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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덩기덕희덕 Feb 08. 2023

책장의 역사

지금-여기의 이야기 

책장을 비워냈다. 새로 산 책들이 바깥에 쌓여가는 꼴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장바구니에 담긴 책들을 빨리 데려오고 싶었다. 세 개의 책장에는 나름의 규칙에 의해 정리되어 있다. 두 책장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문이 달린 수납장을 책장으로 사용하는데 두꺼운 전공서적들과 제목만 봐도 어질한 심층심리도서는 보이지 않게 넣어놨다. 또 언젠가 보겠다며 엄선하여 구입한 소설, 에세이, 미학관련 책도 눈에 잘 띄지 않는 책장에 넣었다. 노출되어 있는 벽거치대 책장에는 최근 자주보고 있는 미술교육도서와 자주 꺼내보는 미술치료도서가 꽂혀있다. 


우선 각 책장에서 사놓고 한번도 보지 않는 책을 빼냈다. 영어에 대한 갈망으로 사놓은 독해, 어휘, 문법책은 이제 다른 주인에게 가라고 놓아주었다. 그리고 저자와 인연있는 책에도 손이 갔다. 선물로 받은 것과 내가 산 것 두권인 경우 저자의 싸인이 있는 책을 다시 꽂았다. 처음에는 모두 새책이었다. 오래 갖고 있던 책은 여러 곳을 옮겨 다니느라 곰팡이가 피었고, 수시로 들여다본 책은 손떼가 묻어 색이 바랬다. 시간과 장소, 상황은 책뿐만 아니라 마음도 달라지게 한다. 이제 떠나보낼 때가 된 것이다.


쇼핑백과 장바구니에 가득 책을 담아 알라딘 중고매장에 갔다. ‘책 사는 곳’ 선반에 책을 올려놓는 것만해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직원이 책 상태를 꼼꼼히 살피며 등급대로 구분할 때는 나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등급을 나눈 후 바코드를 찍으며 재판되고 것, 보유되어 있는 도서의 적정수를 초과한 것, 책 상태가 불량인 것을 확인해 판매자에게 돌려준다. 어떤 책이 띠릭~ 걸렸다. 그 순간 통쾌함이 올라왔다. 여기서도 ‘이건 제외야’ 하는 것 같았다. 


책에는 묵혀있던 감정, 변화된 생각, 열망 그리고 관계의 기억이 고스란히 묻어있었다. 책 하나하나에 내 삶이 연결되어 있다. 20-30대에 꽂혀있던 디자인과 마케팅 관련 서적은 40대를 넘어서면서 심리상담서적으로 바뀌었다. 번아웃이 오면서 몸의 영역으로 확장되었고, 재작년부터 미술교육관련 책으로 채워졌다. 관계에서 힘들어질 때마다 도움을 구했던 책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처럼 책장에는 나의 역사가 담겨있었다. 


책장을 통해 최근 14년간의 과정을 돌아보니 지금 새로운 역사를 구성하는 시기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대학원을 진학하면서 가장 많은 책을 구입했다. 나는 실제가 없는 마음에 관련된 일을 하다보니 의심이 먼저 들었다. 마음의 역동을 느끼고 , 변화와 성장의 효과를 증명해줄 만한 이론과 사례들이 필요했다. 책 속에서 비슷한 사례를 발견하고, 오랜 임상연구로 다듬어진 이론을 따름으로서 안정을 찾는 기분이었다. 지금은 불안했던 당시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책이 필요없어졌다. 그래도 여전히 도움이 되는 책은 기본에 충실한 개념서, 오래되었지만 탄탄하게 임상결과를 뒷받침해주는 이론서적이다. 


마음이 공허할 때 구입한 소설, 에세이 책이 눈에 들어온다. 일에 쫓겨 지내던 시기에는 소설, 에세이를 읽어보겠다고 사놓고 앞의 한두장 읽다 말았다. 마음 속에서는 ‘이거 읽을 대가 아냐.. 일해야지.. 관련서적을 더봐야지’라고 다그쳤다. 이런 상태가 될 정도로 일하다 보니 몸에서 신호가 왔다.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야할 때를 만난 것이다. 마음의 문제에서 몸의 문제로 이동하여 요가를 수련하고 전문가 과정을 가졌다. 코로나에 의해 일이 멈춰지게 되어 다시 미술을 시작했다. 그리고 미술치료와 교육을 병행하는 내가 되었다.  


바코드 찍히는 소리가 그쳤다. 알라딘 직원은 ’33,100원’이라고 기쁜 소식을 전했다. 현금으로 받아서 곧장 마트로 향했다. 지금 당장 필요한 마음 든든하게 해주는 식재료들을 구입했다. 아까 책을 담았던 장바구니에 식재료를 빵빵하게 채웠다. 마음의 양식을 정리하고, 몸의 양식으로 채우고나니 지금-여기에 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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