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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막) 한국영화아카데미(6)

(안부귀영화) 2.3 - 지팡이소녀(1)

by 초별


졸업작품 시나리오를 써야 했다. 정성일 평론가님이 수업 때 하셨던 말이 계속 맴돌았다. “아카데미 졸업작품은 여러분의 감독 인생에 평생 따라다니게 될 주홍글씨입니다. 절대 폐기할 수 없으니 무조건 잘 만드십시오. 무조건.” 그렇다. 말이 졸업작품이지, 실체(?)는 주홍글씨인 것이다. 무조건 잘 만들어야 한다. 무조건.


첫 실습작을 찍고 나는 미스터리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두 번째 실습작(글로는 쓰지 않았지만 동기와 공동 연출 한 단편영화가 있다)을 찍고 나서는 CG가 들어간 스피디한 영화 또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역량을 벗어난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무엇을 잘하는가. 무엇을 써야 하나에 대한 고민이 다시 시작됐다. 또다시 동기들의 글을 살펴봤다.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거의 매주 한편씩 졸작 시나리오를 써서 내야 했고 동기들 것을 다 읽고 피드백을 계속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 건물 3층 복도 제일 끝 방이 기억난다. 당시 아카데미는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비어있던 방들이 꽤 있었는데 저녁을 먹고 해 질 무렵 그 방에 들어가서 저 멀리 바다가 보이는 쪽 창문 앞에 책상을 가져다 놓고 앉았다. 그리고 해가 뜰 때까지 밤을 새우면서 글을 썼다. 나는 원래 초아침형 인간이다(초가 붙어야 한다. 완전 진짜 아침형이기 때문). 아침에 눈을 뜨면 1초 만에 머리가 쌩쌩 돌아가고, 뭘 하든 힘이 난다. 그렇게 오전 시간에는 다른 때 하는 정도의 3배 효율을 내면서 작업을 할 수 있다. 집중력도 어마어마하다. 그런데 점심을 먹고 나면 집중력이 확 떨어지고 일도 잘 안 되다가 저녁이 가까워지면 아예 머리가 굳는다. 이렇게나 생체리듬이 확실한 나였지만 참 웃긴 게, 30여 년을 살아오면서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습작을 찍으며 더욱 확실히 내 스타일을 알게 되었다. 공동연출을 한 G 오빠, 그리고 촬영감독 H군은 나와 정반대였기 때문이다(역시 비교대상이 있어야 나를 알게 되는 것은 진리..) 당시에는 회의를 하다가 길어지면 밤까지 회의를 계속했는데 나는 정말 9시만 넘어가면 머리가 굳어서 어떤 아이디어도 안 나왔다. 심지어 졸고 있었던 적도 꽤나 있다. 그러면 H군이 어처구니없어하면서 “누나! 정신 차려! 지금 잠이 와?” 하면서 구박을 했는데 구박하든 말든 내 눈은 감겼다. 나는 사실 불만이었다. 아니 조금만 자고 새벽 3시에 일어나서 회의하면 안 되나? 왜 맨날 밤까지 이어서 해야 하는 거야? 결국 나는 회의 중에 잠깐 자고 온다며 교실을 나왔던 적도 있다(얼마나 어처구니없었을까).


여튼 그렇게 나의 성향을 깨닫고 보니 나는 밤을 새우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밤을 새야 했다. 왜냐? 데드라인까지 글이 안 나왔으니까! 매주 시나리오를 제출해야 했는데 아무리 이리저리 고민해도 아직 시나리오를 쓸 때가 아닌 것 같아 시놉을 다시 쓰고, 트릿을 쓰고를 반복했었다. 그냥 일단 쓰지 왜 시나리오까지는 안 쓰느냐? 주홍글씨니까! 주홍글씨의 압박은 어마어마했다. 하루는 “그래. 이거야. 이 아이템으로 해보겠어!” 하고 글을 쓰는데 다음날이 되면 “이거 아닌데? 칸에 가기는커녕 진짜 주홍글씨가 되겠다 안돼 다시 해보자.” 싶어진다. 그렇게 쓰다가 엎고, 쓰다가 엎고를 반복하다 보면 며칠이 훌쩍 가는 것이다. ‘와 이젠 진짜 시나리오 시작해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면서 손톱을 깨물며 초조함에 글을 쓰려해도,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들 투성인데 무슨 글을 쓰냔 말이다. 그렇게 또다시 캐릭터 설정을 하고, 뒤집어엎고를 반복하다 보면 제출일, 데드라인 날짜가 바로 다음날로 다가온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방법은 하나다.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처박혀서 이제는 그냥 12시간, 10시간 만에 와다다다 아무거나 쓰는 수밖에. 이래서 아카데미 들어오기 전에 아이템을 많이 가지고 있고, 심지어 졸작 시나리오도 가지고 들어오는 게 좋다는 거구나를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나 후회할 시간조차 없었다. 정말로 이제 해뜨기 전까지, 아무것도 안 정해졌어도,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라도 미친 듯이 써야 했다. “손가락아 움직여라. 하얀 종이야 채워져라. 뭐라도 좋다. 해야 너는 아직 뜨지 마.” 하면서 와다다다 글을 써댔다. 정말 데드라인이란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마법이다. 일주일을 못 쓰다가 그 밤 사이에 시나리오 하나가 써지는 것을 보면! 그런데 참으로 다행인 것은 30분 길이의 단편이었기에 20장 정도의 글만 쓰면 됐다는 것이다. 그 정도면 나의 젊음과 생명을 갈아 넣기만 하면 밤 사이 쓸 수 있는 분량이었다(땡스갓입니다).


그렇게 쓴 첫 번째 이야기는 소시오패스 이야기였다. 근미래, 인공지능의 발달과 함께 인간들은 감정을 점점 잃게 되는데, 소시오패스 판정을 받은 주인공이 인간성을 되찾기 위해 사랑에 빠지려고 노력하는 이야기다. 최근 다시 자료들을 뒤적이다가 오랜만에 읽어봤는데 시리즈로 쓰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아이템 저장소에 넣어 놓았다(흐흐개이득). 이 이야기는 시나리오를 완성하진 못했고 처음에 시작은 했는데 시간은 없고, 이야기는 많은데 산으로 가고 있다 보니 점점 <#12. 이러 이렇게 될 예정.> 이런 식으로 막힌 부분은 트릿처럼 써서 겨우 제출했다. 교수님들께 다 완성되지 않은 채 제출했다고 엄청 혼났고, 그다음으로 혼난 건 도대체 아카데미 예산에 근미래 배경 영화를 어떻게 찍을 거냐는 부분이었다. 영화 Her 처럼 한정된 공간에서 최대한 아이디어를 내서 해볼 수 있다고 말씀드렸던 기억이 나는데 지금 생각해도 웃기다. Her? 허허허허허!


그렇게 모두에게 혼나고(맨날 혼나는 삶) 교수님들 각자와 멘토링을 하는데 참 아카데미 교수님들은 감사한 게, 너무 성심 성의껏, 자신의 온 에너지를 다 써가며 멘토링을 해주셨다는 거다. 그때를 생각하니 갑자기 죄송스러운 교수님이 떠오르는데 바로 B 감독님이다. 처음 이 감독님을 뵀을 때 귀여운 강아지 같다고 생각했고 순수한 사람이셨다(사실 아카데미 감독님들 중 안 순수한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영화를 하려면 다들 어느 정도는 순수함이 있어야 하는 것 같기도..?) 광안리 스벅에서 멘토링을 하기로 했는데 그날은 크리틱에서 엄청 까이고 난 다음날이었다. 크리틱을 하면서는 교수님들 앞에서 당당한 척, 자신 있는 척, 센 척하고 있지만 마음은 백만스물두대쯤 맞은 사람처럼 너덜너덜해진다. 그래서 오늘 멘토링에서는 또 얼마나 맞을까 걱정하며 가서 패잔병처럼 앉아있었다. 그런데 B 감독님이 나를 보더니 정말 진지하게 물어보셨다. “너 진짜 이걸로 졸작 하고 싶어?” “네. 전 이 이야기가 재미있어요.” B 감독님은 나를 뚫어져라 보시더니 하얀 종이를 펼치고는 메모를 시작하셨다. 자. 해보자. 근미래를 어떤 아이디어들로 구현할 수 있을지. 그렇게 약 세시간여를 온갖 아이디어들을 짜내며 B 감독님은 이 시나리오가 마치 자기 시나리오인 것처럼 이런저런 설정을 어떻게 바꿔야 효율적으로 촬영이 가능할지 같은 꿀팁들을 이야기해 주셨다. 하 이렇게 감사할 수가… 즐겁게 이야기를 마치고, 희망에 부풀어 다시 잘 써봐야지! 결심하며 멘토링을 끝냈다. 그리고 그다음 주, 완전히 새로운 아이템으로 쓴 시나리오를 제출했다. 나란 놈의 배은망덕한 학생자식.




온갖 우여곡절과 시행착오를 거쳐 겨우 아이템을 결정했다. 드디어 결정됐다! 하고 좋아해 보려고 했는데 좋아하기는커녕, 본격적인 문제쓰나미가 덮쳐 왔다. 가장 힘들었던 부분 중 하나는 주인공의 결핍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야기에 꼭 있어야 하는 요소가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주인공의 결핍이다. 주인공은 늘 결핍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동기들의 글을 봐도 항상 주인공들이 어떤 (가족, 사랑, 관계, 열등감, 질투, 욕망 같은 종류의) 결핍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아무리 고민해도 내가 설정한 결핍이 너무 작위적이고 뻔하고, 무엇보다도 얕은 것이었다. 왜 그런 일이 발생하느냐? 작가인 나조차 잘 모르는 결핍이었으니까. 그 결핍이 구체적일수록 생생하게 현실감 있게 표현될 수 있기 때문에 아마 초보 작가들은 자신이 느꼈던, 경험한 결핍을 소재로, 캐릭터의 성격으로 사용하지 않을까 싶다. 이 결핍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입학 과제 중 하나가 <나의 결핍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 보고, 그에 맞는 책을 세권 읽고 독후감 써오기>였던 기억이 난다.


이 결핍이라는 것은 대부분 그동안 겪어 온 아픔과 연결이 되어 있었다. 동기들이랑 이야기를 하다 보면 다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결핍에 대한 내밀한 이야기들이 나오기도 했다. 가족 관계 속에서, 사랑에서의 경험을 통해서, 학교나 어떤 커뮤니티 안에서의 경험도 있었다. 그런 것들을 듣고 있으면 나는 내 삶에 어떤 힘든 시기, 경험이 있었지? 하고 과거를 돌아보곤 했는데… 왜 나는 떠오르는 게 없지? 하는 말도 안 되는 결론에 항상 도달하는 것이었다. 아니, 결핍이 없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어? 나조차도 어처구니없었다. 나는 힘든 시기가 없었나? 내가 뭐 그렇게 부잣집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내가 뭐 항상 공주님 대접받으며 자라온 것도 아니고, 평범하게 제주도 바다에서 개들이랑 수영하고 유채꽃 꺾어 꿀꿀이 죽 만들면서 식당 놀이 하고, 부모님이 아이스크림 한 개 사주시면 언니들이랑 나눠 먹으면서 한 입이라도 더 먹으려고 초스피드로 씹어 삼키고… 그렇게 자란 것뿐인데… 나는 왜 결핍이 없지? 진짜 결핍 없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나? 이 고민은 갈수록 심각해져서 1 쿼터가 끝나고 집에 잠깐 쉬러 왔을 때 나는 가족들에게 이렇게 외치게 된다.


왜 저를 세상 평탄하게 키우셨나요! 나도 불화 좀 경험해 보고,
아픔도 겪어 보고, 외로움도 느껴보고, 슬퍼서 엉엉 울기도 하고,
그렇게 결핍 많은 사람으로 키우셨으면 훨씬 더 좋은 캐릭터를 쓰고,
훨씬 더 좋은 이야기를 구상할 수 있을 텐데 도대체 왜 저만 이런 거예요!!!!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 외침에 (여전히)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으려고 경쟁하며 밥을 먹던 가족들이 갑자기 숟가락질을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어처구니없는 눈빛으로…


언니1: 얘 뭐래?

언니2: 미쳤나 봐.


하고 언니들은 다시 곧장 밥을 먹었지만… 그 후 내 상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가족들은 가족회의를 열었다. <막내는 왜 결핍이 없는가. 이것이 정녕 문제인가>에 대한 토론을 한참 했다. 그리고 깨닫게 된 사실은 내가 결핍이 없는 게 아니라, 어떤 경험이나 사건이 나에게 상처가 되어 마음에 흉터가 남고 결핍이 되기 전, 가족들이 그것을 치유해 줬고 회복시켜 준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와. 내가 부잣집 딸이 아닌 줄 알았는데 정말 (마음) 부잣집 딸이었구나. 이런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생각해 보니 나도 꽤 힘들었을 수 있는 사건들이 있었다. 초등학교 때 왕따도 당해봤고, 수학 점수도 맨날 꼴찌였고(그러나 나는 수학 선생님을 좋아했다), 버스에서 성희롱도 당해보고(쌈닭인 나는 화를 냈었다), 지원했던 십여 군데의 대학에 모두 떨어져 봤고(아주 쪽팔렸다), 돈 없이 학교 다니면서 아르바이트하느라고 주말은 온통 알바생으로 살아왔고, 알바 중 온갖 진상 손님, 알바생에게 막말하는 진상 사장님도 만나 봤었다(“여기서 일하는 너희는 다 인생 낙오자다”는 얘기를 왜 자기 가게 알바생한테 했을까? 의아했던 사건이었다). 아, 못생겼다고 알바 하루 일하고 잘린 아주 극적인 일도 있었다(이때는 내가 정말 그렇게나 못생긴걸까 충격을 좀 먹긴 했었다).


물론 이 사건들은 정말로 힘들게 삶을 살아온 사람들에 비하면 너무 아무것도 아닌 사건들이라 진짜 힘드셨던 분들은 코웃음을 치실 것임을 알고 있다. 나는 금수저가 맞다. 마음 크게 다치지 않도록 애써준 가족들 덕분에 곱게 자랐으니까. 요즘 세상에 이렇게 자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를 생각하면 나는 정말 탑티어 금수저인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너무 감사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내가 잘난 것도 하나 없고 내가 열심히 노력한 것도 하나 없는데 이런 좋은 가족을 만난 것은 엄청난 행운이니까(전생의 내가 덕을 좀 쌓았나? 잘했다 전생의 나야). 그런데 지금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우리 가족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다. 이런 환경에서 이렇게 자라 온 나였기에 아카데미에 간 후 글을 써보려 하면, 나는 어떤 글을 써야 하나, 어떤 글을 쓸 수 있나 정체성의 혼란을 느꼈다는 말이 하고 싶어서다.


시나리오 작법 책들을 보면 주인공의 결핍이 주인공이 움직이는 힘의 근원이고, 주인공은 결핍을 충족시키기 위해 어떤 것을 욕망하게 되고 움직인다 등등 온갖 결핍의 중요성에 대한 말들이 꼭 나온다. 그런데 그런 말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렇기에 작가도 꼭 결핍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혹시 이런 말을 작법서에서 본 사람이 있다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짐했다. 그래. 내가 큰 결핍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인건 바꿀 수 없는 사실이지. 그러나 작가가 글을 쓰기 위해서 꼭 결핍을 가져야만 한다는 얘기는 없잖아? 그렇다면 공부 밖에 답이 없구나…!! 내가 재미있었던 영화들에서 주인공의 결핍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찾아보기도 하고, 결핍이 약한 주인공들의 경우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결핍이 약해도 성공적이었던 영화가 있는지도 찾아봤다. 희한하게도, 결핍이 약한 주인공들이 나오는 영화는 유럽 영화, 일본 영화들 중에서 발견되었다. 결핍이 강렬하거나 어둡고 심오할 경우 사건이 커지고 이야기는 좀 더 강렬해지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결핍에 집중해 있었고, 온갖 결핍을 주인공에게 주었다. 주인공의 결핍에 따라서 욕망이 달라지기 때문에 악당(안타고니스트)의 성격도 바뀌더라. 그런데 참 이야기라는 게 어려운 것이 나에게 부족하고, 내가 없는 것에 집중하고 있으면 절대 완성 지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관해 J감독님이 해주신 명언이 있다(이 얘기는 사실 아카데미 정규 과정이 아니라 이후 장편 시나리오를 쓰면서 들은 이야기인데 이와 관련된 너무 엄청난(!) 명언이라 지금 써본다)


시나리오를 쓴다는 것은 갑판에 구멍이 수십 개 난 배를 띄우는 것과 같다. 구멍이 수십 개 난 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뜻 배를 출발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구멍을 다 막고 나서 배를 띄워야지.’ 한다면 배는 영원히 출발지에만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일단 배를 띄워야 한다. 배를 우선 출발시키고, 항해하는 과정에서 열심히 여기저기 난 구멍을 막아야 하는 것이다. 어떤 구멍을 어떻게 막아야 완벽한지는 해보기 전까지는 모른다. 따라서 배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침몰하지 않기를 바라며 열심히 구멍을 막으면서 항해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구멍을 완전히 다 막지 못했더라도 배가 목적지에 도착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대 성공이다. 그런데 만약 구멍을 제대로 못 막아서 도중에 침몰한다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구멍을 다 막고 출발하기 위해 아직도 항구에 정착해있기만 한, 아마 평생을 떠나지 못하고 있을 그 배보다는 더 멀리 간 것이니까 그것으로 됐다. 그것이 시나리오를 완성시키는 방법이라고 J 감독님은 말씀하셨다(J 감독님 감사합니다. 이 조언은 시나리오를 쓰려 할 때마다 매일같이 되새김질(?)하고 있습니다 흐흐).


나 역시 주인공의 결핍에 집중해 있었더니 글의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자꾸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부모 없는 자식의 결핍과 외로움, 이들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는지, 어떻게 청소년이 알바를 할 수 있는지, 이 설정이 말이 되는 건지 같은 실질적인 정보들을 찾느라 헤매고 있었다. 그런데 주변에서 계속 나에게 피드백을 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할머니가 재미있으니 할머니에 집중하라는 이야기였다. 할머니를 최대한 영화에 빨리 등장시키라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 서론에서 주인공의 결핍과 상황, 현실적인 개연성을 다 보여주려면 등장이 더 빨라질 수는 없는데 이걸 뭘 어떻게 하란 말인가… 하는 고민을 하면서 시나리오를 고치고 또 고쳤다. 그렇게 9월 1일에 1고(22pg)를 쓰고, 11월 13일에 촬영고(18pg)가 나왔는데 10번 정도 다시 쓴 촬영고였다.


광안리 앞바다를 산책하다가 폼잡고 써 본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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