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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호 노무사 Apr 27. 2018

연봉 속에 다 들어가 있다고요?

야근의 덫, 포괄임금계약에 대하여

민주는 부끄러웠다.

계약서의 초안은 민주의 손 끝에서 나왔다. 변명해 보았댔자, 스스로 초라해질 뿐이었다.


"이대리, 우리 회사 연봉 계약서 한 번  검토해 줘. 이사님이 좀 더 인건비를 절감하는 방향으로 고쳐 보래"

"네? 그런 중요한 걸 저보고  하라고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순간적으로 본심이 튀어나왔다.

팀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민주에게 말했다.


"그럼, 이 나이에 내가 하리?"


진지하게 문제를 제기해도 팀장은 쌍팔년도 개그로 넘기곤 했다.

대화를 할 생각이 없다는 걸 에둘러 얘기하는, 팀장만의 표현 방식이었다.

업무상 명령이니 대들 생각은 애당초 접어 두라는, 오래된 팀장만의 노하우였다.   


"내가 이대리니까, 맡기는 거지.. 누구한테 이 중요한 걸 맡기겠어?"


휴게실에서 팀장은 민주를 달랬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민주가 생각할 때, 솔직히 정대리나 김과장이나 다 능력이 없었다. 정대리는 낙하산이라는 소문도 파다했다. 정상적으로 심사를 했으면 입사할 수 있었을까. 물증은 없었다. 하지만 심증은 있었다. 정대리가 해야 할 일도 민주가 대신할 때가 많았다. 팀장은 정대리를 믿지 못했다.

김과장은, 차라리 대리일 때가 좋았다. 페이퍼 작성은 깔끔했다. 문제는 그것밖에 못했다. 중간 관리자가 갖추고 있어야 할 리더십이 없었다. 과장이 되어서도 줄 간격과 폰트 크기만 보고 있었다. 기획력은 없었고, 문서 편집 능력만 충만했다. 차라리 편집이나 교열 업무했으면 더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을 텐데, 라는 생각도 들었다.

, 민주에게 이 일을 맡길 밖에 없었다. 팀장 스스로를 위한 업무분장이었다.




바로 사무직 노조의 항의가 들어왔다.


"이사님, 이거 뭐 하자는 겁니까? 포괄임금계약이요? 이거, 수당 안 주는 계약이잖아요?"


민주도 싫었다.

그런 계약이 자기 손에서 만들어졌다는 게 괴로웠다.

노조 위원장의 말은 정확했다. 연장근로를 시켜놓고 돈은 더 주지 않겠다는 계약, 그게 바로 포괄임금계약이었고, 민주의 손으로 그 계약서를 만들었다. 팀장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었고, 그게 인사팀의 숙명이었다. 자신의 능력이 회사에서 오염되고 있었다. 자랑스럽지 않았다. 부끄러웠다.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은, 무능력한 정대리와 김과장이 차라리 부러웠다.




계약의 모양은 단순했다. 하지만, 그 깨끗한 여백의 미소에 속으면 안 된다.

근로계약서의 단순함은 사용자의 재량권을 극대화시켰다. 근로계약서에 근무장소와 업무내용이 없다는 건, 그게 사용자의 권한이라는 걸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근로계약서가 단순할수록 회사의 힘은 커져 갔다.


연봉을 정했다. 그리고 그 연봉을 18로 나누었다. 12는 기본급으로 지급하고 6은 매 짝수월에 상여금으로 지급한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그리고 상여금은 상여금 지급일에 재직 중인 경우에만 지급하며, 지급일 이전 퇴사한 경우에는 지급하지 아니한다, 는 문구가 별 의미 없는 문장인 양 무심히 적혀 있다. 하지만, 그 문구는 상여금을 통상임금(연장근로수당을 지급하기 위한 기준 임금)에서 제외시키기 위한 결정적 문구였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연봉 계약서의 모양새를 띠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연봉 밑에 김과장이 좋아하는 폰트 크기로 당구장 표시가 찍혀 있었다. ※. 이 표시가 나오면 일단 의심해야 한다. 출생의 비밀과도 같은, 무언가가 숨어 있다는 표시다.


※ 연장·야간·휴일근로수당 등이 포함되어 있는 금액임.  


민주는 계약서를 설계하면서, 드라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파리의 연인이었던가', 민주는 중얼거렸다.

'극 중에서 이동건이 김정은에게 이렇게 말했었지'


이 안에 너 있다

                                                                                                  

  

딱, 그 장면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 계약이었다.


"이(연봉) 안에 너(연장근로수당) 있다"




사실 민주는 포괄임금계약을 반대했다.


근로기준법 제56조(연장·야간 및 휴일 근로)
사용자는 연장근로(제53조·제59조 및 제69조 단서에 따라 연장된 시간의 근로)와 야간근로(오후 10시부터 오전 6시까지 사이의 근로) 또는 휴일근로에 대하여는 통상임금의 100분의 50 이상을 가산하여 지급하여야 한다


"팀장님, 연장근로를 했으면 별도로 수당을 줘야지요. 노동계에선 포괄임금계약을 과로의 주범으로 본다고요. 노조에서 이런 계약 보면 가만있을 것, 같습니까? 왜 시대를 거꾸로 가려고 하세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포괄임금계약은 합법적인 괴물이었다. OECD 최장 노동시간 2위의 나라를 만든...


'멕시코는 도대체 어떻게 일을 하기에 1위가 된 거지? 우리나라를 이기다니, 대단하다, 대단해...'


동병상련의 느낌이었을까? 민주는 잠깐 멕시코가 떠올랐다.


연장근로를 했다고 하더라도 회사는 추가적인 임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이 속에 너 있다는 이유였다. 이미 당신의 연봉 속에 연장근로수당이 포함돼 있고, 그 계약서에 당신이 사인을 하지 않았냐며, 오히려 회사가 역정을 냈다. 그 계약을 바로 민주가 설계했다. 업무상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자괴감이 느껴졌다. 부끄러웠다.




포괄임금계약이 처음부터 괴물은 아니었다. 포괄이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아이였다. 출생은 순수했고 본적지도 확실했다.


실제로 몇 시간 노동을 했는지 파악이 안 되는 업무들도 있다. 몇 시간 일을 했는지 알 수가 없으니 연장근로수당도 정확하게 지급할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그냥 퉁쳐서 연장근로수당을 지급하기로 한 계약이다.


그런데 이 순진한 포괄이 속에 욕심이 들어갔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15)


이 세상 모든 근로계약을 자신이 지배하고 싶었다.

포괄이의 욕심은 죄가 되었고 그 죄는 여러 사람을 과로로 이끌었다. 때로는 그 과로가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끌었다. 포괄이는 브레이크 없는 폭주 기관차처럼 노동현장의 구석구석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인건비가 유일한 가치였던 회사는 포괄이가 내민  선악과의 달콤한 유혹을 이겨낼 수 없었다. 결국 포괄이의 욕망이 모든 근로계약을 밀어냈다. 포괄이는 근로계약의 왕이 되었다. 포괄임금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은, 근로계약의 새로운 왕으로 등극했다.


왕이 된 포괄임금은 거칠 것이 없었다. 실제로 근로시간 산정이 가능한 업무마저도 포괄임금이 지배했다. 사법부는 무엇에 홀린 것처럼 포괄임금의 은밀한 욕망을 실현해 주었다. 근로시간 산정이 가능하더라도 계산의 편의를 위해 포괄임금계약을 체결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사용자는 근로계약을 체결함에 있어서 근로자에 대하여 기본임금을 결정하고 이를 기초로 시간외, 휴일, 야간 근로수당 등 제 수당을 가산하여 이를 합산·지급함이 원칙이라 할 것이나, 근로시간, 근로형태와 업무의 성질 등을 참작하여 계산의 편의와 직원의 근무의욕을 고취하는 뜻에서 근로자의 승낙하에 기본임금을 미리 산정하지 아니한 채 시간외 근로 등에 대한 제 수당을 합한 금액을 월 급여액이나 일당 임금으로 정하거나 매월 일정액을 제 수당으로 지급하는 내용의 이른바 포괄임금제에 의한 임금지급계약을 체결하였다고 하더라도 단체협약이나 취업규칙에 비추어 근로자에게 불이익이 없고, 제반 사정에 비추어 정당하다고 인정될 때에는 그 계약은 유효하다.(대법원 1997.4.25. 선고 95다 4056 판결)


포괄임금은 노동현장 어디에나 존재하는 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고, 우리 산업현장 전체를 순식간에 자신의 왕국으로 편입시켰다.


특히 스타트업이나 IT 관련 사업. 수많은 사무직들이 포괄임금의 희생양이 되었다. 며칠간 야근을 해도 임금이 동일했다. 이미 포괄임금이 밤의 시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모든 연장, 야간, 휴일 근로수당을 포괄임금이 흡수해 버렸다. 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쪽쪽 빨아먹었다.


포괄임금은 그렇게 괴물이 되었다.




"이 계약서, 이대리가 만들었다면서? 이대리 그렇게 안 봤는데, 역시 초록은 동색인 건가?"


노조 사무국장이 회사 로비에서 마주친 민주에게 날카로운 비수를 날렸다. 그나마 편하게 얘기를 나눴던 노조 간부였다. 아팠지만 할 말이 없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만들었다 소리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구차한 변명처럼 들릴 거다.


"네"


민주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이제는 적이 됐구나"


민주는 중얼거렸다.




고작 2년밖에 되지 않은 일인데도 민주는 노조 사무국장의 그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경멸과 동정이 동시에 녹아 있는 듯했다.

 

하지만 눈빛만으로 냉혹한 현실을 이길 수는 없었다.


사무직 노조는 조합원 수도 많지 않았다. 모래알 같은 화이트칼라 중심의 노조는 성과급 체계의 위협 앞에서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포괄임금계약을 반대하던 노조 위원장과 사무국장은 여러 가지 이유로 해고됐고, 바로 법원의 소송으로 이어졌다.  

그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 민주는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자신의 의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포괄임금계약을 설계한 원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포괄임금이 지나치게 커 버렸다면서, 뒤늦게 각 정당에서는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민주는 그리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선거철이 다가왔나 보다, 민주는 생각했다.


노동부에서는 포괄임금계약을 좀 더 철저하게 관리하겠노라고 거들었다. 하지만, 어떤 게 정답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단어들로 지침은 채워질 게 뻔했다. 현장에서는 생존의 문제였지만, 행정부에게는 그저 오와 열을 맞춘 페이퍼 작성의 문제일 뿐이었다. 판례와 법률을 적당하게 짜깁기 한 페이퍼는 보기에는 좋았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그저 좋은 말들로 가득 찬 교장선생님의 훈화말씀과도 같았다. 재미도 없었고 감동도 없었다. 나름대로 수고한 담당자에게는 미안하지만, 민주는 그렇게 생각했다.    


법원에서는 근로시간 산정이 가능한 업무라면 포괄임금계약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고했다. 늦은 감이 있지만, 법원이 포괄임금계약의 질주에 브레이크를 걸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감시·단속적 근로 등과 같이 근로시간의 산정이 어려운 경우가 아니라면 달리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시간에 관한 규정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고 볼 만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시간에 따른 임금지급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할 것이므로, 이러한 경우에도 근로시간 수에 상관없이 일정액을 법정수당으로 지급하는 내용의 포괄임금제 방식의 임금 지급계약을 체결하는 것은 그것이 근로기준법이 정한 근로시간에 관한 규제를 위반하는 이상 허용될 수 없다.(대법원 2010.5.13. 선고 2008다6052 판결)


하지만, 중요한 건 타이밍이다. 그런데 노동현장을 향한 입법과 정책과 판결은 항상 한 템포가 늦었다. 

이미 포괄임금은 상당한 열혈 신도를 거느리고 있는, 사이비 종교의 교주로 군림하고 있었다. 과연 스스로 진화한 이 괴물을 우리 사회가 제거할 수 있을까, 민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 사회에 대한 불만의 표현이기도 했고, 회사에서 이런 구조를 만드는데 일조한, 스스로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기도 했다.


밤 10시, 회사 로비를 걸어 나가며, 휴, 민주는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스스로가 쳐 놓은 야근의 덫에 걸려 민주도 허우적댔다.


지하철은 여전히 피곤한 직장인들로 북적거렸고, 밤에 취한 지하철은 비틀거리듯 밤공기를 가르며 새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제14화. 끝.   


브런치에 연재된 "소설로 읽는 사회생활과 노동법"을 엮어서 "당하지 않습니다(카멜북스)"라는 책을 발간했습니다. 책 발간의 기회를 주신 브런치 관계자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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