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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호 노무사 May 11. 2018

노조가 무슨 빨갱이입니까?

노조 설립과 부당노동행위에 대하여.

간절함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민기는 공무원 시험에 연거푸 떨어졌다. 지구의 중력이  느껴졌다. 한 걸음조차 옮기기 쉽지 않았다.     


"한신아, 나, 한심하지? 너는 결혼도 하고, 회사에서도 승진도 하고, 이제 아이도 있고... 좋겠다. 나는... 내가 부끄러워. 얼굴을 못 겠어."

"형, 왜 그래요? 형답지 않게. 지나갈 거예요. 이 시간도. 꿈처럼, 바람처럼..."     

"내가... 그때... 점장한테 대들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그냥 헤헤 웃으면서, 점장이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라고 할 때, 가만히 있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러면, 내 삶이 좀... 달라졌을까?"

"그러면 점장의 노예가 됐겠죠."     


술에 취한 민기를 한신이 달랬다. 안쓰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민기형한테 권리를 말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한신은 생각했다. 괜히 한 사람을 부서지고 무너지게 만든 것은 아닐까.  한신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민기의 핏기 없는 얼굴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스쳐 가는 바람결에 온갖 생각들이 흩날렸다.

       



민기는 공무원 시험을 접었다. 그리곤 개명을 했다. 문기. 벌써 몇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검색만 하면 알바계의 투사처럼 떠오르는 자신의 이름이 부담스러웠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취업을 했다. 새빛서비스라는 회사였다. 에어컨, 냉장고, 세탁기 등 각종 전자기기를 수리하는 회사였다. 대기업인 새빛주식회사의 전자제품을 전담해서 수리하는 협력업체였다.           

문기는 새빛서비스의 수리기사였다. 하청업체이긴 하지만, 대기의 그늘 밑 있다는 생각에 왠지 모를 안도감이 느껴졌다. 하긴,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었다.


이제 문기에겐, 법보다는 밥이 중요했고,
권리보다는 현실이 더 가까이에 있었다.


근로계약이니, 취업규칙이니 하는 것들은 아예 보지도 않았다. 보았댔자,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현실이란 걸, 문기는 알았다. 학습된 무기력이 문기의 삶을 지배했다. 그저 가라고 하면 갔고, 오라고 하면 왔다.




역대급의 여름 더위였다. 에어컨을 수리한 지  1분이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몸 구석구석이 땀으로 가득 찼다. 선풍기라도 틀어 놓으면 좋으련만, 집주인은 자기 쪽으로만 선풍기 한 대를 돌려놓고, 그저 팔짱을 낀 채, 매서운 눈초리로 문기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신이 말한 노예 같은 삶이란 게, 이런 거겠지?'  


그렇다고 더위에 지친 표정을 지을 순 없었다. 고객 만족도 평가 10점을 받아야 했다. 8점이나 9점 따위는 소용없었다. 오직 10점 만점이 필요했다. 지금 문기를 째려보고 있는 저 고객은 전화기 한 대로 자신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왕과 같은 존재였다. 자비로운 왕도 있었고, 잔인한 왕도 있었다. 세상은 요지경이었다.  


"이 제품은 왜 이렇게 고장이 자주 나는 거예요? 수리비를 받고 고쳤으면 제대로 고쳐 주셔야죠?"


'내가 이 제품을 만들었습니까? 나는 그냥 수리기사라고요! 그건, 만든 회사에 따지시고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 올라왔다. 하지만, 고객은 왕이었다. 문기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고객님의 심기를 풀어 드리기 위해,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엷은 미소를 띠면서, 최선을 다해 수리하겠노라고 말했다.


요란한 매미들의 울음소리에 비례해서 더위에 지쳐 망가진 기계들의 아우성이 여름 대목을 채웠다. 매미들의 울음소리의 데시벨 크기만큼 문기의 급여는 뛰었다. 매미소리가 유난히 컸던, 그 해 여름은 버틸만했다.


하지만 우렁찬 매미들의 고함소리가 사그라지고 귀뚜라미들의 애잔한 울음소리가 들릴 때 즈음, 급여는 자유낙하를 하는 돌멩이처럼 떨어졌다. 가을이 깊어지고 낙엽이 떨어지자 문기의 급여도 속절없이 떨어졌다.


가을은 낭만의 계절이 아니라
좀 더  허리띠를 졸라 매야 하는 서글픈 계절이었다.


문기는 제품을  수리한 시간과 대수에 따라, 성과급을 지급받았다. 기본급은 없었다. 수리할 물량이 줄어들자, 손가락을 빠는 날이 늘어났다. 결혼을 하고 가족을 부양하고 있는 이들은 더욱 버거워했다. 보릿고개 같은 시기였다.


그즈음 새빛노조가 만들어졌다. 그동안도 노조를 만들려는 움직임은 있었다. 하지만 한 회사에 두 개 이상의 복수노조를 만들 수 없다는 조항에 손과 발이 묶였다. 회사엔 이미 어용노조가 있었다. 당연히 기사들은 노조를 신뢰하지 않았다. 무늬만 노조였다.


새빛노조는 복수노조를 허용한 법이 시행된 후에, 회사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물밑작업을 거쳐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열악한 노동조건에 힘겨워하던 기사들은 노조에 가입했다. 전체 기사들의 60%가 노조에 가입했다. 하지만 문기는 노조에 가입하지 않았다. 두렵다기보다는 관심이 없는 거라고,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소문이 센터 내에 돌기 시작했다.


"새빛주식회사가 우리랑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협박을 했대. 노조가 있는 회사랑은 같이 일, 못하겠다고 했다는 거야..."

"조합원들한테는 수리 물량을 안 주고 있대. 비조합원들만 특혜를 주고 있어."

"이대로 가다가 회사 문 닫는 거, 아냐? 일단 살고 봐야지. 원청업체가 싫다는데 굳이 노조활동, 해야 하는 거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조합 위원장이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문기가 당했던 것과 똑같은 모양새였다. 회사는 조합 위원장에 대한 뒷조사를 진행했고, 온몸을 다 벗기고서 먼지를 탈탈 털어 냈다. 조그마한 먼지가 떨어졌다. 현미경을 들이대야 볼 수 있을 만한 먼지였지만, 그 먼지는 조합 위원장을 비리투성이의 직원으로 변신시켰다. 위원장은 해고됐다. 노조 탄압이었다. 먼지 때문이 아니었다.

거기에 반발해서 1인 시위를 한 부위원장이  다시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다. 광풍이 휘몰아쳤다.




노동3권 : 헌법상 인권


"문기씨, 나 좀 볼까?"

"네, 센터장님"


센터장은 구석진 커피숍으로 문기를 안내했다.


"문기씨, 힘들지 않아?

"아, 네. 괜찮습니다. 덕분에..."


"자네는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것 같던데, 왜 가입 안 했어?"

"그냥, 뭐, 저는... 노조 같은 거, 관심 없습니다. 일 하는 것만 해도 벅찬데요. 뭘..."


센터장은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꽉 조여서 매었던 넥타이를 약간 느슨하게 풀었다. 그리곤 다리를 꼬았다.


"문기씨도 알겠지만, 요즘 죽을 맛이야..."

"예... 그러시군요..."

"새빛, 어떤 곳인지 알지? 노조, 싫어하기로 유명한 곳이야. 휴... 석 달 받았어"

"네? 무슨 말씀이신지..."

"석 달 동안 노조, 안 없애면, 폐업시키겠대. 원청업체가 물량 안 주면, 우리야 뭐, 문 닫는 거지. 방법이 있나? 문기씨 목도 날아가게 생겼단 말이야. 조합원이고 비조합원이고 싹 다 비상상황이... 그래서 말인데, 문기씨하고 친한 기사들 있잖아. 왜, 그, 누구야? 동욱씨, 성재씨, 재현씨.  그 친구들이랑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그 친구들 설득 좀 해 봐."

"제가 무슨 힘이 있나요? 그 친구들이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뭐..."

"이 친구 좀 보게? 지금 그렇게 한가한 얘기,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갑자기 센터장이 얼굴을 문기의 코 앞으로 바짝 들이밀었다.

그리고선 쥐새끼같이 작은 목소리로 문기에게 속삭였다.


"이건 비밀인데, 노조원 탈퇴시킬 때마다, 인센티브를 줄 거야. 살림에 꽤 보탬이 될 거라고. 탈퇴한 조합원들도 격려금을 줄 거고 말이야. 문기씨, 나 좀 도와줘. 같이 살아야지..."


문기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센터장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대기업의 바지사장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다소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센터장의 그다음 한 마디가 여행용 가방에 억지로 쑤셔 넣은 짐들처럼 머리 속에 깊숙이 박아 놓았던, 문기의 정의감을 부활시켰다.   


빨갱이 같은 새끼들!


문기가 바로 전 직장 팀장에게 들었던 소리였다. 그저 노동절을 달라고 주장했을 뿐인데, 빨갱이 같은 놈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아무 논리도 없이 뜬금없이 빨갱이라는 한 단어로 모든 상황을 정리해 버렸다. 우리나라 현대사의 비극들이 그 한 단어로 점철돼 있었다. 강산이 몇 번이나 변했을 21세기에도 여전히 그런 용어로 모든 상황을 판단하 있다는 게 놀라웠다. 프기도 했다. 그러다가 화가 났다.


문기의 의지는 아니었다. 그저 문기의 가슴이 분노했을 뿐이다. 그리고 분노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을 뿐이다. 송곳은 감출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결국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센터장님, 말씀이 좀 지나치십니다. 노조가 무슨 빨갱이입니까? 기본급 좀 올려 달라고 한 게, 그렇게 잘못된 겁니까? 노조 만드는 건 헌법에 나와 있는 권리입니다.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권리라고요. 인권! 아시겠어요?"


문기는 이전 직장에서 노조라도 만들어야 하나 싶어, 열심히 헌법과 노동법을 공부했다. 그때 배운 것들이 이런 식으로 드러날 줄은 몰랐다.

헌법 제33조
①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


부당노동행위


"그리고 지금 센터장님 행동이 어떤 건지 아세요? 그거, 헌법 위반 행위라고요! 노조원들 자르고, 이상한 곳에 발령내고, 물량 배정 안 해주고, 노조 만들지 말라고 협박하고, 회유하고... 그런 행동을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부당노동행위라고 합니다. 노동3권을 침해하는 사용자의 행위요. 헌법 공부 좀 하고 오세요. 빨갱이가 뭡니까? 헌법을 부정하는 사람들이잖아요?  빨갱이는 노조가 아니라, 센터장님같이 헌법을 부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같이 없는 사람들이 노조 만들어서 인간답게 살아보겠다는 게, 뭐가 문제입니까? 센터장님도 한 달에 150만원 받고 생활해 보세요. 그딴 소리 나오는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81조(부당노동행위)] 사용자는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행위(이하 "不當勞動行爲"라 한다)를 할 수 없다.  
1. 근로자가 노동조합에 가입 또는 가입하려고 하였거나 노동조합을 조직하려고 하였거나 기타 노동조합의 업무를 위한 정당한 행위를 한 것을 이유로 그 근로자를 해고하거나 그 근로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행위
2. 근로자가 어느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아니할 것 또는 탈퇴할 것을 고용조건으로 하거나 특정한 노동조합의 조합원이 될 것을 고용조건으로 하는 행위. 다만, 노동조합이 당해 사업장에 종사하는 근로자의 3분의 2 이상을 대표하고 있을 때에는 근로자가 그 노동조합의 조합원이 될 것을 고용조건으로 하는 단체협약의 체결은 예외로 하며, 이 경우 사용자는 근로자가 그 노동조합에서 제명된 것 또는 그 노동조합을 탈퇴하여 새로 노동조합을 조직하거나 다른 노동조합에 가입한 것을 이유로 근로자에게 신분상 불이익한 행위를 할 수 없다.
3. 노동조합의 대표자 또는 노동조합으로부터 위임을 받은 자와의 단체협약체결 기타의 단체교섭을 정당한 이유없이 거부하거나 해태하는 행위
4. 근로자가 노동조합을 조직 또는 운영하는 것을 지배하거나 이에 개입하는 행위와 노동조합의 전임자에게 급여를 지원하거나 노동조합의 운영비를 원조하는 행위....
5. 근로자가 정당한 단체행위에 참가한 것을 이유로 하거나 또는 노동위원회에 대하여 사용자가 이 조의 규정에 위반한 것을 신고하거나 그에 관한 증언을 하거나 기타 행정관청에 증거를 제출한 것을 이유로 그 근로자를 해고하거나 그 근로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행위


센터장 앞에서 문기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문기씨, 보기보다 독한 측면이 있네..."

"네? 제발 그런 얘기 좀 그만 하세요. 기본급 올려 달랬더니, 빨갱이라고 하지를 않나, 독하다고 하지를 않나... 제발 이성적으로 얘기를 좀 하자고요. 이상한 색깔 좀 칠하지 마시고요"




"문기씨, 새빛회사 경쟁업체인 한도회사 노조 알지? 그 잘난 대기업 노조가 하청업체 근로자들 월급 올려주는 거, 물 밑에서 반대한 건 알고 있나? 자기들 임금 떨어질까 봐 말이야. 회사는 망하기 일보 직전인데, 자기들은 월급 올려 달라는 노조가 제정신이야?"


센터장은 갑자기 대기업 노조를 비난하며  말을 돌렸다. 전형적인 물타기였다.


"센터장님, 지금 그 얘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 사는 공간이 다 그런 것 아닌가요?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고. 좋은 사장도 있고, 이상한 사장도 있고. 노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노조도 있지만, 이상한 노조도 있겠지요. 실상은 이상한 노조가 아닌데, 언론에서 그렇게 만든 경우도 있을 거고요. 그리고 진짜로 이상한 노조가 있다고 해서 헌법이 잘못된 겁니까? 모든 노조가 석고대죄를 해야 하는 겁니까? 그러면, 우리 하청업체 노동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대기업 노동조합은  말로만 연대를 얘기하고, 사장들은 빨갱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언론에서는 신경도 안 쓰고. 도대체 우리는 뭘 해야 하는 겁니까? 그냥 입 꾹 다물고 살아야 하는 건가요? 기본급이 없어도, 기름값을 회사가 안 줘도, 연장근로수당이 없어도, 빨갱이가 안 되기 위해서는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하는 건가요?"


문기는... 투사의 삶을 내려놓고, 은둔자의 삶을 택했다. 그냥 조용히 일하고, 조용히 솔로 라이프를 즐기려 했다. 하지만, 현실은 다시 문기를 세상 속으로 떠밀었다.


운명이 아니라 소명인 걸까. 문기는 중얼거렸다.



위장폐업과 부당해고


새빛서비스 가안센터는 결국 문을 닫았다. 형식상 폐업의 주체는 새빛서비스 가안센터였지만, 사실상 원청업체인 새빛주식회사가 폐업을 주도했다. 하지만, 두 달 뒤 슬그머니 새빛서비스 가인센터라는 또 다른 법인이 만들어졌다. 가안센터에 근무하던 노동자들 중 비조합원들을 중심으로 다시 서비스를 재개했다. 하청업체에 노조가 만들어지면, 상당수의 업체가 이런 방식으로 조합원들을 정리했다. 위장폐업이었다.


부당노동행위가 되는 위장폐업이란 기업이 진실한 기업폐지의 의사가 없이, 다만 노동조합의 결성 또는 조합활동을 혐오하고 노동조합을 와해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기업을 해산하고 조합원을 전원 해고한 다음 새로운 기업을 설립하는 등의 방법으로 기업의 실체가 존속하면서 조합원을 배제한 채 기업활동을 계속하는 경우를 말한다(대판 1991.12.24, 91누2762)
(이러한 위장폐업에 의한 부당해고는) 우리의 건전한 사회통념이나 사회상규상 용인될 수 없는 행위이므로...근로자에 대한 관계에서 불법행위를 구성한다.(대판 2011. 3. 10, 2010다13282)


문기는 노조 사무국장을 맡고 있었다. 노동위원회에 부당노동행위 구체신청과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제기했다. 상당수의 조합원들은 이미 조합을 탈퇴해서, 새빛서비스 가인센터에서 일하고 있었다.

문기는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자기도 그랬다.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다. 두려움의 크기를 이길 만한 연대의 정신이 부족했다. 그들이 부담해야 할 삶의 무게는 공동체의 정신을 무너뜨렸다. 노동자들은 각자도생의 길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게 헌법상 노동3권이라는 허울 좋은 기본권 속에 감춰진 암담한 현실이었다.


다행히 지방노동위원회는  노조의 손을 들어줬다. 가안센터의 폐업이 노조탄압을 위한 위장폐업이란 건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었다.




부당해고 구제명령과 이행강제금


노조원들을 가인센터로 복직시키고 밀렸던 임금을 지급하라는 구제명령이 떨어졌다. 그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법상으론 2천만원 이하의 이행강제금을 부과할 수 있었다.


근로기준법 제33조(이행강제금)
① 노동위원회는 (부당해고) 구제명령을 받은 후 이행기한까지 구제명령을 이행하지 아니한 사용자에게 2천만원 이하의 이행강제금을 부과한다


조합원들은 회사로 돌아갈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회사는 구제명령을 따르지 않고 이행강제금을 납부했다. 밀렸던 임금보다 더 많은 금액이었다. 회사는 중앙노동위원회에 재심을 신청했다. 끝까지 간다는 회사의 의지 표명이었다. 하루하루 살아내기도 벅찬 노동자들이 제 풀에 나가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마치 한 마리의 맹수가 하품을 하면서 먹잇감을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장기전에 대비해야 했다. 노조 간부들은 한기가 느껴지는 천막 안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마디씩을 해 댔다.


"그냥 조용히 법원에 가서 따질 일이지, 왜 보기 흉하게 길거리에서 천막을 쳐 놓고 난리야?"


헌법 정신이 길거리에서 짓밟히고 있었다. 구제명령을 지키지 않은 회사를 향해선 세련된 양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침묵하던 시민들이, 노조원이 입고 있는 남루한 빨간 조끼와 너덜너덜한 천막을 보고선 욕을 했다. 계급사회였다. 그것도 지독한...


그래도 지나가던 일부 시민들이 무슨 소식을 들었는지 따뜻한 커피 한 잔씩을 건네줄 때도 있었다. 고마웠다. 문기는 그걸 교육의 힘이라 생각했다. 적어도 헌법과 노동법만이라도 기본 교육과정에 편입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문기는 다시 언론과 인터뷰를 했다. 언론을 신뢰하진 않았지만, 현재로선 찬밥 더운밥 가릴 여유가 없었다. 억울함을 풀기 위해선 뭐라도 해야 했다.


인터뷰가 나가고 며칠 후 노조 천막으로 서류뭉치 하나가 배달되었다. 보낸 이는 "S"라고만 돼 있었다.


회사 NJ-O 전략이라는 표제어가 적혀 있었다. 노조원(NJ) 숫자를 O으로 하지 않으면 하청업체를 폐업시킨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복사본이었지만 새빛주식회사의 직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때마침 함께 천막 안에 있던 Z당 대표가 그 문건을 봤다.


그날 저녁 뉴스는 온통 새빛주식회사의 부당노동행위 관련 기사로 채워졌다.

어두컴컴한 동굴의 저 끝에 희미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노조 탄압이 알려지자 새빛도 꼬리를 내렸다. 결국 문기도 복직되었다.


"그런데 그, 전략문건, 내부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건데, 누가 전해준 걸까요? 그거 걸리면 새빛 같은 회사에선 거의 해고감이었을 텐데, 진짜 용기 있는 내부자네요."


Z당 대표가 문기에게 말했다.


S. 아마 그녀일 거다. 새빛주식회사에 근무하고 있는 과거의 동료.  자신에게 빚을 졌다는 예전의 문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익명으로 문기는 그녀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나도 빚을 졌네. 고마워 서연아. From M."    


제16화. 끝.


브런치에 연재된 "소설로 읽는 사회생활과 노동법"을 엮어서 "당하지 않습니다(카멜북스)"라는 책을 발간했습니다. 책 발간의 기회를 주신 브런치 관계자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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