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 스펙트럼 아이의 우산인 엄마
지난 3월부터 아이를 특수반에 보낸 건 내가 살면서 제일 잘 한 일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차분히 있을 때도 많지만 "뿌뿌뿌"라고 반복해서 소리를 내거나 갑자기 연달아 박수를 치는 등 그때그때 다른 상동행동을 하는 로키. 그리고 또래처럼 말이 트이지 않은 우리 아이가 정상발달 아이들 사이에서 겉돌거나 날 선 눈초리를 받을 걱정을 하며 어린이집을 보냈던 작년과 달리 이젠 아이를 특수반에 등원시킨 후 가벼운 마음으로 커피 한잔을 마실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최근엔 특수반의 2학기 개별화 회의가 있었다.
*상동행동: 목적 없이 반복되는 행동, 특정 의미나 기능 없이 같은 동작이나 말을 습관적으로 계속 반복하는 것
*개별화 회의: 특수반 개별화 회의는 특수학급 학생의 맞춤형 교육계획(IEP)을 만들고 조정하는 회의
매일 아이가 밝은 얼굴로 유치원을 다니고 있고 선생님들의 표정과 피드백도 좋지만 늘 아이의 대한 상담을 앞두고는 신경이 곤두서고는 한다. 언어수업도 받고 태권도도 다니고 중간중간 아이스크림을 사 먹기도 하며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와 매일 바쁘지만 즐거운 일상을 보내는 내가 안일했던 건 아닌지 더 신경 써주고 가르쳐줘야 했던 것들을 놓친 것은 아닌지 초조해진다.
하지만 이런 긴장감이 무색할 만큼 특수반 담임선생님도 통합반 담임선생님도 모두 로키가 1학기보다 더 성장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물론 아직도 로키는 원활하게 소통할 수 없지만 한 음절에서 두음절을 내뱉는 일이 늘었고 편식도 많이 줄었다고 말이다. 다른 친구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체조도 하고 강당에 가서 뛰어놀기도 하며 또래 사이에 스며들어 잘 지내고 있다고 하니 서서히 경직된 어깨가 풀려갔다. 예전에는 가끔 크게 돌고래 소리를 내서 주변을 화들짝 놀라게 하고 관심 있는 친구에게 너무 바짝 다가가 불편하게 했던 경우도 있었는데 이젠 그런 일도 없어졌다고 하니 마음이 꽤나 놓였다. 또한 모방도 늘었고 칠하기, 만들기 같은 모든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고 하니 성장한 아이가 참 기특했다. 무엇보다도 소수의 특수반에서만이 아닌 통합반에서도 편해졌는지 다양한 표정을 짓고 환하게 웃기도 한다는 점이 제일 좋았다.
청각, 미각, 시각 등 대체로 모든 감각이 예민한 로키는 집에서는 아무리 새로운 반찬을 권해도 "싫! 싫어!"라고 말하며 밀치고는 하는데 유치원에서는 취나물, 진미채, 키위, 쑥떡 등을 처음으로 시도하기도 하고 배가 아픈지 화장실 쪽으로 선생님의 손을 끌다가 "마려워"라고 얘기했다고도 한다.
의사소통에 대한 고민이 제일 큰 우리에게는 정말 너무나도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로키에게는 아직 "도와줘"라는 요구의 말 한마디조차 쉽지 않은데 최근에 알아서 "도와줘"라고 언어 선생님께 표현도 했었다. 그렇기에 나의 보수적인 예상보다 더 빨리 말이 트여가고 있다고 기대해 봐도 좋을 것 같다는 희망이 조금씩 싹트고 있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아야 실망 또한 하지 않는다는 건 으레 모두 아는 사실이고 내게는 로키를 키우며 큰 자기 방어 기제의 역할을 해왔는데 이제는 긴 문장으로 말하는 로키를 조심스레 더 상상해 보고 나와 대화를 나누는 로키를 조금 더 기대해 보기로 한다.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으니 아이의 꿈쩍 않던 돌 같은 혀도 이제 조금씩 움직일 거라 믿어본다.
최근 내향적인 내게 고맙게도 말을 걸어준 같은 특수반 아이의 엄마와 연락처를 교환하고 커피를 한잔 하기로 했다. 유치원을 오가며 그 엄마의 아이를 볼 때마다 말을 참 잘하는 그 아이는 어떻게 저렇게 말이 술술 트이게 됐는지가 참 궁금했다. '로키가 저렇게 말을 잘하면 소원이 없을 텐데 ‘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동경의 눈빛으로 바라보고는 했다. 하지만 언어소통에는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성이 자연스럽지 않아 걱정이 잔뜩인 그 엄마는 더 높은 곳을 올려다보며 종종 낙담하는 듯하다. 내게는 그 엄마와 아이가 사소한 대화를 나누는 그 모습 자체가 로망인데... 하지만 언젠가 우리가 그 자리에 서는 날이 온다면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욕심은 특히나 엄마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비가 오던 어느 날 아이와 나란히 우산을 쓰고 하원을 하던 길이였다. 아이는 내가 최근에 사준 투명우산이 마음에 드는지 머리 위 투명하게 내다보이는 풍경을 감상하기도 하고 깔깔 웃으며 우산 사이로 나와 눈을 마주치고 놀기도 했다. 그렇게 장난을 치다가도 이내 귀찮고 무거운 유치원 가방을 내게 휙 맡겨버리고 자기 우산을 들어달라는 듯 “엄마!!” 하고 내게 짜증을 내면 아닌 척 해도 사실 뭐든 해주고 싶은 엄마인 나는 마지못한 척 행복한 짐꾼이 되어 준다. 로키 머리 위에는 항상 엄마라는 우산이 있다.
둘이 함께 발을 맞춰 걸어가지만 엄마인 나만 짐을 잔뜩 든 채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들리는 작은 놀이터로 향한다. 그렇게 빗속에서도 해맑게 노는 아이에게 차가운 비 한 방울 떨어질까 졸졸 따라다니며 내가 아이의 우산이 되어주다가 깨달았다. 비단 우리뿐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 모두의 머리 위로 각자의 비가 내리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찰나의 순간 보게 되는 누군가의 쨍한 날도 사실 가뭄의 콩 나듯 뜬 햇살일 수 있고 내가 갑자기 쏟아지는 폭풍우에 휘청거릴 때도 누군가에겐 그저 부슬비로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정도의 차이일 뿐 우리는 누구나 나의 아이가 세상의 비를 맞지 않도록 기꺼이 내 한쪽 어깨가 다 젖는 줄도 모르고 우산을 내어주며 산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나의 불안감을 숨겨가지만 비가 오면 아이가 감기에 걸릴까 이글거리는 해가 뜨면 햇살이 너무 뜨겁진 않을까 걱정한다. 그게 만국공통 엄마의 마음일 것이다.
지난 3년 가까이 복용하던 우울증 약을 줄이고 줄여 어느새 단약을 코앞에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때때로 울컥하며 응어리 진 슬픔의 덩어리가 가슴에 얹혀 눈물이 왈칵 날 것 같을 때가 있다. 내가 다 지워버렸다고 모두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던 평범한 로키의 모습이 손을 쓸 세도 없이 신기루처럼 피어오르고 불현듯 로키가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아이들과 왁자지껄 어울려 노는 상상이 눈앞에 펼쳐진다. 까딱 하면 마치 약에라도 취한듯한 멍한 눈빛을 한 채로 그 환각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뻔하다가 고개를 휘휘 젓고는 비가 내리는 창밖을 내다본다. 거리 위 제각기 다른 형형 색깔의 우산을 쓰고 가는 사람들을 보며 마음을 다잡아 본다. 우리에게만 내리는 비가 아니라는 걸 우리만의 시련이 아니라는 걸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 깨닫고 있다.
우리 모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각자의 시련과 고민을 짊어진 채로 매일을 살아간다. 아이를 키우며 예상치도 못한 폭풍을 마주해 주저앉았다가도 나만을 바라보는 아이의 손을 다시 꽉 부여잡고 그저 묵묵히 나아간다.
캐나다의 광활한 록키산맥처럼 멋진 아이가 되라고 지어준 아이의 태명인 '로키'가 울퉁불퉁하다는 뜻의 rocky가 돼버려 우리가 가시밭 길을 걷게 된 건 아닐까 후회했던 날들을 지나 지금은 우리 로키덕에 참 러키(lucky)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억지긍정의 정신승리가 아니라 진심으로 로키 덕분에 삶과 사람을 바라보는 시야가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넓어지고 너그러워졌기 때문이다.
앞으로 또 어떤 시련이 닥칠지 또 어떤 운 좋은 일을 맞닥뜨리게 될지는 모르지만 오늘도 우리 세 식구는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우리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 사람 모두 고난 속에서도 행복을 찾는 여정을 걷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청천벽력 같던 아이의 자폐 스펙트럼 진단 이후 망망대해를 헤매던 우리 세 식구는 이제야 안정적인 일상의 궤도에 진입한 것 같다. 물론 갑작스러운 인생의 밀물, 썰물에 치이며 여전히 첨벙 거리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렇게 우리는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우리 로키와 그다지 평범하지도 그렇다고 비범하지도 않은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일상 속 때때로 기대하고 실망하고, 비교하고 부러워하기도 하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 새끼와 지지고 볶으며 꽤나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한 끗 차이일 뿐 아이를 키우며 누구나 자신의 내면 속 감정의 소용돌이에 괴로워하거나 어릴 적 상처를 마주하기도 한다. 오티즘 패밀리인 우리만의 성장통이 아니라 모두들 그렇게 부모가 되는 과정 속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어쩌면 따분해 보일지 모르는 일상의 쳇바퀴 속에서 고군분투 함으로 아이와 함께 한 뼘 더 자란다.
*오티즘 패밀리: Autism family, 자폐아를 키우는 가족
아이를 낳고 키운 지 어느새 햇수로 6년. 나는 분명 로키 덕분에 회복탄력성이 있는 단단한 어른이 되어가고 있고 어제보다는 좀 더 나은 나로 거듭나는 러키 한 엄마다. 로키로 인해 좌절 속에서도 꾸준히 성장하며 삶의 의미를 찾을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니 이것만으로도 아이는 내게 최고의 행운을 선사해 준 게 아닐까.
조금 달라도, 튀어도, 예민해도 아이의 존재 자체로 그리고 나 또한 나의 존재 자체로 그저 충분하다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게 해 준 것은 다름 아닌 내가 한때는 형벌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로키다. 순간 반짝하고 빛나고 사그라드는 행운에 비할 수 없는 진하고 깊은 행복을 아이를 통해 알게 되며 비로소 우리는 로키 한 가족이 되었다.
오늘의 글을 마지막으로 ”로키 한 우리“라는 제목으로 발행할 브런치 북 한 권을 완성했습니다. 공모전에도 참여할 예정인데 올해 안에 러키(lucky) 한 소식이 있을까요? 지금까지 저의 이야기를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새로운 글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P.S.: 저의 기존 이메일로 제안을 주신 분이 있는데 계정 용량 문제로 확인이 불가합니다. 이제는 유료 버전으로 용량을 늘려놓았으나 이미 놓친 이메일을 볼 방도가 없어서 너무 안타깝습니다. 죄송하지만 다른 계정인 crystalsjchung@gmail.com으로 다시 연락 주시면 바로 답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