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인 앤 글로리>를 보고
<페인 앤 글로리>의 살바도르 말로(안토니오 반데라스)를 나는 킥보드를 탄 할머니의 눈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 할머니는 윤성희의 단편 「어느 밤」(2018)의 주인공인데, 그는 자신을 구해준 고단한 청년에게 청년은 지금 ‘술래를 피해 얼음이 된 거라고’ 다정하게 위로한다. 내 눈에는 활동을 중단한 거장 영화감독인 살바도르가 얼음이 된 것처럼 보였다. 그런 그에게 나는 할머니의 말을 들려주고 싶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곧 누군가 땡 하고 외쳐줄 거라고.’
활동 중단 예술가의 현재 상태
살바도르가 수영장 물속에 미동 없이 잠겨 있는 첫 장면은 일종의 예술적 건강 진단서다. 살바도르의 등에 난 기다란 흉터를 천천히 타고 오른 카메라가 종착하는 곳은 죽은 듯이 숨을 참고 있는 그의 얼굴이다.
그는 아프다. 우울증은 4년 전 어머니의 죽음으로 더 심해졌고 2년 전에 등 수술을 받았지만 통증은 여전하다. 통증 관리 차원에서 시작한 마약은 중독 수준에 다다랐고 최근에는 물만 마셔도 목이 막혀 숨도 제대로 못 쉰다. 고통 속에서 그는 영화를 만들 수 없다. 예술가에게 고통은 창작의 원동력 아니냐는 반격은 그의 앞에서 무력하다. 살바도르가 다시 창작하는 순간은 고통만큼이나 강력한 사랑이 차올랐을 때다.
창작의 정령들이 찾아오다
당최 생각을 글로 옮기지 못하던 살바도르는 자신의 인생을 거쳐 간 배우 알베르토(에시어 엑센디아), 옛 애인 페데리코(레오나르도 스바라글리아), 엄마 하신타(페넬로페 크루즈/줄리에타 세라노), 벽돌공(세사르 빈센트)과의 관계를 차례로 재정립한 뒤 다시 쓰게 된다. 살바도르가 ‘다시 쓰기’에 이르는 과정은 신비롭게 느껴진다. 자발적이라기보다는 그가 어떠한 힘으로 다시 쓰기 시작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힘은 앞서 언급한 네 인물에게서 나오는데 이들은 분명 사람이지만 힘겨운 예술가에게 영감과 자극을 주기 위해 부러 찾아온 창작의 정령처럼도 보인다. 정령으로서 이들은 각자 살바도르를 직접 만나거나 그의 기억 속에 등장해 그의 마음을 다독이고 결국 그를 다시 쓸 수 있는 상태로 되돌려 놓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사랑이 가져다준 삶의 의지
이들 중 살바도르의 극적인 호전을 이끄는 인물은 페데리코와 벽돌공이다. 먼저 페데리코와의 직접적 만남은 살바도르에게 생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살바도르는 페데리코와 연인이었던 시절을 담은 공연 덕분에 그와 재회하게 되는데 그가 자신의 집을 방문하기 직전 헤로인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하지 않은 쪽을 선택한다.
진솔한 대화와 키스가 있었던 한여름 밤의 꿈이 끝나고 홀로 남은 살바도르가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은 책장 깊숙이 숨겨 두었던 마약을 꺼내 변기에 버리는 일이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살바도르는 에이전트인 메르세데스(노라 나바스)에게 연락해 진료 예약을 부탁하는 동시에 처방 약을 먹을 준비를 한다. 이때부터 의사 앞에서 나의 목표는 삶의 질 개선이라고 즉답하는 때까지의 살바도르는 눈이 부시다. 그런 그를 지켜보며 나는 무척 설레었는데 그 이유는 아무래도 사랑으로 사람이 살고 싶어진다는 낭만적 사실 때문이었다.
그림이 가져다준 예술혼
벽돌공과의 간접적인 만남은 살바도르에게 예술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미술관에서 보낸 유인물에 어릴 적 자신을 그린 수채화가 실린 것을 본 살바도르는 그 그림을 그리고 자신이 알파벳을 가르쳐주기도 한 벽돌공과의 과거를 회상한다. 이윽고 그는 미술관까지 찾아갔지만 벼룩시장에서 사들인 익명의 작품인터라 벽돌공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한 채 그림만 구매한다. 그러나 그림 뒤에 쓰인 도달하지 못한 편지를 이제야 읽음으로써 살바도르는 벽돌공이 글을 쓸 줄 알게 되었다는 점과 에두아르도란 그의 이름도 알게 된다.
이토록 강렬하고 운명적인 사건을 겪은 살바도르는 아마도 예술가로서 가만히 있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내내 뭐라도 남기고 싶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미술관 관계자에게 ‘자신이 예술가인지도 모를 익명의 예술가들’의 존재에 대해 들었을 때 머릿속에서 불꽃이 튀었는지도 모른다. 창작을 중단한 유명 예술가로서 그들에 대한 죄악감과 존경심을 느끼고 활동을 재개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들었을 수도 있다. 마지막 창작의 정령까지 만난 살바도르는 여전히 고통스럽지만 어느 때보다 사랑이 충만한 상태로 집필을 시작한다. 얼음 땡 놀이는 이제 끝났다.
[chaeyooe_cinema]
페인 앤 글로리 Dolor y gloria, Pain and Glory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 Pedro Almodóvar
일시 정지 상태의 예술가를 찾아와 준 창작의 정령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