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마블 영화를 보며 울다니

<캡틴 마블>을 보고

by Chaeyooe



<캡틴 마블>을 보러 간다는 내게 그 누구도 휴지 챙기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물론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다. <캡틴 마블>은 너무 웃어서 눈물이 났다는 쪽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리는 마블 영화였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시도 때도 없이 터지는 눈물을 맨손으로 훔쳤다. 영화 내내 통제 유니버스에 갇힌 채 어린 시절을 보낸 캐럴 댄버스와 내가 너무 애틋하고 가여웠다. 그래서 나는 상영관을 나오자마자 나는 간절히 이 말을, 외치고 싶었다.


왜 나는 살살 살아야 하지?
왜 그게 당연하지?
왜 나한테 그렇게 말해도 된다고 생각하지?
굴욕적이야.
「웨딩드레스 44」 (2018), 정세랑.


출처 = IMDb <CAPTAIN MARVEL>


시급한 건 인류가 아니라 나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2018)로부터 배턴을 넘겨받은 <캡틴 마블>은 어벤져스까지 포함해 우주 인구의 절반을 정리 중인 타노스의 과업을 알지 못한다. 이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딴소리하듯 1995년이기 때문이다. 캐롤 댄버스(브리 라슨)가 훗날 인류의 구원자 캡틴 마블이 될 상이라는 건 관객만 알뿐 극 중에서 그는 자신과의 악전고투로 바쁘다.


공동 연출자인 애나 보든은 인터뷰에서 수차례 <캡틴 마블>은 한 인간의 자아 발견(Self-Discovery)의 여정을 그린 영화라고 정의했다. 다시 말해 캐롤 댄버스가 슈퍼히어로로서 세상을 구하는 일은 적어도 이 영화에선 다음 문제다.


출처 = IMDb <CAPTAIN MARVEL>


캐롤 댄버스는 재능 있는 여성들의 합으로 만들어진 캐릭터다. 여성 감독 보든은 마블 코믹스 <캡틴 마블>의 여성 작가 켈리 수 디코닉(Kelly Sue DeConnick)의 유머와 투지 그리고 휴매니티에서 영감을 받아 캐롤의 퍼스낼리티를 형성했다고 밝혔다.


타이틀 롤을 맡은 브리 라슨은 전사의 얼굴을 타고났다. 오래전 나는 브리 라슨에게서 만반의 준비가 된 사람 특유의 긴장감과 자신감이 느껴진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캡틴 마블 복장을 갖춘 그를 보니 마블의 초대장이 제대로 갔음을 확신했다.


출처 = IMDb <CAPTAIN MARVEL>


그들은 자꾸 나를 시험하려 들지

군사기술이 발달한 크리족의 엘리트 부대 ‘스타포스’ 소속 전사 캐롤에겐 스스로 기억하는 과거가 없다. 남이 디자인해놓은 기억 속에서 폭죽처럼 터졌다 사라지는 형상은 공군 파일럿 복장을 한 여성들과 자꾸 실패하는 여자아이들이다.


‘나’라는 역사가 부재한 상황에서 캐롤은 외적 규제로 자신을 지탱한다. 캐롤이 신체 단련과 감정 컨트롤로 짜인 팀 리더 욘 로그(주드 로)의 하드 트레이닝을 저항 없이 수용하는 건 그 때문이다.


그러나 작전 중 홀로 C-53 미지 행성 지구로 떨어지게 된 캐롤은 나를 찾을 기회를 얻게 된다. 그는 이미 지구에 잠입한 스크럴족을 수습하는 공적 미션과 머릿속 여인 웬디 로슨 박사(아네트 베닝)를 추적해가며 기억 지도를 다시 그리는 사적 미션을 동시에 수행한다.


출처 = IMDb <CAPTAIN MARVEL>


그런데 이 과정에서 캐롤은 미션 수행과는 상관없는 테스트를 받는다. 옷차림은 굳이 지적과 훈계를 하기에 가장 손쉬운 대상이다. 쉴드 요원들은 캐롤의 첨단 슈트를 서바이벌 게임 복장, 쫄쫄이라고 비웃고 닉 퓨리(사무엘 L.잭슨)는 캐주얼한 옷으로 갈아입은 캐롤에게 가출 청소년 같다며 한마디 한다.


슈트 차림으로 스크럴과의 기차 격투 후 거리를 걷는 캐롤을 향한 시민의 시선은 불쾌하다. 그것에는 이상한 여자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여기에 욘 로그는 시종일관 통신과 대면을 넘나들며 자신이 캐롤보다 우위임을 드러내는 말을 내뱉고, 막판에는 힘을 증명해 보이라는 요구까지 한다.


캐롤을 온전한 인격체로 대하는 이는 뒤늦게 재회한 여성 동료 마리아 램보(러샤나 린치)와 그의 딸 모니카(아키라 아크바)뿐이다. 선망의 눈으로 자신을 따라다니는 모니카에게 캐롤 이모는 슈트 컬러를 결정하는 중대한 역할을 맡기는 걸로 보답한다.


출처 = IMDb <CAPTAIN MARVEL>


그 말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마침내 선명해져 자신의 머릿속을 스쳐가는 과거의 편린 중에서 캐롤은 자신의 손발을 묶었던 증거들을 수집한다. 레이싱 게임장에서, 야구장에서, 훈련장에서, 비행장에서 마치 형벌처럼 캐롤에게 쏟아지던 포기를 부르던 말들.


넌 나약해.
넌 할 수 없어.
넌 못 버텨.
이건 소꿉장난이 아니야.
여자는 안 어울려.


그것은 슈퍼히어로처럼 특별한 사람만이 반드시 이겨내야 하는 고난 중 하나가 아니다. 모든 여성은 ‘JUST A GIRL’로 통칭되는 그런 모욕적 언어를 심장에 꽂은 채로 성장한다. 슈퍼히어로는 내가 아니다. 그러나 캐롤 댄버스는 나다. 그걸 깨달은 나는 그때부터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흘렸다.


넘어지고 쓰러졌던 어린 캐롤들이 몸을 일으켜 세우고, 스스로 빛을 뿜고 환호성을 지르며 자유로이 공중을 유영하는 캡틴 마블을 보면서 나는 나에게 용서를 구했다. 스스로 선택지와 가능성을 줄였던 그리고 그게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내게.


출처 = IMDb <CAPTAIN MARVEL>


마지막 말은 캐롤 댄버스가 아닌 소녀 모니카에게 하고 싶다. 떠나는 캐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모니카의 얼굴에는 드레스와 요술봉에 집착하던 과거의 내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반드시 자유를 얻어야 한다는 것,
그래야 다른 사람과 함께하기 전에 나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여주인공은 언제나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자기 자신을 믿어야 한다는 것도 알려 주었다.
「여주인공이 되는 법」 (2018), 서맨사 엘리스.




[chaeyooe_cinema]

캡틴 마블 CAPTAIN MARVEL

감독 애나 보든 Anna Boden, 라이언 플렉 Ryan Fleck


세상을 구하기 이전에 나부터 구하기.
소녀들에게도 되고 싶은 슈퍼히어로가 생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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