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자마자 외워지고야 마는 시가 있다.
내겐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가 그런 시 중의 하나였다.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외로움이 무엇인지 어슴푸레하기만 했을 어린 시절에 이 시를 만난 것 같은데, 크고 선명한 종소리를 처음 듣고 그 울림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외로우니까 사람'이라는 시 구절은 내 안에 깊이 남았다.
어려서부터 외떨어져 있는 시간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외로움이라는 감정에 대해 잘 모르고 자랐다. 집에는 늘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셨고, 나이 터울 3살이 지는 남동생이 있었다. 어린 시절 남동생과 나는 우리 동네 누나 1과 깍두기 1로 한 쌍이 되어 같이 놀고 같이 집으로 돌아왔다.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남동생을 깍두기로 두고 노는 일은 없어졌지만 주말이나 휴가는 가족, 친척들과 함께 보냈고 10대, 20대 때는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 교회에서 만난 사람들과 어울려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니 독립 전까지는 오히려 혼자 있는 시간이 간절하게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게 외로움, 혹은 그에서 파생되어 딸려오는 어떤 감정들을 느끼지 않고 산다고 생각했는데, 혼자 산 지 2년 여쯤 지난 어느 날, 불현듯 내 방에 깔린 텅 빈 고요를 의식하게 되었다. 지난 2년간 혼자 살고 있었음에도 처음 느껴본 것 같은 적막감, 피부에 와닿는 듯 절대적인 감각으로 느껴지는 고요는 예상치 못한 상태로 찾아온 다른 이름의 외로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두운 밤 퇴근을 하거나 누군가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 어둠 속에서 길게 이어진 차량의 불빛들과 가로수 불빛, 건물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만이 반짝이게 보일 때, 가끔 옆자리에 앉은 외로움이 가만히 내게 몸을 기댄 채 함께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 같다 느껴지곤 했는데 그럴 때면 정호승 시인의 시가 깊게 가라앉아 있다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잠수함처럼 천천히 마음에 떠올랐다.
그러면 나는 버스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길거리에 불이 꺼진 가게들을 바라보며, 혹은 내 앞에 손잡이를 지탱하고 서있는, 피곤한 버스 승객들의 얼굴들을 바라보며,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하고 속으로 맘에 떠오른 그 시를 천천히 읽어 내려가는 것이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산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좋아하는 구절을 천천히 음미하고 나면 희한하게도 쓸쓸함이나 서러움의 감정으로 번지기 쉬워 보였던 외로움은 조용하고 희미하게 그 자취를 감췄다.
외로움이 자취를 감추고 나면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는 길을 걸으며 아빠에게 전화를 건다. 아주 어린아이로 돌아간 듯 별일 아닌 것에 실컷 투정을 부려보고 전화를 끊는다. 오래 안부를 묻지 못했던 멀리 사는 친구에게, 친언니처럼 생각하는 언니에게, 아직도 연락을 하고 지내는 친했던 직장 동료에게 연락을 하기도 한다. 보름달 떠오르듯 내 맘 속에 떠오른 환한 얼굴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저녁 먹었어?’라고 묻는다.
요새 날씨가 추운데 몸은 괜찮아? 어디 아픈 데는 없고? 부모님은 잘 계시지? 응, 나도 잘 지내. 회사일은 좀 어때? 보고 싶다. 우리 다음 달엔 꼭 만나자.
이렇게 일상적인 대화로 전화를 끊고 나면 전구 하나를 켠 듯 마음의 방이 환해진다.
집에 도착해서는 가장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을 라디오처럼 틀어놓기도 한다. 그 앞에 앉아 화면을 보고 있지 않아도 친근한 목소리를 들으며 집 안 곳곳에 내려앉은 적막을 걷어낸다.
혼자 사는 사람도 많고, 혼자 사는 만큼 외로운 사람도 많고, 심지어 목숨이 끊어져도 오랜 시간 그 여부를 알아차리는 타인도 없을 만큼 고립된 사람도 많은 요즘, 시 한 구절과 주변 지인들의 따스한 목소리가 외로움을 잠재워주고, 외로이 떨어진 섬 같은 혼자는 아니라는 믿음을 갖게 해 준다.
그래서 혼자 사는 사람들에게 시를 선물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이걸 어떻게 현실적으로 실행할 수 있을까 고민 중이다.
당신 혼자만 외로운 것은 아닐 거라고, 둘셋이 모여 있어도 외로울 수도 있고 사람이란 외로운 거라고
혼자만 그런 것은 아니니 이 감정을 잘 넘겨보자고 시 같은 위로를 건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