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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막) 한국영화아카데미(8)

(안부귀영화) 2.3 - 지팡이소녀(3)

by 초별


프리를 준비하기 위해 서울에 왔지만 시작 요이땅! 한다고 기다렸다는 듯 준비가 착착 되는 것이 아니다. 아카데미에서 영화를 찍으면 제작비를 지원받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잔소리하고 신경 써주셨던 교수님들이 계시다는 큰 장점이 있지만 시나리오에만 집중했던 3분기가 끝나고 서울로 오면, 이제 실질적인 모든 진행을 연출, 피디, 촬영 세 사람이 함께 해야 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문제는, 실습작 때와 마찬가지로 촬영과 피디는 각자 두 작품씩 하기 때문에 그 스케줄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많은 것들을 혼자 준비해야 했다.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이 연출팀을 꾸리기 였다.


나는 인간관계를 정말로(궁서체다) 못한다. 특히 지속적인 인간관계를 못 한다. 살다 보면 어떤 계기로 (일이든, 모임이든, 운동이든, 어떤 프로젝트든) 어느 정도의 일정 시간 동안 함께 무언가를 해야 해서 만나게 되는 인연들이 있는데, 좋게 헤어졌어도 연락을 지속하질 못한다. 그런 것을 잘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정말 부럽고 대단한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여튼 그렇다 보니 나는 안 그래도 없는 인간관계인데 그 안에서 연출부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 아주 고통스럽고 좌절스럽기 그지없었다. 동기들 중 영화과를 나와 영화하는 친구들이 많은 것이 그저 부러웠다(물론 대학교 동창이라고 해서 무조건 다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영화과를 나왔다고 해서 스태핑이 더 쉬운 것도 아니라지만). 그러나 고통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다... 좌절하고 울고 있다고 일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한 번도 연락 않고 지냈던 5년도 더 된 인간관계들까지 다 전화를 돌리고 갑자기 "안뇽? 잘 사니?" 하는 카톡을 보내면서 온갖 사람들에게 매달렸다. 그래도 아카데미에 오기 전까지 영화 근처를 계속 기웃기웃거렸던 시간들 덕분에 믿을만한 사람들을 극적으로 찾을 수 있었다.


연출부 D군은 이전부터 알고 지냈고 워낙 열심히 일을 잘하는 친구라 시간을 내줘서 너무 고마웠고 든든했다. 반면 소개를 받고 알게 된 C군은 처음 만나는 친구였는데 사람이... 너무 착했다. 그리고 열심이었다. 내가 무슨 복으로 D군과 C군을 만나게 된 건가 싶은 때들이 많았다. 아마 D군과 C군은 '이렇게까지 열심히 해야 하는 일인 줄 몰랐는데 이 사람이 자꾸 일을 시키네? 그것도 엄청나게 계속 시키고 계속 요구하네? 도망가고 싶다!' 하는 심리 상태였을 것 같다. 회의를 하면서 내가 이것도 알아봐야 하고, 저것도 준비해야 하고 다다다다 말을 하고 있으면 착한 C군의 표정이 분명히 웃고 있는데 왜때문에 눈동자 너머는 점점 굳어가는 것을 종종(아니 실은 자주) 느꼈다. 이 연출부 일이 C군에게 트라우마로 남게 된 걸까... 지금은 연락을 안 한다(흑흑). 문득 생각날 때가 있는데 왜인지 내가 연락하면 C군이 너무 화들짝 놀라며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아 연락을 못 하고 있다. 영화 일을 계속하고 있을까..? 인성이 너무 순한 친구였어서 그냥 영화일을 안 했으면 좋겠다.


영화라는 것은 참 멋지게만 보이는데 가까이서 보면 악마가 따로 없다. 무언가 배울 수 있을 거라는, 좋은 인맥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세치 혀에 넘어간 사람들이 노동력을 어마어마하게 (때론 부정하게) 착취당하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판에도 표준근로제가 도입된 후 상업영화 현장은 정당한 페이를 받으면서 스태프들이 더욱 전문적으로 일을 하게 됐다. 그러나 아직도 저예산 영화, 독립 영화, 단편 영화들은 옛날과 비슷하게 서로 품앗이하면서, 꿈을 위한 일을 한다는 그럴싸한 명목 하에 다들 힘들게 노동착취 당하며 일을 하는 현장들이 많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은 착하고 고지식한 사람들이다(내 주관적 생각일 뿐이지만). 조금이라도 얍삽하게 머리 굴리면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요리죠리 일도 잘 쳐내고 적당히 하면서도 인맥을 쌓고, 노하우를 배우고 크레딧도 쌓을 수 있는데 소처럼 우직하고 착한 사람들은 간도 쓸개도 젊음도 청춘도 다 뺏기고 열정을 200% 갈아 넣으며 얍삽이가 떠넘긴 일뿐만 아니라 그 외의 온갖 일들까지 다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때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내 자의로, 내가 원해서 그렇게 열정을 갈아 넣는 중인 것인지. 아니면 어쩌다 보니 착취당하고 있는 것인지 잘 생각해야 한다. 왜냐면 그저 착하고 고지식하게, 순수한 열정만으로 모든 것을 갈아 넣으며 일을 하다가 나중에 영화 일이 끝난 후 정신을 차려보면 상처만 남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 주변에도 그래서 영화 일을 그만둔 친구들을 꽤 봤다. 다 내가 좋아하는 유형인 고지식하고 열심한, 순수한 사람들이었다. 어떤 친구는 꿈이고 행복이었던 영화였지만 이제는 너무 싫다, 영화하는 사람들은 치가 떨린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참 마음이 아팠는데 동시에 무슨 말인지 너무 잘 알겠어서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연출들은... 흡혈귀 같은 사람들이니까. 흡혈귀라... 아주 너무 대박적으로다가(?) 딱 맞는 표현을 찾은 것 같다. 연출가 지망생들은 잘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 내 성향이 흡혈귀가 될 수 있는 성향인가 아닌가를.


나 역시 흡혈귀다. 그런데 착한 척이 취미인. (음, 착한 척하는 흡혈귀는 자기가 나쁜 줄 아는 흡혈귀보다 더 최악이긴 하군) 흡혈귀들은 사람의 피를 빨아먹기 위한 자기만의 방법들이 있다. 봉준호, 박찬욱 감독님 같은 흡혈귀는 아마 모두가 피 빨리기를 자처하며 모여들 거다. 수백 번 피 빨려도 좋으니 함께 멋진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외치며 줄을 서겠지. 그러나 유명세도 없고, 아직 인정도 받지 못한 신인 흡혈귀들은 다 자기만의 방법으로 피를 빨아야 한다. 그 다양한 방법들에 관해서는 나중에 흡혈귀 백서(?)를 따로 하나 써봐야겠다. 여튼 나 역시 착한 척하는 흡혈귀로서 수많은 프리 일들(오디션부터 미술소품 준비 등등)을 연출팀에게 떠넘겼다. 그리고 나는 시나리오에 집중했다.


전편 댓글에 시나리오 관련 질문이 있었기에 시나리오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면, <지팡이 소녀>의 첫 제목은 <베이비시터>였다. 탑골 공원의 노인에게 주인공 소녀가 어린 동생을 맡기면서 베이비시팅을 부탁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가 3쿼터 (시나리오만 쓰던) 때 이것저것 다 뒤엎다가 쓴 초고였다. (위 파일을 보면 아시겠지만) 당시 베이비시터는 완성된 시나리오도 아니었고 이럴까 저럴까 하면서 일단 끝까지는 써 봤던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드라마(장르)가 더 강하고 주인공이 공원의 노인에게 동생을 맡기면서 노인들과 엮이게 되고, 장님 지팡이 고수 할아버지에게 간단한 무술을 배워 자학하는 아빠(안타고니스트)를 정신 차리게 해 준다는 (말도 안 되는) 내용이다. 이 아이템을 제출하자 "이거다!" 하는 교수님도 있었고, "이전 다른 아이템이 더 좋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 와중에 특히 도움이 됐던 조언이 동기 J오빠가 "할머니 할아버지 캐릭터를 합쳐서 할머니 고수를 만들면 더 재밌을 것 같다"라고 한 말이었다. 뭐든 써야 했기에 이것저것 마구마구 던져 놓듯이 쓰다가 할머니 할아버지를 합칠 생각을 하니 훨씬 캐릭터가 명쾌해졌고 신선했다. 지팡이 소녀의 킥(?)인 할머니 고수가 동기의 도움으로 탄생한 것이다.


또 다른 조언은 꽁지머리 교수님의 조언이었는데 조언보다는... 화 돋우기...? 였다. 당시 교수님은 무조건 액션으로 가라. 그래야 재밌지. 드라마만 있으니 재미가 없어. 약자(무연고자)에 집중하지 말고 그냥 재밌게 가! 빵빵 때려 부수고!라는 얘기를 하셨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속으로 '빵빵 때려? 그건 쌤이나 하세요' 하고 어이없어 하면서 "저는 액션 써 본 적도 없는데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교수님은 "지금 써보면 되지! 너 모든 장르 할 거라며~ 야, 액션 찍을 때 좋은 게 뭔지 아냐, 액션 장면은 내가 연출 안 해도 돼~ 다 무감한테 떠넘길 수 있다니까? 히히!"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하... 거기에 낚였다. 오~ 내가 연출 안 해도 된다고? 개꿀... 그러면서 액션 분량을 확 늘리기로 다짐했다. 그렇게 시나리오를 수정하는데 액션을 어떻게 써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는 것이다. 고민에 고민을 하며 머리를 쥐어짜고 이리저리 써보려다가 안 되겠다, 그냥 나는 드라마 해야겠다 싶어 교수님께 문자를 보냈다. "저 액션 포기할래요. 못 쓰겠어요." 그랬더니 교수님의 답장이 띡 왔다. "못 쓰는 게 아니라 안 쓰는 거지." 문자를 읽자 갑자기 뜨거운 콧바람이 나왔다. 흥, 안 쓰는 거라고? 내가 쓴다 써!! 타다다다 손가락에 힘을 줘 가며 액션 장면들을 썼다. 그렇게 수정된 이야기가 9월 1일에 완성된 지팡이소녀 1고였다.



당시 1고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이 1고에는 주인공의 결핍과 상황들이 구구절절 소개되고 있다(심지어 나래이션으로!) 22페이지 중 거의 6페이지 내내 주인공과 안타고니스트 설명만 하고 있는 것이다. 분량을 줄여야 했고, 할머니 고수가 최대한 빨리 등장해야 했다. 대사보다는 이미지로, 영화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고 싶은 목표도 있었다. 액션도 더 멋있고 재미있었으면 했다. 특히 CG에 돈을 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CG 없는 액션으로 바꾸어야 했다. 수정을 계속했다. 로케이션을 돌아보면서 상상을 구체화했고, 새로운 콜라텍이라는 매력적인 장소도 발견해 시나리오가 바뀌고 또 바뀌었다. 그렇게 11월 13일, 촬영고가 나왔다.



프리를 준비하고, 시나리오를 수정하면서 또 한 가지 준비했던 것이 연출노트였다. 이건 이전에 쓴 -7화- 글에도 등장하는 아카데미 선배 Y오빠에게 전수받은(?) 연출노트였다. 프리를 하는 도중 어떤 것을 잊으면 안 되는지, 어떤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하는지 등 질문들이 마구마구 생겼었다. 불안해진 마음에 Y오빠에게 전화해서 촬영 전 노하우를 (염치없이 맨입으로) 물었는데 이것저것 소중한 조언들을 많이 해주셨다. 그러면서 자기 졸작 했을 때 적었던 씬별 포인트를 보내주겠다고 하셔서 "아이코 맨입으로이렇게받게되다니너무죄송한데너무감사합니다밥이라도사드려야하는데시간이안되시죠?이럴수가그러면그냥보내주세요어쩔수없네요제발보내주세요"했다. 그렇게 받은 씬별 포인트를 보면서 감탄을 했던 기억이 난다. 매 씬마다 잊지 말아야 할 요소들을 상세하게 기록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래서 당시 Y오빠의 졸작이 영화제도 많이 가고, 상도 많이 받았구나 생각하며 우리 집 가보로 간직.... 까진 아니고, 나도 내 씬별 포인트를 잘 적어봐야겠다 결심했다. 그렇게 만든 것이 아래의 파일이다.



이 씬별 포인트도 다 프린트해서 스태프들과 씬바이신을 할 때 하나씩 짚어 보았다. 지금 보니... 헉.. 장편 찍을 때보다 열심히 한 것 같네... (머쓱) 장편 때는 장편 때만의 고통과 고뇌가 있었으니 그건 나중에 얘기하는 것으로...(회피해 본다).


저렇게 한 씬 한 씬 (나름) 열심히 준비했고, 이것은 중요하니 놓치지 말 것! 하고 밑줄 좍좍 그어놨어도, 결국 찍지 못한 것도 있고, 놓친 것들도 많다. 아쉬워라... 이렇게까지 열심히 준비했는데 여전히 아쉬운 작품이라니. 이 아쉬움은 언제 끝나는 걸까. 완성도와 나 스스로에 대한 아쉬움은 있지만 당시 배우, 스태프들의 노력에 대한 아쉬움은 하나도 없다. 더 이상은 잘할 수 없을 정도로 모두가 잘해줬으니까. 그 말인즉, 더 이상은 피를 빨아먹을 수 없을 정도로 내가 모두의 피를 쫙쫙 빨아먹었다는 뜻이겠지 흑흑 흡혈귀의 운명이여.



덧) 부끄럽지만(지금까지 안 부끄러운 게 없었다마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서칭하다가 이 글을 발견해 읽고 있을지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어떤 방식으로라도 도움이 됐으면 해서 위 파일들을 공개한다. 개인적으로 다운 받아서 읽고 일말의 도움이라도 되신다면 즐거울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상업적 이용 목적으로 퍼가시는 것은 안됩니다. 이 딴 게(?) 상업적 목적으로 쓰일 일도 없겠지만 워낙 세상이 흉흉하다 보니 노파심에 덧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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