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귀영화) 2.3 - 나의 캐릭터 찾기(2)
S군은 우리 연출과 동기 중 나랑 유일한 동갑 친구였다. 이 S군도 정말 캐릭터인데 (생각해 보니 우리 연출과 동기들 중 캐릭터가 아닌 사람이 없다. 다들 진짜 특이함) 나는 처음에 S군이 세상의 온갖 풍파와 고난을 다 겪으며 살아온 천애고아인 줄 알았다. 거칠게 잘린 듯한 빡빡머리, 매섭고 날카로운 눈매에 (패션을 모르는 내가 보기에) 공사(?) 점퍼 같은 옷을 입고, 그 주머니에 양손을 넣은 채 껌을 짝짝 씹던 모습이 기억난다. (첫인상은 아니다. 그냥 평소 이 친구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나의 아주 주관적인 이미지다.) 이제는 이 친구가 얼마나 웃기고 속이 여린지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당시 내가 느꼈던 그의 첫인상을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다. 지금 알고 있는 이 친구의 느낌을 말하자면… 감수성 풍부한 수다쟁이 아줌마 같달까. 하하하. (S야, 불만이면 너도 니 글 써)
하여튼 그때는 아직 만난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아 어떤 사람인지 파악도 되지 않은 채 시나리오를 쓰려하는데 자꾸 얘가 사라지는 것이다. 담배를 피우러 가는 건가 해서 기웃기웃거려도 잘 보이질 않고, 그래서 카톡을 보내 얼마나 썼나 물어보면 아직이랜다. 조바심이 났기도 했고, 정말로 뭔가 써야겠다 싶어 시놉이라도 끄적이면서 그때마다 S군에게 보여줬던 기억이 있다. 그러면 S군은 내 글에 대한 피드백을 해줬는데 당시 내가 약간 오컬트 미술이 필요한 시놉을 쓰자 S군이 이건 미술이 중요한데 우리는 그렇게 할 여력이 없다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왜 그때 기억이 나느냐? S군의 죽빵을 날려 버리고 싶었던 강력한 감정이 아직도 근육 어딘가에 남아있어 그런가 보다. ”얔! 니가써 인마!!! 발뺌은 내 전문이란 말이여!!!! “ 하고 외치고 싶었던 걸 꾹 가라앉혔었다. 시간은 째깍째깍 흘러가고, 동이 트면 시나리오가 나와야 해 초조함에 미치겠다 보니 진짜 뭐라도 써야 된다는 생각에 똥줄 타면서 자판을 두드렸다. G오빠 앞에서 발뺌할 때가 천국이었군 이를 어째 엉엉하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결국 당시에 시나리오는 그냥 내가 쓰고, 촬영 때는 내가 연기 디렉팅, S군은 촬영조명 연출을 하는 것으로 역할을 어찌저찌 나누었던 걸로 기억한다. 참 사람이 신기한 게 S군은 G오빠와는 다른 가르침을 나에게 주었는데, 그때 나는 S군이 촬영을 맡은 W군과 콘티 이야기를 하고(제대로 그릴 시간도 없어 대부분 회의로만 진행했지만) 카메라 움직임과 조명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는 것이 신기했다. 렌즈를 몇 미리로 바꾸자던가, 조명을 이렇게 저렇게 해보자고 하는 등의 얘기를 하고 있으니 (이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과 능력도 없던 내 입장에선) 얼마나 대단해 보였는지. 나중에 시간이 더 지나면서 알게 됐는데 나는 S군이 바로 ‘연출’이란 걸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내 생각일 뿐이지만). 이후 시나리오를 쓰고 있으면 가끔 연락이 와서 어딨냐고 물어본 후 S군은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수다를 떨다 가곤 했는데 시나리오를 보면서 ”이건 이렇게 딱! 커튼을 달아서 커튼을 날려주면서 한 컷 찍고, 이건 카메라를 이렇게 움직이면서 이렇게 찍음 되겠다 야~! “ 이러면서 어떤 식으로 찍을지 얘기를 했던 적이 있다. 그걸 들으며 나는 그의 창의적인 아이디어에 놀라고, 그가 말하는 (한 컷을 찍는) 수많은 촬영 방식에도 또 놀랐었다. 단 한 번도 이 친구에게 얘기를 한 적은 없지만 그때의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있다. 그 시작이 지금 생각해 보니 부츠캠프 때도 촬영 이야기를 하는 모습에서 보였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 함께 했던 촬영전공 W군은 나보다도 날씬한 몸매를 자랑했는데(나보다 날씬한 남자들이 왜 이리 세상에 많은지) 어떻게 그렇게 무거운 카메라와 조명을 들고도 빠릿빠릿하게 쏜살같이 움직여대나 신기해하며 진짜 날쌘돌이네… 하고 놀랐던 기억도 난다. 나중에 이 W군은 (나의 애걸복걸로) 내 졸업작품 촬영감독을 (어쩔 수 없이) 해주었는데 그때도 찍을 컷은 많은데 시간은 없고, 우왕좌왕했으나 정말 번개돌이(?)처럼 움직이며 자신의 촬영팀과 많은 훌륭한 컷들을 찍어내 주었다.
어쨌든, 그렇게 S군과 W군의 합작으로 잡힌 앵글들이 (내 눈에는) 정말 영화 같았다! 그래서 나는 배우들의 연기 디렉팅에만 집중할 수 있어 더 재밌기도 했다(고 디렉팅을 한 척 말하지만 사실 훌륭한 배우들이 연기도 다 알아서 해주셨다 으하하개꿀). 편집도 음악도 잘 못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한심한) 나 때문에 이 2차 워크샵 영상은 마감 시간까지 편집도 겨우 겨우 붙였다. 그러고 보니 촬영인 W군이 편집을 도맡아 했던 것 같은데..? 아마 촬영인 내가 왜 편집을 하고 있지? 했겠지… (미안함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는군..) 거기에 음악도 제대로 깔지 못하고 그냥 상영을 하게 됐던 기억이 있다(공포 영화인데 음악이 없다라…?)
당시 마지막 워크샵 작품 상영이었기 때문에 남양주 종합 촬영소에 가서 커다란 극장에서 1박 2일로 레크리에이션을 하면서 마지막에 상영을 했는데, 상영시간 내내 나는 끔찍한 공포 체험을 했다. 영화가 하나도 안 무서울 뿐 아니라 엔딩은 무슨 청바지 광고 같이 끝이 났는데 그런 영화를 공포 영화라고 상영을 하고 있으니 이 어찌 공포가 아니란 말인가!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장내에 깔려있던 차가운 공기는 진정한 공포였다.
상영이 끝나면 만든 사람들이 극장 앞에 나가 스크린 앞에 서서 피드백을 들어야 했다. 우리 조가 스크린 앞으로 나가는데 그 시간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내 망상이지만) 사람들의 시선 속에 한심함이 묻어 있는 것만 같았다. 스크린 앞에 서서 두 손을 공손히 모았다. 그런데 슬쩍 옆을 보니 배우분들 포함 조원들 모두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이렇게 미안할 수가. 그 와중에도 나는 머리를 안 깜아 모자를 쓰고 있어 다행이라는 이기적인 생각을 했다.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얼굴을 숨긴 채 이 쪽팔림을 견뎌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얼굴 보이게 모자 벗어” 원장님이 말하셨다. 아 넵. 그래야죠. 떡진 머리를 드러내니 더욱더 쪽팔렸다. 머리 때문에 쪽팔린 거지 이 작품이 엉망이라 쪽팔린 게 아니야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피드백이 시작되었다. 여러 이야기를 하셨을 텐데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그러나 딱 하나 기억나는 내용은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냐를 질문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 카메라 앞에 서 있어야만 하는 배우들의 공포감. 그리고 카메라 속에 배우들을 담아 놓으려는 감독의 욕망… 어쩌고 저쩌고 개소리 나불나불 그런데 최대한 안 개소리인척 해보지만 개소리인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그런 말들을 구구절절했다.
내 말을 다 듣고 연출과 교수님 중 한 분이 장편으로 할 만한 이야기다라고 코멘트를 하셨던 기억이 있다. 그 말이 기억나는 이유는 초긍정인간인 나는 그것을 칭찬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비록 이 여건에서 괜찮은 단편을 만드는 것은 실패였지만 그래도 나름 장편으로 할 만한 괜찮은 이야기라고 생각하신 것 같은데? (내 맘대로 생각) 아이템 자체는 재미있었다고 말하신 거 아니야? (내 맘대로 해석) 그래도 내가 장편 시나리오 할 만한 글을 쓸 줄 아는 거 아니야 이거? (내 맘대로 망상) 이거 이거 참(혼자 자뻑하며 행복해짐)’ 나는 (없던) 칭찬을 (억지로) 만들어서 기억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이런 초긍정 마인드가 아니었다면 폭발하는 열등감과 추락하는 자존감에 부츠캠프도 못 견뎠을 것 같기도 하다. 결국 생존본능이지 않았나 싶다. 이래서 사람이 어떤 때는 현실을 보는 것이 중요하지만 또 어떤 때는 콩깍지를 쓴 채 계속 무모하게, 나 잘났다~ 하고 걸어가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나는 사람이 워낙 단순해서 그게 때때로 가능했던 것이고 말이다. (참내, 체 아저씨의 명언이 정말 맞다니까!)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동기들로부터 또 많은 것을 배우면서 부츠캠프를 마쳤다(고맙게도 계속 배우기만 한다)
아카데미 수업이 드디어 시작됐다. 아카데미에는 여러 수업들이 있다. 기본적으로 연출과 교수님들이 진행하시는 수업도 있고, 외부 강사분을 모시고 하는 수업, 일회성 특강들도 있다. 학교에서는 최대한 좋은 퀄리티의,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수업들을 제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그러나… ‘아무 수업도 없는 것이 나를 제일 도와주는 것이다’는 생각을 하는 ‘나잘남유형’의 학생들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나는 아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작품을 만들 시간이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영화 연출이라는 것이 과연 수업으로 배울 수 있는 부분인가? 에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건 좋은 의문이다. 연출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누군가 누구에게 지식처럼 전달해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생각해 보아야 할 포인트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배움에 목말라 있었고 영화를 만드는 것에 대해 끝없이 이야기하고, 질문할 수 있는 선생님들이 계시다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수업은 (이전 글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역시나 정성일 평론가님의 수업이었다. 이 수업은 평론가님이 정해주시는 영화를 보고, 그 영화에 대한 (과제로 나온 주제에 맞는) 글을 써서 제출해야 하는 수업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주제가 있었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을 보고, 세 인물 중 하나의 인물을 선택해서, 또는 한 씬, 한 시퀀스를 선택해서 이창동 영화의 도덕에 대해 논하라.”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때 써야 하는 글의 길이가 200자 원고지 50매 정도, A4로 한다면 7-8장 정도 되는 분량을 써야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 문단을 띄지 않고…! 도대체 왜 문단을 띄지 못하게 하는 거지!? 뭐 이런 이상한 규칙이 다 있어?라고 생각하며 나는 이 이상한 룰에 반항하고 싶었으나… 그냥 따르기로 했다. 문단을 띄려면 특수부호(네모)를 문장 뒤에 붙여야 했다. (당시 제출한 글을 첨부한다)
어쨌든 그 꽉 채운 8장 정도 분량의 글을 매주 써야 하는 것은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나조차 아주 심각하게 고통스러웠다. 오늘은 또 이 칸을 어떻게 다 채우나 하면서 시작에는 농담 던지기를 하고 있기도 했다(피드백에서 혼난 후 그것조차 할 수 없게 됐지만). 그런데 신기한 게 어쨌든 칸을 채워야 하다 보니 고민을 하고 또 하면서 꾸역꾸역 글을 쓰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생각이 활발해지고 재미가 붙으면서 와다다다 글을 쓰는 재미가 있었다는 것이다. 첫 수업 때 정성일 평론가님은 ‘이 정도의 분량이어야 깊이 있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 생각들을 적게 된다’고 말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 말이 정말 맞았다. 이 길이는 속 빈 강정 같은 말만 한다면 절대로 다 채울 수 없는 분량인 것이다.
이렇게 쓴 동기들의 글은 매주 묶여 (왜 때문인지) 미국에 계시는 이 선생님께 보내졌는데, 글을 제출하고 나면 나는 어떤 점수를 받을까, 어떤 피드백을 받을까도 기다려지고 재미있었다. 이 선생님은 문장 AB, 내용 AB 이런 식으로 총점에 점수를 적어 주셨고, 가끔 마음에 드는 문장에는 코멘트를 해놓기도 하고, 비문에는 가차 없이 줄을 좍 그어 놓기도 하셨다. 사실 어떤 분 인지도 잘 모르지만 이분이 어떤 날은 가독성이 좋았다는 멘트를 적어 놓으시거나 하면 혼자 으쓱으쓱했다. 어떤 때는 자만심에 쩔어서 가깝게 지내던 동기인 J오빠와 경쟁을 하기도 했다. “나 이번 글 진짜 잘 썼어~” “헹~ 웃기네. 나도 잘 썼는데?” “내가 더 잘 받았을걸?” “야, 나 문창과야~” 나는 사실 동기들의 글을 다 읽고 싶었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이런 식으로 분석했는데 다른 동기들은 어떻게 분석했을까가 궁금했다(나는 남에게 관심이 많다). 그래서 사실 다른 동기들 글도 서로 읽어보고 배우고 싶다고 건의를 하기도 했는데 공식적으로 공유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처럼 자뻑하는(?) J오빠와 바꿔보기도 했다. 흠. 잘 썼더라. 아주. 문창과라 그런가.
정성일 평론가님은 (아는 사람들은 이미 다 알겠지만) 영화에 대한 열정이 어마어마하시다. 그냥 걸음걸이만 봐도 그게 느껴진다. 평론가님이 발 하나를 내딛을 때마다 누군가가 영화! 영화! 좋은 영화! 하고 어딘가에서 외치고 있는 것 같다. 그 정도로 평론가님은 머릿속에 영화 밖에 없는 사람 같아 보였다(영화 이야기할 때만 평론가님을 본 나의 의견일 뿐이지만). 그날그날 수업 때마다 가져오시는 주제 영화에 대한 분석과 해석을 이야기하고 계시면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한 컷을, 한 시퀀스를 생생하게 기억하시지? 하는 의문부터 어떻게 저 조그만 하나에서 저런 의미를 찾아내시지? 싶어 정말 감탄에 감탄을 해댔다. 영화를 보고 나면 수업 때까지 기대가 됐다. 오늘은 또 어떤 해석을 하실까. 어떤 의미를 찾아내서 이야기해 주실까.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나도 똑같은 영화를 봤는데 나는 마치 무뇌충처럼 본 것 같군 그럼 뭐 어때. 얘기 듣는 것만도 너무 재밌다 이히히! 하면서 수업을 들었다.
이렇게나 재미있고 의미 있고 돈을 내고 참여하라 해도 두 손 두 발 들고 환영하며 들을 법한 수업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한계가 느껴져 수업을 듣는 것이 너무 힘들었던 때도 많았다. 아주 아주. 왜냐면 이 수업만 듣는 게 아니라 여러 다른 수업들도 들어야 했고, 그 와중에 시나리오도 쓰고, 촬영도 하고, 동기들 촬영까지 도와주며 그 모든 것을 다 함께 해야 했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잠잘 시간도 없는데 8장 꽉꽉 채운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해 보면 이건 고문이 따로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아직도 기억이 생생히 난다. 동기 촬영을 도와주러 나가서 밤샘 촬영을 하고 아침까지 촬영이 이어졌는데 그날 오후가 바로 정성일 평론가님 수업날이었다. 그래서 촬영팀이 카메라 세팅을 하는 동안 다 같이 도로 한쪽에 쪼르르 앉아 노트북을 열고 과제를 했었다. 그렇게 과제를 제출해야지만 수업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출을 못한 사람은 쫓겨났다. 아주 단호한 표정과 제스처를 하시며 평론가님이 한쪽 팔을 꼿꼿이 펴고 문을 가리켰다. “다 쓰고 들어오십쇼!” 라고 외치시면서. 그러면 짬 내서라도 과제를 제출해서 다행이다…. 하고 안심하면서 아 그런데 뭐가 이렇게 무겁지 아이구 내 눈꺼풀이네 안돼 졸면 안 되는데 너무 소중한 이야기들이 지금 흘러가고 세상이 어두워지는데이게뭐지음냐음냐 하면서 정신줄을 반쯤 놓고 수업을 들었던 적도 꽤나 많다. 이렇게 좋은 수업을 제정신으로 못 듣는 나를 자책하고 한탄하면서.
정성일 평론가님의 수업에 대해서는 여러 기억들이 있지만 가장 강렬한 기억은 첫 만남 때의 일이다. 당시 우리가 수업 거부를 하는 바람에 부산에 첫 수업을 하러 내려오신 정성일 평론가님과 수업 대신 대화의 시간(?)을 갖게 되었는데, 그때 평론가님은 아카데미에서 영화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지에 대해서 아주 소중한 조언을 해주셨었다 (혼자 내 돈 들여 만든 단편은 맘에 안 들면 쓰레기통에 버려 버려도 되지만 아카데미에서 만든 것은 내가 원한다 해도 파기할 수 없고, 평생의 주홍글씨가 되어 올레 TV에서 방영이 될 수도 있고(헉!), 평생을 우리를 따라다니며 돌고 돌게 될 것이라는 정말 공포스러운 조언이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래서 이 예술 창작의 기회를 소중히 여기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만들어야 한다는 것과, 영화가 얼마나 훌륭한 예술인지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는 점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아카데미에 들어온 후 연출과 교수님과의 첫 면담에서 이상한 꽁지머리 교수님께 혼났던 것이 바로 “네가 예술가인줄 알아? 영화는 예술이 아니야. 예술을 하려면 다른 걸 해” 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성일 평론가님은 영화를 예술이라고 하시며 우리를 예술가로서 존중한다고 말씀하시니… 혼란스럽지 않을 수가 있나. 첫 만남이 끝나고, 평론가님이 질문이 있냐고 물으셨는데 나는 질문이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그러나 아직 동기들과도 낯설고 나서는 사람처럼 보이기 싫어 찌질하게 가만히 있다가 평론가님이 교실 밖을 나가시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걸 여쭤보지 않으면 엄청 후회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얼른 뒤따라 나가 복도에서 평론가님을 붙잡았다. 그리고 여쭤봤다.
나: 영화가 정말 예술인가요?
정: 예술이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나: 저는 예술이라고 생각했는데… 꽁지머리 교수님이 영화는 예술이 아니라고 예술하려면 딴 거 하라고 하셔가지고…
정: (꽁지머리 교수님을 당연히 아신다) 아~ (매서운 눈빛이 잠깐 스쳤다)
이후 평론가님이 해주신 말씀을 나는 지금까지 잊지 못한다. 적어 놓았기에 가끔 다시 읽어보기도 한다. (당시 대화에 대한 제 맘대로의 해석도 많이 들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게 맞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영화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기 때문이죠.
지금은 영화라는 것이 옛날에 비해 상당히 바뀐 부분들이 많습니다.
(톤이 높아지며) 저는 명량이나 신과 함께 같은 영화에 분노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영화를 예술로 보고 있고
예술이라고 믿기로 했습니다.
당신도 앞으로 영화를 하다 보면 느끼겠지만,
당신의 가치관에 어긋나는 일들을 해야 되는 때도 있고,
그러다 보면 나라는 사람이 변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더라도 변함없이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
바로 내가 믿는 영화에 대한 가치관인 것이죠.
그게 있다면 내가 어떻게 변하든, 어떤 혼란이 오든 나를 지키면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겁니다.
평론가님의 훌륭한 말씀에 나는 이렇게 또 여쭤봤다. “그런데 문제는 돈이 없으면 영화를 못 찍잖아요. “ 하하하하하. 과거의 나야 왜 이랬니 하하하흑흑흑. 나는 평론가님의 말씀이 너무 좋고 맞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너무 이상적이고, 현실적이지 않게 느껴졌다. 그래서 현실을 여쭤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쯤 되면 나 같은 허접나부랭이의 질문에 대충 답하고 집에 가야 한다며 등을 돌리는 게 당연한 일인데 평론가님은 끝까지 진지하게 대화를 해주셨다. 그 돈이 없어서 느끼는 사회에 대한 분노, 시스템에 대한 답답함, 슬픔, 누군가에게 대한 감정 같은 것들을 다 좋은 영화를 만드는 요인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아카데미에서 단편을 세 편 찍고 장편도 한 편 찍은 지금, 나는 과연 영화에 대한 나만의 가치관을 가지게 됐는가 자문해 본다. 미안하지만(?) 모르겠다. 어떻게 이 나이 먹고도, 아직까지도 모르겠지? 영화는 예술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도 답을 하지 못하겠지만 그에 앞서 심지어 ‘영화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도 답을 못 하겠다. 도대체 오늘날 영화라는 건 뭘까? 코로나 시대를 지나고, 극장과 영화산업이 죽으면서 더욱더 미궁에 빠져있다. 그러나 이거 하나만큼은 이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아직 예술은 하지 못했다. 그 사실을 나는 실습작, 졸업작품을 만들며 점점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