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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호 노무사 Feb 23. 2018

네? 다른 곳으로 가라고요?

전직명령에 대하여

화요일은 가게에 나가지 않았다.

그날만큼은 일하기 싫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눈물이 나는 날이었다.



삶의 경계에서



대학 2학년, 중간시험을 앞두고 있던 때였다.

도서관은 출근길 지하철처럼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람은 가득했지만 적막했다.

적막을 깨는 휴대폰 벨소리. 서연의 것이었다.

아차. 진동으로 바꿔 놓는 걸 깜박했다.


"죄송합니다"


서연은 황급히 뛰어나가며, 수신자가 누구인지 모호한 사과의 멘트를 나지막하게 공기 속으로 날려 보냈다.


엄마였다.


'웬일이지? 엄마가 이 시간에 전화를 다하고...'


"어, 엄마. 왜?"


분명히 엄마의 번호였는데, 아무 소리도 없었다.

감기에 걸렸는지, 코를 훌쩍거리는 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그 찰나의 순간에 서연의 머릿속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불길한 일들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날 아빠가 죽었다. 그날 이후 서연의 삶은 달라졌다.

사실 서연은, 아빠가 어떤 일을 하는지 정확하게 몰랐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회사에서 연구직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 외에, 서연은 아빠의 일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다.

 

아빠가 삶의 공간에서 사라진 이후에야,
서연은 아빠의 삶을 알았다.




이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아빠는 노동자협의회의 간부였다. 노조를 만들기 위한 준비단계 같은 거라고, 삼촌이 설명해 주었다.


"그 회사, 노조 탄압으로 악명이 높은 회사야. 하청업체도 엄청 무시하고... 사람들은 좋은 회사로 알고 있지만, 과로사로 죽은 직원들도 꽤 있어. 직원들 쥐어짜서 성과를 내는 회사지. 너네 아빠 성격에 두고 볼 수 없었을 거야..."


아빠는 같은 팀 동료가 과로사로 사망한 것이라고, 증언했다.

하긴, 아빠도 그랬다. 밤샘근무는 기본이었다.

퇴근한 이후에도 누군가가 수시로 아빠에게 전화를 해 댔다.

"까톡, 까톡" 알림 소리는 평온한 한 가족의 주말 아침을 방해했다.

카톡은 우리 가족 최대의 적이었다. 회사는 은밀하게, 한 가족의 거실과 침실마저 점령해 나갔다.  

  

회사는 아빠를 회유했지만, 아빠는 거부했다. 아빠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법정은 유가족의 손을 들어주었다. 직장동료의 유가족은 아빠의 용기로 유족급여를 받게 됐고, 아빠는 회사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회사는 먹잇감을 놓지 않는 하이에나처럼 집요하게 희망퇴직을 종용했지만 아빠는 거부했다.

그러자 회사는 연구직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아빠를 영업직으로 발령 냈다.

연구직으로서의 아빠는 우수직원이었지만 영업직으로서의 아빠는 퇴출 대상이었다.


"회사가 무슨 구호단체야? 실력이 없으면 알아서 그만 두든지... 실력도 없는데, 눈치도 없어요. 쯧쯧, 그러니까, 저 나이에 저 꼴이지..."

회사는 노골적으로 악담을 퍼부었다. 꿈보다는 밥이라고, 회사의 거대 권력에 맞서 싸울 만한 리더십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아빠가 마지막이었다.

 

노동자협의회의 숫자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동지라 여겼던 사람들은 아빠를 멀리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회사의 바람대로(?)  아빠는 영업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다음 단계는 뻔했다. 대기발령, 그리고 해고...

노조를 만들려 했던 회사의 몇몇 사람들이 그 단계를 거쳤다. 단지 아빠는 해고에 이르기 전에, 죽었다는 게, 달랐다.


아빠는 사라지고
아빠의 흔적만 서연에게 남았다.

뉴스에서는 아빠의 회사가 사상 최대의 영업실적을 올렸다며, 용비어천가를 늘어놓고 있었다.

야근에 지쳐 쓰러지고 죽어간 노동자들의 삶은 어느 언론에서도 보도하지 않았고, 소수의 희생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인간의 얼굴을 잃어버린 자본주의를 그들은 찬양하고 있었다. 돈이 유일무이한 목적이었고, 인간은 수단이었다.




전직명령의 법적 정당성



한동안, 눈물이 서연의 삶을 채웠다.  

아빠는 소수의 삶을 택했지만, 딸이 소수가 되는 건 원치 않았다. 그런 아빠를 떠올릴 때마다 서연은 미안했다. 아빠의 삶을 몰랐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한 편으론 궁금했다. 어떻게 연구직을 영업직으로 발령낼 수 있는 걸까? 그게 법적으로 가능한 걸까? 사실은 그 전직 명령(근무장소나 직무내용을 바꾸는 회사의 명령을 말한다)이 아빠를 죽음으로 내 몰았기에, 서연은 그 법적 진실이 궁금했다.


[근로기준법 제23조 (해고 등의 제한)]
①사용자는 근로자에게 정당한 이유 없이 해고, 휴직, 정직, 전직, 감봉, 그 밖의 징벌(懲罰)(이하 “부당해고등”이라 한다)을 하지 못한다.

[근로기준법 제28조 (부당해고등의 구제신청)]
 ①사용자가 근로자에게 부당해고등을 하면 근로자는 노동위원회에 구제를 신청할 수 있다.

법에는, 회사가 직원들의 근무지를 바꾸거나 직무 종류를 바꾸기  위해서는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문제는 법에서 얘기하고 있는 정당한 이유가 교묘하게 조작되고 있다는 거야. 그리고 법원에서도 웬만해서는 회사의 인사권을 존중해 준다는 거지... 전직에 대한 명령권이 회사의 날카로운  무기로 변질된지는 이미 오래됐어"


삼촌은 법원 판결에 비판적이었다.

근로계약서에 근무장소와 직무 종류가 적혀 있다면 함부로 그 내용을 바꿀 수 없지만, 보통 근로계약서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고 했다.


"그럼, 근로계약서에 그런 내용이 없을 때는 어떻게 되는 거야? 분명 법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전직을 할 수 있다고 돼 있잖아"

"그래. 그건 그렇지. 그런데 법원에서는 전직에 대해서는 회사에게 포괄적인 권한이 있다고 봐. 업무상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전직명령을 내리면, 웬만하면 그 명령을 인정해 주고 있어"


"그럼 회사가 필요하면 그냥 서울에서 부산으로 발령낼 수도 있는 거야? 그럼 법이 무슨 필요가 있어?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며?"

"음, 그래. 네 말도 맞아. 전직이 근로자에게 상당한 불이익을 줄 수 있겠지? 법원에서도 전직 때문에 받게 되는 직원들의 생활상 불이익이 매우 클 때는 전직명령이 정당하지 않다고 얘기하고 있어.  즉 회사의 업무상 필요성과 노동자의 생활상 불이익을 따져 봐서, 노동자의 생활상 불이익이 매우 크면, 전직명령이 잘못된 거라고 판단하고 있기도 해."


"응, 그런데?"

"문제는... 생활상의 불이익이 매우 매우 커야 한다는 거지. 서울에서 부산 가는 정도는, 직장인이라면 통상 감수해야 할 불이익에 불과하다는 판례도 있어. 즉, 전직에 대해서는 회사에 더 큰, 아니 훨씬 더 큰 재량권을 인정하고 있어. 그 결과, 전직이 교묘하게 악용되고 있는 거고."


근로자에 대한 전보나 전직은 원칙적으로 인사권자인 사용자의 권한에 속하므로 업무상 필요한 범위 내에서는 사용자는 상당한 재량을 가지며 그것이 근로기준법 등에 위반되거나 권리남용에 해당되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유효하고,
전보처분 등이 권리남용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전보처분 등의 업무상의 필요성과 전보 등에 따른 근로자의 생활상의 불이익을 비교·교량하여 결정되어야 하고,
업무상의 필요에 의한 전보 등에 따른 생활상의 불이익이 근로자가 통상 감수하여야 할 정도를 현저하게 벗어난 것이 아니라면 이는 정당한 인사권의 범위 내에 속하는 것으로서 권리남용에 해당하지 않는다. (대법원 1995.10.13. 선고 94다52928  판결)


"보통 어떤 식으로 악용되는 거야?"

"음... 예를 들어 회사가 싫어하는 직원이 있어. 그때 업무상 필요하다고 하면서, 그 사람하고 안 맞는 부서로 발령을 내는 거야. 자연스럽게 퇴직을 유도하는 거지. 노조활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에 대해선 직원도 별로 없는 지역에 보내버려. 거기서 찌그러져 있으라는 거지. 자연스럽게 조합활동이 약해지기를 바라는 거야. 희망퇴직을 권고했는데 따르지 않는 직원도 마찬가지야. 전직을 이용해서 스스로 걸어나가게 만들 때가 많아. 연구를 하는 직원에게 영업을 하라는 게 뭘 의미하겠니? 물론 진짜 업무상 필요해서 전직을 명할 때도 있지만, 남용하는 사례도 많다는 거야..."


"업무상 필요해서 그런 거다... 그것만 인정되면 불이익이 있더라도 근로자가 대응하기 쉽지 않겠네?"

"응.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 업무상의 필요성이 없다거나, 생활상의 불이익이 매우 크다는 걸 보여줘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아."


"그런데, 전직이 그렇게 아파? 힘들어?"

"음... 사실, 부당한 전직은 인간의 자존심을 땅의 가장 깊은 바닥까지 끌어내린단다. 그까짓 것도 못 견디냐며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당해보지 않고서는 그 모욕감의 깊이를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거야."


아빠는 부당한 전직명령을 받았다. 노조를 탄압할 목적으로, 혹은 특정 노동자의 퇴직을 유도할 목적으로 전직명령을 내리면 그건 불법이다. 하지만 거대한 권력에 맞서 싸우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삼촌도 그런 경험이 있다고 했다. 간부한테 한 번 대들었다가 전공, 경력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직무에 배치돼 평가가 엉망으로 나온 적이 있다 했다. 싸우다가 지쳤고, 그러다 포기했다고 한다.  누가 끝까지 싸우지 못한 삼촌에게 돌을 던질 수 있으랴.

의지가 강한 삼촌은 끝내 제 발로 나왔고 아빠는 그 감정의 상처를 이기지 못했다.

아빠는 강해 보였을 뿐, 여린 마음의 소유자였다.


직원 내보내기 10종 세트로 무장한
교묘한  회사의 기술을,
여리고 착한 아빠는 당해낼 수 없었다.



자존심마저 무너뜨리는 날카로운 칼날, 전직



'아, 아빠가 조금만 더 이기적이었다면...'


아빠의 유해가 안치돼 있는 납골당에서 서연은 아빠를 원망했다.


원망은 그리움의 변주곡 같은 것이다.


서연은 그저 아빠가 보고 싶었다.

사진 속 아빠는 환히 웃고 있었다.


1. 전직을 명하기 위해서는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2. 근로계약서에 근무장소와 직무 종류가 적혀 있는 경우엔  근로자가 동의해야만 전직을 명할 수 있다.
3. 근로계약서에  그런 내용이 적혀 있지 않은 경우, 영업상 필요가 있다면 근로자의 불이익이 현저하게 크지 않는 이상 전직명령을 인정해 준다. (근로자의 불이익이 매우 크다면 전직명령이 부당하다는 판례도 있다)
4. 그래서 다양한 목적으로 전직 명령권이 악용된다.
5. 그러다가 사람이 쓰러진다...


서연은 삼촌의 말을 노트에 정리해 보았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아빠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직장생활 내내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일을 하는 게 얼마나 버거웠을까.

자존심이 센 아빠는... 얼마나 치욕스러웠을까. 그래도 가족의 얼굴을 떠올리며, 참고 또 참았겠지...

하지만 아빠는 결국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인내의 땅끝에 도달하고 말았다.  그리고는 지쳤다는 듯, 아무도 주위에 없다는 듯, 삶의 절벽으로 두 발을 내디뎠다. 자의였을까, 타의였을까...

용돈 좀 올려 달라고 투덜대던 그 철없던  시기에, 아빠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삶의 끈을 놓아 버렸다.

그렇게 아빠는 퇴출 직전의 영업직원으로, 삶의 마침표를 찍었다.


자존심은 인간에게 남은 최후의 감정, 아닐까?
자존심이 먼지가 되어 사라질 때 인격도 함께  쓰러지고 흩어진다.
부당한 전직은 마지막 자존심마저 무너뜨린다.
함부로 휘둘러서는 안 되는 날카로운 칼날이다.

제5화. 끝.


브런치에 연재된 "소설로 읽는 사회생활과 노동법"을 엮어서 "당하지 않습니다(카멜북스)"라는 책을 발간했습니다. 책 발간의 기회를 주신 브런치 관계자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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