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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막) 한국영화아카데미(7)

(안부귀영화) 2.3 - 지팡이소녀(2)

by 초별


한국영화아카데미는 참 훌륭한 곳이다. 경력 많은 감독님들이 1:1로 멘토링해 주고, 크리틱 때는 집단지성이 소극장에 감금…이 아니고 함께 모여 학생들의 글을 하나하나 꼼꼼히 읽고, 애정을 담아 두들겨 패…(아고 왜 자꾸 막말이 나오는지..?) 멋진 조언들을 해주시고, 그렇게 함으로써 거지 망아지 같은 내가 영화라는 것을 만들게 해 주는 교육기관이니 말이다. 나는 진심이다. 한국 영화 아카데미 같은 영화 교육 기관은 세계에 유일무이하다고 한다(그래서 세계 각국에서 견학을 오기도 하고 다큐멘터리를 찍어가기도 하고 그런 모습을 심심찮게 봤다).


이런 훌륭한 아카데미의 훌륭한 학생 채찍질(?) 방식 중 하나가 바로 제작비 차감 제도다. 이 제도는 정말… 연출자들의 심장을 쫄리게 만들고 연출자를 한 없이 자괴감에 빠지게 만들며 낙담한 연출자가 광안리 바닷물에 풍덩 빠지(면서 수영을 하)는 선택까지 하게 만드는 훌륭한 제도였다. 졸업 작품 시나리오를 쓰는 단계(아마 3 쿼터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에 들어가면 거의 매주 졸작 시나리오를 제출해야 했다. 제출만도 똥줄 타는데 더욱 무시무시한 것은 이 시나리오에 교수님들이 점수를 매긴다는 것이었다. 시나리오 제출 며칠 뒤, 크리틱 날이 되면 우리 전투 동지… 아니 연출 동기들 8명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동물 마냥 마음을 굳게 먹고 소극장으로 향했다. 하루 종일 그곳에 갇힌 채, 시나리오 크리틱이 시작됐다.


크리틱을 싫어하는 학생도 있고, 크리틱 때 자기 것만 들으면 되지 왜 다 같이 갇혀서 다른 동기들 것까지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자기 차례가 아니면 딴짓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럴 만도 하다. 하루 종일 갇혀 있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원래 남에게 관심이 많아 그런지 크리틱 시간이 너무 재미있었다. 내가 쓴 글을 크리틱 받을 때는 조금 고통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늘 새로운 시선과 다양한 욕…이 아닌 의견들이 흥미롭고 감사했다. 그에 더해 다른 동기들의 크리틱은 (내 글이 아니라 부담이 하나도 없다 보니) 어떤 피드백들을 하는지가 흥미로웠고 그저 재미있었다. 그래서 나는 늘 동기들 시나리오를 열심히 읽고 갔다. 어떤 때는 A동기의 시나리오가 크게 흥미롭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호평을 받으면 누군가는 그렇게 볼 수가 있구나 싶어 신기했다. 또 B동기 시나리오는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혹평을 받는 것을 보며 또 신기했다(흠, 이 정도면 내가 안목이 없는 것일 수도…?)


크리틱을 하시는 교수님들은 다들 제각각 자기 성격대로 발언을 하시는데 그 와중에도 개그캐를 담당해 시종일관 웃기려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독설로 유명하고, 어떤 사람은 엉뚱한 얘기를 하기도 해서 나는 속으로 킥킥대기도 하고 ‘역시 저 교수님은 저 캐릭터를 벗어나지 않으시는군!’ 생각하기도 하며 혼자 즐겼다. 물론 각자 캐릭터를 가지고 있는 와중에도 다들 핵심은 제대로 찌르신다. 아주 푹푹.


크리틱을 받는 동기들 역시 다들 자기만의 캐릭터가 있다. 자기 차례가 되면 소극장 맨 앞 무대 쪽에 나가 관객석의 심판들(?)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야 한다. 그때 어떤 친구는 노트와 펜을 가지고 나가 교수님이 하시는 말을 다 받아 적기도 하고, 어떤 친구는 컴퓨터에 옮겨 적기도 하고, 아무것도 안 가지고 앞에 나가는 친구들도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안 가지고 나가는 유형이었는데 왜냐면 나는 녹음을 했기 때문이다(이건 아무도 몰랐겠지 흐흐). 나는 크리틱 때 대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교수님들이 하는 말을 받아 적고 있으면 눈도 못 마주치고 대화가 안 되는 것 같아 그게 싫었다. 그래서 앞에 나가서 그냥 말씀하시는 걸 듣고, 반박할 건 반박하고(반박의 요소로는 방어기제+열등감 폭발+동의하지 않는 척+잘난 척+자신 있는 척+내 이야기가 무조건 재미있는 척 등등이 있지만 여튼) 그랬다. 교수님들도 각자 동기들의 캐릭터를 아시다 보니 어떤 때는 “야 임마 너 그렇게 열심히 적는 척하면서 하나도 반영 안 하잖아 그럴 거면 왜 적어?” 하면서 쫑코를 주기도 했다.


그렇게 크리틱이 끝나고 나면 이미 어두컴컴한 밤이 와 있고, 동기들은 모두 허기진 상태가 되었다. 무엇이 허기지냐. 밥이 아니고 술이다(물론 아닌 사람도 있었겠지만 제 경우를 말하는 겁니다) 크리틱 날 마시는 술은 참 맛있었다. 안주로 교수님들도 좀 씹어드리고, 코멘트들을 복기하며 괜히 (반항해 보려고) 비웃기도 하고 그러면서 술을 마셨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보면 공포의 공지를 받게 된다. 바로 시나리오 평가 공지다. 우리는 연출이 여덟 명이라 여덟 개의 시나리오가 있었는데 1등부터 8등까지 순위가 적혀 있고, 제작비 관련 결정 사항이 적혀 있었다(아래는 예시입니다)


땡땡구리: 제작비 -50만 원
지팡이소녀: 제작비 -150만 원
어쩌라고: 제작비 +50만 원
나잘났다: 제작비 +100만 원


이건 정말 정말 잔인함의 끝판왕이다. 마이너스 150이라니…!!!! 내가 이번 주에 시나리오를 제대로 완성 못 해서, 중간중간 씬들을 그냥 “이렇게 될 것임”으로 적었다고 크리틱 때 혼나는 것만으로 끝난 게 아니라 제작비를 150만 원이나 잃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의 이 소중한 제작비가 어쩌라고와 나잘났다 팀에게 가버리다니…! 사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만 공지사항을 보고 있다 보면 마치 내 돈이 다른 팀에게 넘어간 것처럼 느껴진다. 또 만약 그 주에 어떤 동기가 아예 시나리오를 제출하지 못하면 그의 슬픔은 나의 행복이 되어 속으로는 나도 모르게 음흉한 악마의 웃음을 짓고 있다(이 친구 돈이 깎이면 그 돈은 누구에게 갈까? 하는 상상도 해보고->그 돈이 누군가에게 꼭 가는 것이 절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이렇게 내 페널티와 남의 상점을 연결 지어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이런 환경에 놓이게 되면 사람이 이렇게 돌아버리면서 무시무시해지는 것이다!


이 과정을 매주 반복하면서 제작비가 깎일 때면 같은 팀으로 영화를 만들 피디, 촬영 동기에게도 갑자기 미안해지고 겸연쩍어지고 숙연해지고 관으로 들어가고 싶고 그렇게 되면 또다시 3층 끝 방에 스스로 갇혀 시나리오를 쓰는 전투적인 로봇이 돼야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글을 쓰고, 그러다 그다음 주에 혹시 + 결과를 얻으면 갑자기 당당해지고, 의기양양해지고, 행복해지고, 하늘을 날고 있는 것만 같고… 사람이 참… 돈이 뭔지 참… 그러나 이런 철학적 고민을 할 시간도 없다. 그저 단순하게 ‘연출의 능력은 돈을 끌어오는 것! 그래 영화는 돈이 전부다!‘는 마음이 되어 버린다. 그렇게 그냥 미친 듯이 열심히 글을 쓰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제도가 너무 잔인하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맞다. 잔인하다. 아주. 그러나 이 제도를 경험한 나의 주관적 입장은, 이 제도는 나를 글 쓰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기필코 더 재미있는, 더 좋은, 더 나아진 글을 쓸 것이다’는 다짐을 하게 했다는 것이다. 교수님들도 가끔 이런 말을 하셨다. “너희들 이게 잔인한 거 같지? 아니야. 너희 이제 영화판 나가봐라. 전쟁 시작이야. 제작사랑 일하고, 투자사에서 돈 받아내야 하는 그런 정글을 보면 이곳은 천국이야 천국.” 참으로 잔인한데 현실적인 말씀이셨다.


이런 잔인한 천국 속에서 연출들이 장착하면 좋은 마인드는 단순함인 것 같다. 아무도 인정 안 해주면 나는 천재 예술가고, 인정해주면 해준대로 또 나잘난 예술가가 되면 된다. 나는 평이 안 좋거나 제작비가 깎이면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분하다. 아직 나의 이 어마어마한 대작을 내가 제대로 표현을 못해서, 빙산의 일각 밖에 보지 못하니 다들 몰라보는군.’ 그런데 만약 제작비 플러스가 되면 그때는 또 즐겁게 착각에 빠졌다. ‘하~ 이 싸람들이 드디어 내 작품을 알아보는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런 내 단순한 성격이 아카데미 교육 제도와는 잘 맞아떨어지지 않았나 싶다. 그 말은, 각자의 성격에 따라서 아카데미와 정말 안 맞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아카데미에 오고 싶으신 분들이 계시다면 잘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나는 이런 과정을 통해 시나리오를 계속 수정하고 또 수정하면서 제작비 1천1백여 만원을 받았다(기억이 가물가물해 정확한 액수를 찾아봤으나 적어 놓은 게 없어 대충 기억에 의존한다). 연출 동기 8명 중 두 번째로 높은 제작비였고 그 말은 두 번째로 시나리오가 통과됐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 말은 내가 동기 8명 중 두 번째로 재미있는, 좋은 시나리오를 썼다는 말이 아니다. 또 이 말은 그래서 제작비가 많을수록 멋진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말 또한 아니다. 제작비가 800만 원이든 1천200만 원이든, 좋은 영화는 결국 좋은 시나리오와, 좋은 연출과 좋은 배우와 스태프들이 만들더라. (내 생각일 뿐이지만) 결국 이 시나리오 통과는 교수님들이 ‘얘는 말해도 더 이상 안 고칠 것 같고 자기가 알아서 잘할 것 같으니 그냥 빨리 이제 프리 시작하라고 해’의 상태이거나, 아니면 ‘얘는 뭘 하든 별로 관심 없으니 빨리 통과시키고 다른 가능성 더 큰 친구 거 달달 볶아야지 ‘라는 상태 거나… 뭐 그러면 통과되는 것도 있는 것 같다(나는 후자였던 것 같다) 어쨌든 그런 식의 수십 가지 운과 타이밍과 이것저것이 작용되면서 시나리오가 통과되고, 나는 부산을 떠나 서울에 올라갔다. 드디어 졸업작품 프리를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말덧) 이 글이 아직도 졸작 프리를 시작 안 했다니 진정 공포스럽구만. 쓰다 보면 자꾸 예정했던 것과는 다른 것에 꽂혀서 구구절절 수다를 떨고 있게 된다. 하… 어느 세월에 끝나려나 이 시리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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