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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호 노무사 May 18. 2018

임금인상을 요구합니다.

단체교섭과 단체협약에 대하여.

회사에 복귀한 문기는 우선 노동조합을 재건했다. 당분간 위원장의 역할을 맡기로 했다. 문기 외에는 나서는 조합원도 없었다.




편견에 대하여


과거엔 문기도, 노동조합이 썩 내키지 않았다. 노동조합, 하면 떠오르는 빨간 조끼, 나부끼는 대형 깃발, 투쟁의지를 과시하듯 동여맨 머리띠... 문기와 같은 세대에게는 낯선 이미지의 콜라보였다.

그리고 언론에선 무슨 문제만 생기면 노동조합을 들먹였다. 주장의 본질을 파헤치기보다는 그저 노동조합의 욕심이 과하다는 멘트만 무한 반복되었다. 중학교 사회교과서보다도 깊이가 없었다. 하지만 단순한 주입식 교육의 효과는 컸다.  


어느새 노동조합의 빨간 조끼는, 현혹되어서는 안될,
그리고 들여와서도 안될, 위험한 물건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실제로 채용비리에 연루된 노동조합 간부도 있었다.  하청업체 노조 조합원들의 눈물은 외면한 채, 자기들의 배만 불리려는 대기업 노조도 있었다. 노조는 정의의 칼이라는데, 정의감과 연대의 정신이, 빛바랜 사진과 같이 과거의 추억이 되어 가고 있는 노조도 있었다.


문기에게 노동조합이란, 다시 재건해야 할 성벽이 아니라, 이미 존재가치가 사라진, 낡고 오래된 고택과도 같았다. 노조에 대한 얘기를 들을 때면 좌우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모래알 같은 개인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무리 기본급 인상을 요구해도 회사는 요지부동이었다. 버티면 쓰러지는 것은 노동자였다. 결국 노동자가 백기투항을 할 수밖에 없었다.


"조합원 동지 여러분. 우리의 주장이 그렇게 이기적인 주장입니까? 쥐꼬리만 한 기본급으로 밤낮없이 땀 흘리는 노동자에게 최저임금보다 조금 더 높게 기본급을 달라고 하는 게 그렇게 무리한 요구입니까? 이번에 기본급을 인상하라고 단체교섭을 요구했습니다. 동지 여러분, 두렵겠지만, 그리고 무섭겠지만,  힘을 뭉쳐봅시다. 우리도 인간답게 좀 살아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단결해야 회사가 우리를 깔보지 않습니다. 이번엔 좀 바꿔 봅시다. 동지 여러분, 이제 바꿔 봅시다!"


문기는 조합원에게 호소했다. 이번에도 기회를 놓치면 다음 기회도 없을 거라고 했다.


노동자이지, 노예는 아니라고 했다. 


단체협약이 그 출발점이라고 했다.




단체협약의 효력


문기는 김노무사를 통해 단체협약의 중요성을 알았다.


"김주임님. 첫 번째 단체협약이 분기점이 될 겁니다. 단체협약이 체결되면 조합원들이 조금씩 조금씩 노조의 필요성을 알게 될 거예요"

"노무사님, 단체협약이 그렇게 중요한 건가요? 저희들은 이미 근로계약을 체결하고 있는데 단체협약이 어떤 의미가 있는 거죠?"


"원래는 근로계약이나 취업규칙에 의해서 노동자의 노동조건이 결정돼요.  근로계약에선 200의 임금을 받는 것으로 서명을 했다고 가정해  보죠. 그런데 노조에 가입한 조합원이 있다고 생각해 볼까요? 노조가 회사랑 단체협약을 체결했는데, 조합원에 대해서는 250의 임금을 주기로 한 거예요. 그럼 회사는 그 조합원에게 200을 줘야 할까요? 250을 줘야 할까요?"

"아, 250을 줘야 하는군요?"


"맞아요. 그게 단체협약의 힘이에요. 단체협약은 근로계약이나 취업규칙보다 급이 높아요. 근로계약이 라이트급, 취업규칙이 미들급이라면 단체협약은 헤비급인 거죠. 단체협약이 더 상위법이에요. 단체협약이 체결되는 순간, 단체협약과 다른 내용이 규정돼 있는 근로계약이나 취업규칙이 무효가 되는 거죠. 한 사람 한 사람은 회사랑 대등하게 협상을 할 수가 없어요. 사실 힘이  없는 거죠. 하지만 그 모래알과 같은 개인이 뭉치면 거대한 집을 만들 수 있어요. 그게 노동조합이고 노동조합의 단체협약이에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33조(기준의 효력) 
①단체협약에 정한 근로조건 기타 근로자의 대우에 관한 기준에 위반하는 취업규칙 또는 근로계약의 부분은 무효로 한다.
②근로계약에 규정되지 아니한 사항 또는 제1항의 규정에 의하여 무효로 된 부분은 단체협약에 정한 기준에 의한다


"그럼, 회사에선 별로 안 좋아하겠네요"

"대개는 그렇죠. 헌법정신을 존중하는 사용자라면 모르겠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을 따로따로 상대하면 얼마든지 쉽게 노동조건을 바꿀 수 있는데, 단체협약이 있으면 그걸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까요..."




성실교섭의무


하지만 김노무사는 단체교섭과정이 쉽지 않을 거라 예언했다. 회사가 순순히 단체협약을 체결해 줄 리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 예언대로 이루어졌다.


노조가 무리한 요구를 한 건 아니었다. 노동조합 사무실을 하나 제공해 달라는 것, 그리고 기본급을 인상해 달라는 것. 이 두 가지가 주된 교섭요구사항이었다. 크게 어려운 교섭사항도 아니었다. 법적으로 당연히 교섭에 응해야 할 사항이었다. 


노동조합의 구성원인 근로자의 노동조건 기타 근로자의 대우에 관한 사항(징계·해고 등 인사의 기준이나 절차, 근로조건), 단체적 노사관계의 운영에 관한 사항(노동조합의 활동, 노동조합에 대한 편의제공, 단체교섭의 절차와 쟁의행위에 관한 절차 등에 관한 사항)으로서 사용자가 처분할 수 있는 사항은 단체교섭대상이 될 수 있다.(대법원 2003.12.26. 선고 2003두8906 판결 )


하지만 회사는, 노조가 요구한 교섭일을 연기해 달라고 요구했다. 검토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 정도의 시간까지 필요 없는 사항이었지만, 요구대로 일정을 연기해 주었다. 

연기가 되고 열린 상견례 자리에는 대표이사가 나오지 않았다. 인사담당 이사와 인사팀장만이 앉아 있었다. 대표이사는 출장을 갔다고 했다. 실무진끼리의 만남도 아닌 상견례 자리, 혹은 본교섭  자리에 대표이사가 나오지 않았다는 건 뭘 의미하는 걸까, 문기는 생각했다.  문기의 자존심에 상처를 내고 싶었던 게다. 무시하고 있다는 걸 시각적으로 극대화시키려고 한 것이다. 


노조 위원장인 문기에 대해서 사측 교섭위원들은 "김 기사가 노조위원장이야?" 라며 비아냥됐다. 

그냥 아랫사람 대하듯이 노조 위원장을 상대하고 있었다. 


인사팀장이 전화를 받고 있는 모양새로 봐서는 원청회사의 지시를 받고 있는 듯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단체교섭권을 사용자단체에 위임하겠다고 했다. 문기는 그제야 사측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조합원들이 지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조 내부의 갈등을 부추기고 있었다.  회사는 교묘하게 단체교섭을 회피하고 있었다.  


단체교섭을 제대로 할 의지가 없었다. 부당노동행위였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30조(교섭등의 원칙)]
 ①노동조합과 사용자 또는 사용자단체는 신의에 따라 성실히 교섭하고 단체협약을 체결하여야 하며 그 권한을 남용하여서는 아니된다.
②노동조합과 사용자 또는 사용자단체는 정당한 이유없이 교섭 또는 단체협약의 체결을 거부하거나 해태하여서는 아니된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81조(부당노동행위)] 
사용자는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행위(이하 "不當勞動行爲"라 한다)를 할 수 없다. 
3. 노동조합의 대표자 또는 노동조합으로부터 위임을 받은 자와의 단체협약체결 기타의 단체교섭을 정당한 이유없이 거부하거나 해태하는 행위


노동3권을 존중하지 않는 사용자에게 단체교섭이란, 그저 시장에서 물건값 가지고 흥정하는 게임에 불과했다.

 

노동자에겐 절박한 생존의 문제를  그저, 농담거리로 삼고 있었다.




조정제도


문기는 단체교섭 결렬을 선포했다. 사측의 의도를 파악한 이상, 단체교섭을 계속 진행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파업에 돌입할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런데, 노동법에서는 조정절차를 거쳐야지만, 쟁의행위를 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었다.(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45조 제2항 본문)

노동위원회에 조정을 신청했다. 


[노조법 제53조(조정의 개시)] 
① 노동위원회는 관계 당사자의 일방이 노동쟁의의 조정을 신청한 때에는 지체없이 조정을 개시하여야 하며 관계 당사자 쌍방은 이에 성실히 임하여야 한다.


그나마 노동위원회의 조정위원회에서는 기본급을 대폭 인상한 조정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사측이 수락할 리 만무했다.  조정은 실패했고, 노동위원회에서는 조정이 끝났음을 통보했다. 


파업전야


그다음 수순은 파업이었다. 파업의 기운이 사업장에 감돌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공감대가 조합원에게 형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측은 무슨 이유인지, 조용하게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문기는 빨간 조끼를 꺼내 입었다. 그리곤 '단결, 투쟁'이라는 머리띠를 질끈 묶었다. 예전에는 보기 싫었던 색깔이었고, 외치기 싫었던 구호였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최소한의 대우조차 받을 수 없는 공간에선 무어라도 입어야 했고,
인간을 물건처럼 소비하는 시간에선 무어라도 외쳐야 했다. 


문기는 자신이  입고 있는 빨간 조끼가 마치 수많은 노동자들의 피눈물처럼 느껴졌다. 


"동지 여러분, 우리에겐 빵도 필요하고 장미도 필요합니다. 장미꽃을 심기 전에 먼저 상하지 않은 빵을 요구했을 뿐입니다. 그저 삼시세끼 먹을 정도의 빵을 요구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사측은 거부했습니다. 우리에겐 가족과 함께 지낼 단 몇 시간의 시간조차 사치가 되어 버렸습니다. 동지 여러분, 우리는 대기업도 아닙니다. 그저 힘없는 비정규 노동자일 뿐입니다. 언론에서도 우리의 주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겁니다. 우리, 힘없는 약자들끼리 서로 보듬어 줍시다. 그리고 외칩시다. 뭉치면 할 수 있습니다. 눈물에 젖은 빵이라도 좋습니다. 우리 제대로 된 빵 한 번 먹어봅시다!"


문기의 목소리는 갈라졌다. 

조합원들은 함성을 지르며, 문기를 격려했다. 

바위처럼 이라는 노동가요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반대편 창가에선 대표이사가 팔짱을 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문기의 눈물처럼 서글픈 비가 내리고 있었다. 

파업전야였다. 


제17화. 끝.


브런치에 연재된 "소설로 읽는 사회생활과 노동법"을 엮어서 "당하지 않습니다(카멜북스)"라는 책을 발간했습니다. 책 발간의 기회를 주신 브런치 관계자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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