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 특수반 운동회
나는 어릴 적부터 상상력이 풍부했다. 그래서 책을 읽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좋아하는 영락없이 문과인 사람으로 성장해 이렇게 글을 쓰게 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평생 이 상상력 때문에 눈앞의 현실과 머릿속 이상의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꼈고 괴로웠다. 결혼 후 한국에 살면서는 캐나다의 삶을 상상하고 부모님을 만나러 1년에 한 번씩 캐나다에 가면 남편과 살며 익숙해져 버린 한국을 그렸다. 그렇게 나는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고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도 모를 무언가를 더 꿈꾸며 살았다.
캐나다에서는 16살이면 운전대를 잡을 수 있음에도 번번이 도로주행 시험에서 떨어지던 운전감각이 없던 나는 버스와 스카이 트레인을 자주 탔었는데 그렇게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면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며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는 했다. 덜컹대는 버스에 몸을 실은 채 눈부신 카프리 섬의 바다를 내려다보며 일광욕을 즐기기도 하고 스카이 트레인이 위잉 소리를 내며 출발하는 순간 상상 속의 나는 번지르르한 사원증을 목에 걸고 대기업에 출근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거리 위에서 낭비하는 통학 시간을 공상하는 시간으로 나름 유용하게 쓰며 지루함을 달랬다.
*스카이 트레인: 지하철처럼 쓰이지만 지상 위 고가 선로를 달리는 캐나다의 전철
친정집에서 1시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대학교를 오가는 길엔 날 자극하는 소리가 너무 많아 신경이 곤두섰다. 예전에도 자주 언급했다시피 쉽게 감각적으로 과부하에 걸리는 나는 귀에 꽂은 이어폰을 뺄 수 없었다. 그렇게 현실의 모든 소음을 차단하고 머릿속 수많은 가능성만을 들여다보며 4년 동안 치열하게 공부했다. 하지만 아무리 공부를 해도 정확히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대학생 이후의 삶은 늘 내가 적힌 대로 따라 살던 학교 커리큘럼에 명시되어 있지 않았고 나의 인생에 대해 상의할 멘토라고 부를만한 사람 또한 전무했다. 그러니 나는 그저 경주마처럼 졸업이라는 골라인을 향해 달릴 뿐이었다. 그래서 청춘의 꽃이 될 법도 한 대학생활을 즐기기는커녕 매일 어둡고, 힘들고, 불안했다.
나는 하나의 독보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은 평범한 학생이었을 뿐이었고 나의 장점 및 단점은 jack of all trades인 것이었기에 뭣도 모르고 가장 평범하고 만만해 보이던 회사원이 되어야겠단 생각만 했다. 그렇게 나만의 삶을 어떻게 개척해야 할지 몰라 헤매는 만큼 나는 매일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상상의 세계로 도피 아닌 도피를 했다.
*jack of all trades: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어느 한 분야에서 최고로 잘하지도 않는 사람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고 오히려 고독을 즐기는 편인데도 대학을 졸업한 뒤 소속 되어있는 곳이 한순간에 증발해 버려 외롭고 무서웠다. 그 어떤 곳에도 속하지 않은 채로 어떻게 자기소개를 해야 할지 몰라서 옷가게 알바를 하면서도 무작정 꿈꿨던 법대에 진학하는 목표가 있다고 나를 한껏 포장해서 말하고는 했다. 그렇게 로스쿨을 꿈꾼다고 말하는 나와 피땀 어린 노력 없이 정체된 나의 모습의 괴리감으로 인해 심한 인지 부조화에 시달렸다. 계속 마음이 불편하니 자꾸만 여기저기가 아프고 편두통도 심해져서 잠을 청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미루고 미루다 큰 결심을 하듯 두꺼운 LSAT 교재 한 권을 샀다. 하지만 시큰둥하게 몇 문제를 풀다가도 책을 덮어버리고는 다시금 도피하듯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렇게 나는 나의 현실과 이상을 어떻게든 이어주길 바랐던 한 낯 희망인 그 연필을 끝끝내 놓아버렸다.
*인지 부조화: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 사이에 모순이 생겨 불편함을 느끼는 심리 상태
*LSAT: 미국과 캐나다 로스쿨 입학을 위한 표준화된 시험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만 갔고 나는 뚜렷하게 원하는 커리어도 없이 잠시 회사를 다니기도 하고 알바도 하다가 결혼을 하게 되었다. 무미건조했던 내 눈에서는 하트가 튀어나오고 온 세상이 장밋빛으로 물들었다. 그렇게 콩깍지가 씐 채로 신부입장을 하고 났더니 유부녀라는 그럴싸한 정체성이 생겨났다. 사회적 위치가 높지는 않아도 누구나 의심 없이 수긍해 주는 ‘주부’라는 타이틀이 생긴 것이다.
우리 부부는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한 만큼 아이 생각이 없었고 나중에는 아이를 원해도 생기지 않아 약 5년 정도의 긴 신혼을 가졌다. 그래서 나는 외벌이였던 남편을 나름대로 내조하며 평탄하게 살았지만 집에서 무료하거나 답답하지 않느냐는 얘기를 자주 들었고 나 또한 속으로는 이게 맞나 싶었다. 있는 그대로 나의 삶 자체에 만족하고 내가 누구인지, 어떤 것을 추구하며 사는 것인지에 대한 삶의 목표가 뚜렷했다면 이런 말에 흔들리지 않았겠지만 난 그렇지 못했다. 사실 나는 결혼 후에 '내조'라는 명분 아래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아 초조해지고는 했으니까 말이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며 깨 볶는 오붓한 시간이 좋기도 했지만 나라는 한 사람 자체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갈피를 못 잡은 채 정처 없이 헤매고 있었다.
대학시절 휴학, 인턴쉽, 유럽여행 등으로 다른 친구들은 간간히 학업을 쉬어 가기도 했지만 나는 학업과 알바를 병행하는 여유 없는 학생이었기에 하루빨리 졸업을 해 산떠미처럼 쌓인 학자금 대출을 싹 갚고 싶었다. 그래서 결혼 후에는 그렇게 턱 끝까지 숨이 차게 달리던 지난날의 나에게 포상휴가를 주듯 실컷 잠을 자보기도 하고 안정적으로 따박따박 월급을 받아오는 남편 덕에 유유자적 쇼핑도, 여행도 해보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그렇게 코로나 전 소위 '사모님' 소리도 듣고 편히 살아도 보았다. 하지만 내 몸뚱이 하나는 편했을지 언정 내면은 편안하지 않았고 설렁설렁 사는 하루하루가 내 옷이 아닌냥 불편했다. 늘 속 빈 강정 같았다. 어딜 가서 내밀 명함 하나 없는 것보다 창피했던 건 마땅한 꿈도, 삶의 목표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단 한 번도 현모양처를 꿈꿔본 적 없고 그 흔한 연애와도 거리가 멀었던 내가 20대에 덜컥 결혼을 해 밑반찬을 만드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이 사실이 소소한 즐거움으로 느껴지는 날보다는 한심하게 느껴지는 날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누군가에겐 꿈같은 생활 일지도 모르는 안락한 주부생활이 내게는 무능하다는 낙인 같았다.
이렇게 과거에는 돈도 시간도 여유롭지만 내면은 텅 비어있던 내가 이제는 n잡러 엄마로서 알차게 살아가고 있다. 말이 좋아 n잡러이지 아이의 주양육자로서 풀타임 근무를 하며 한 곳에 긴 시간을 할애할 수 없기에 번듯한 곳의 소속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고로 나는 넉넉한 수입을 벌지는 못하고 간간히 영어 레슨을 하며 푼돈정도를 쥐게 된다. 하지만 아이의 발달지연을 알고 난 뒤 몸과 마음은 기본값으로 장착해 올인했고 있는 돈 없는 돈 모두 아이에게 쏟아부었기에 이제는 아무리 쌈짓돈 버는 알바자리 하나라도 귀하다.
우리 로키가 안 받아본 수업이 없는 만큼 야금야금 쌓인 빚더미에 앉은 것이 우리 가족뿐이랴. 소위 얘기하는 자폐 스펙트럼 바닥에서 이 정도 빚은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특수교육 수업을 받는 센터에 다니다 보면 자주 마주치는 분들과 안면을 트고 속얘기를 하게 될 때가 있는 데 모두들 결국엔 경제적인 어려움을 털어놓고는 하니까 말이다. 로키가 센터수업을 받은 지도 어느새 햇수로 4년째이고 이제는 내 커피 한잔도, 운동화 한 켤레도 마음 편히 사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나는 결코 불행하지 않다. 예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퍽퍽해진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더 이상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으로 인해 고통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드디어 눈앞의 현실을 직시하고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충만하게 살아가고 있다.
여러 시련이 한꺼번에 겹치면서 남편은 예전처럼 넉넉히 벌지 못하고 우리 세 식구가 숨만 쉬어도 돈 나갈 구멍이 허다하다. 하지만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으며 나는 등 떠밀리듯 과거에는 상상만으로 그쳤던 일들을 하나하나씩 이뤄나가고 있다. 영어 선생님으로, 이렇게 글을 쓰는 사람으로 계속해서 도약하고 있다. 더 이상 예전처럼 28 청춘의 차기 어린 공상이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나의 삶의 목표와 자아가 뚜렷해졌기에 나는 이렇게 현실을 살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이제는 내 옷이 아닌 것 같이 불편했던 사모님 소리는커녕 오히려 빠듯한 생활비 걱정을 하기도 하지만 나는 확실하게 나의 인생을 살고 있다는 행복을 느낀다.
이렇게 단단해진 나임에도 긴장되고 두근대는 마음으로 아이의 유치원 특수반 운동회에 참석을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뜻밖에도 대학을 졸업 한 뒤 처음으로 진한 소속감과 유대감을 느꼈다. 강당에 모인 아이들의 모습은 말 그대로 스펙트럼의 빛깔처럼 각양각색이었지만 그곳에서는 모두 한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조금은 독특하지만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나의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 아이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 행복한 추억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 해 웃음소리가 넘실거렸다.
‘캥거루 달리기‘라고 하는 시합을 할 때에 빨래 바구니 같은 바구니에 두 다리를 넣고 콩콩 뛰어 멀찍이 세워져 있는 콘을 한 바퀴 돌아오느냐 사력을 다해 달렸다. 헉헉대며 뛰던 그때도 나는 오직 나를 지켜보는 로키를 위해 잘 해내고 싶은 생각뿐이었고 그 어떤 잡념이나 공상 따위는 낄 자리조차 없었다. 내 신조 자체가 로키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게 된 이후로 나의 인생은 오히려 괴리감 없이 간단명료 해졌다. 그저 로키를 위해 달리고, 로키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나의 전부가 되고 나니 인생이 참 가볍고 산뜻해졌다. 대학시절 이렇게 현실을 직시하며 심플하게 살 줄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가도 인생에는 지름길이 없으니 이렇게 돌고 돌아 내 자리를 찾은 거란 생각이 든다.
즐거웠던 특수반 운동회 이후에는 로키의 통합반 공개수업에 떨리는 마음으로 참석을 했다. 엄마가 되어 처음으로 참석하는 공개수업이 일반반 친구들과 특수반 소속인 우리 아이가 함께 생활하는 모습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해봤던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슬프거나 주눅 들지 않은 채 참 행복했고 친구들과 나란히 앉아있는 로키가 참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아직 말이 트이지 않은 우리 아이는 다른 아이들처럼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발표를 하지는 못했지만 그 외의 활동은 그럭저럭 잘 해내었다는 사실만으로 안도감이 밀려왔다. 함께 앉아야 할 때 앉고 일어서야 할 때 일어서며 엄마와 함께 하는 활동에 잘 참여하고 사진도 찍었다. 맨발로 뛰어다니고 혼자 벽을 보며 웃던 아이와 눈이라도 한번 더 맞추려고 고군분투했던 지난 시간들이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내가 반에 들어서니 날 반기고 행복하게 웃는 로키를 보면서 엄마로서 살아온 지난 시간이 단 한순간도 헛되지 않았음을 느꼈다.
이렇게 나는 로키 엄마라는 역할에 자부심을 갖고 진정한 소속감과 유대감을 경험하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이전에는 목표가 없는 삶을 살며 형체도 없는 무언가를 갈망하며 공허해했다면 이제는 분명한 삶의 방향을 가지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 없이 충만한 삶을 살고 있다. 오히려 느린 우리 아이로 인해 나의 삶의 의미가 명확해진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도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내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아는 행복을 느끼며 나의 삶을 채워나가고 있다. 아이 덕분에 삶의 진정한 의미와 행복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듯이 나 또한 계속해서 아이를 바르게 이끌어 주겠노라 다짐해 본다. 오늘도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아는 행복을 느끼며 지금 이 순간을 성실히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