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반했다. 공구를 든 소녀에게

<범블비>를 보고

by Chaeyooe


로봇보다 소녀가 더 좋았다면 로보포비아(robophobia)로 의심받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내게 범블비보다 헤일리 스테인펠드가 연기한 찰리의 영화다. 작가 앙드레 지드는 내가 그녀에게 보내고 싶은 찬사를 일찍이 소설 「배덕자」에 썼다.


아아! 그는 얼마나 건강한가!
내가 그에게 반한 것은 이것이다. 건강이다.


MV5BMTg5NjAxMjg5MV5BMl5BanBnXkFtZTgwMTgwNzE5NjM@._V1_SY1000_CR0,0,1585,1000_AL_.jpg 출처 = IMDB <Bumblebee>


다행이다. 베이가 아니라서

<트랜스포머>의 프리퀄 <범블비>의 찰리는 그간 이 시리즈에 등장한 여성 주인공처럼 남성이 욕망하는 여성의 모습이 아니다. 여성 로커처럼 티셔츠와 재킷을 자유롭게 매치하는 찰리만의 스타일은 남성의 눈요깃감으로써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입었던 미카엘라(메가 폭스)와 칼리(조지 헌팅턴 휘틀리)의 그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무엇보다 찰리에게는 성장 서사가 있다. 영화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마에 난 뾰루지에 기분이 상하고 애틋했던 아버지의 죽음 이후 엄마가 새로 꾸린 가정에 합류하기를 주저하는 열여덟의 한 시절을 러닝타임 동안 살뜰히 풀어낸다.


<트랜스포머> 시리즈의 자장 안에서 찰리라는 건강한 여성 캐릭터가 기적적으로 탄생할 수 있었던 마이클 베이가 연출하지 않은 덕분이다. (이번 영화에서 그는 제작을 맡았다) 이 시리즈를 연출하며 메일 게이즈(male gaze=남성의 시선)란 무엇인지 널리 알린 그를 대신해 이번 영화의 메가폰을 쥔 사람은 그간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왔던 트래비스 나이트다. 여기에 여성 작가(크리스티나 호드슨)가 시나리오를 썼다는 점도 긍정적 변화의 요인 중 하나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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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IMDB (순서대로) <True Grit>, <The Edge of Seventeen>


다행이다. 스테인펠드여서

헤일리 스테인펠드에게 찰리 캐릭터를 맡긴 건 마이클 베이가 감독 자리를 선택하지 않은 것만큼이나 탁월했다. 그녀는 데뷔작인 <더 브레이브>(2010)의 매티처럼 아무리 힘들어도 어른 앞에서 울지 않으려고 어금니를 꽉 깨무는 씩씩함과 근작 <지랄발광 17세>(2016)의 네이든처럼 가만히 혼자 앉아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다음 일을 골몰하는 똘똘함을 이 영화에서도 모자람 없이 보여준다.


MV5BMTYzODU2MjQzNl5BMl5BanBnXkFtZTgwOTQwNzE5NjM@._V1_SX1777_CR0,0,1777,949_AL_.jpg 출처 = IMDB <Bumblebee>


이건 소녀들을 위한 서사

<범블비>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로서는 드물게 10대 여성 관객에게 힘이 될 만한 여성 주인공 서사를 펼친다. 찰리는 상실의 고통을 쇼핑과 수다 그리고 남자친구 찾기로 무화하지 않는다. 대신 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긴 차 밑으로 들어가 수리를 하면서 애도의 시간을 갖는다.


범블비와 메모(조지 렌드보그 주니어)는 결코 찰리의 보호자 또는 왕자가 되지 못한다. 애초부터 찰리가 보호자의 한쪽 다리를 붙잡고 몸을 숨기는 연약한 소녀가 아니고 왕자의 구조를 맥없이 기다리는 공주도 아니기 때문이다. 후반부에 찰리는 스스로 성장한다.


극 중에서 찰리는 과거 챔피언 경력이 있는 다이빙 선수였지만 현재는 선수 생활을 그만두었을 뿐만 아니라 다이빙 자체에 트라우마가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찰리의 훈련 과정을 지켜보던 아버지가 그때 심장마비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런 찰리가 섀터와 드롭킥과의 대결 이후 물속에 잠긴 범블비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높은 송전탑에서 다이빙한다.


출처 = IMDB <Bumblebee>


메모(조지 렌드보그 주니어)와의 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건 언제나 찰리다. 비눗방울 같은 로맨스에서 여기까지만 하고 선을 긋는 주도권자의 역할도 역시 찰리의 것이다. 메모 캐릭터는 보조석 자리에 앉아 운전 중인 찰리가 졸리지 않도록 말을 걸어주고 때때로 올바른 방향도 짚어주는 괜찮은 동행자 역할에 머무른다.


후반부에 찰리의 성공 서사가 펼쳐질 수 있었던 건 찰리가 모든 일을 해결한 그때서야 메모가 다시 등장한 덕분이다. 찰리가 디셉티콘에게 보내는 신호를 막고 범블비도 구하는 와중에 익숙한 듯 메모가 나타나 도왔다면 지금처럼 이 영화가 반짝거리지는 않았을 거다.




나는 소녀들이 부러워졌다. 그러니까 <겨울왕국>의 엘사와 <스타워즈:라스트 제다이>의 데이지 그리고 <범블비>의 찰리를 보며 자라는 중인 현재의 그들 말이다. 내가 어린 시절 보았던 것들에는 롤모델로 삼을 만한 여성 캐릭터가 부재했다. 대부분 왕자님 또는 남성 영웅의 서사였다. 그 속에서 여성들은 울거나 화장하며 그들의 선택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꼭 치마를 입은 채로 말이다.


시대는 바뀌었고 GIRLS CAN DO ANYTHING을 실천하는 여성 주인공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과 함께 10대 시절을 보낸 소녀들은 앞으로 어떤 어른이 될까. 적어도 나 같은 어른은 아닐 것이다.




[chaeyooe_cinema]

범블비 Bumblebee

감독 트래비스 나이트 Travis Knight



로봇보다 눈이 가는 공구를 든 소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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