 조퇴를 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 6개월간 연차휴가 하루, 아니 고작 5시간.

 5시간을 신청했다는 이유로 서연은 무책임한 알바생이 되어 버렸다.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까탈스러운 여자로 낙인찍혀 버렸다.

우리 노동현장은 비이성적이었다. 심지어 잔인하기까지 했다.


서연은 화요일 이후, 자신의 알바 생활이 만만치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서연은 송곳이 되어 있었다.

낭중지추(囊中之錐).


주머니 속의 송곳은 숨길 수 없는 법이다.


제4화. 끝.


브런치에 연재된 "소설로 읽는 사회생활과 노동법"을 엮어서 "당하지 않습니다(카멜북스)"라는 책을 발간했습니다. 책 발간의 기회를 주신 브런치 관계자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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