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타임 - 건강검진
"신분증 챙겼어?"
늘 가지고 다니던 신분증이지만 한 번 더 가방을 열어 뒤적여본다. 애 엄마로 신분증 쓸 일은 잘 없는 터라, 한 혹시나 하고 확인해 본다. 이 나이에 신분증을 가지고 갈 곳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것 같다. 은행 아니면 병원. 오늘은 병원이다. 1년에 한 번 있는 종합검진을 하는 날이다.
검진 전문 병원에서의 분위기는 일반 병원보다 편안한 분위기다. 하지만 그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촘촘하게 시스템 되어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20-30종의 검진을 하는 데에 있어서 일분일초의 시간도 틀어지지 않기 위해 설계된 설계도 위에서 게임을 시작한 기분이랄까.
옷을 환복하고 탈의실에서 나오고 주어진 안내폰의 메시지를 따라서 1번 방으로 들어간다. 남자는 초록색, 여자는 핑크색의 차이만 있을 뿐 슬리퍼와 양말까지 다 똑같이 입고 여러 명이 대기하는 방을 보면 새삼 수리를 기다리는 자동차 같기도 하고 로봇 같기도 하다. 기다리는 동안에 문진표를 작성한다. 내가 일주일에 술은 얼마나 먹는지, 스트레스는 얼마나 받는지, 죽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있는지, 가족력이 있는지... 평소에 받아보지 못한 질문을 받다 보면 우리 할머니가 어떤 병으로 돌아가셨더라? 같은 생각이나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었었나 하고 곱씹어보기도 하고 지난주에 술을 매일 맥주 한 캔 씩은 했구나라는 것을 새삼 알게 된다. 문진표가 점점 채워질수록, 주어진 몸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는 죄책감도 같이 커진다. 문진표 작성을 끝내고 나서는 수리할 게 많이 없는 로봇으로 판정 나길 욕심내본다.
기본적인 체중과 키, 혈압을 재보면서 요즘 운동하고 있으니 마음에 드는 수치가 나왔다며 뿌듯해본다. 그런데 시력검사로 넘어가서는 왼쪽과 오른쪽을 각자 가리니까 숫자가 잘 안 보이기 시작했다. 밤에 어두운 데에서 유튜브를 많이 봐서 그런 보다. 작년보다 시력이 훨씬 더 떨어졌다. 라식까지 했는데 숫자가 너무 떨어져 있다니. 이러다가 눈이 안 보이게 되면 어떻게 하지? 책도 못 읽고, 유튜브도 못 보고, 티브이도 못 보고 그렇게 되면 너무 심심할 것 같은데. 요즘엔 오디오북도 잘 되어있으니까, 그리고 사람들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청력테스트가 진행되었다. '뚜'소리가 나면 버튼을 누르는 단순한 것인데, 시력검사 이후로 내 몸에 대한 자신이 없어서인지 긴장된다. 몇 번의 소리가 나면서 딸깍 버튼을 누르다 보니 검사는 끝이 났다. 청력 테스트는 그래도 다 들렸던 것 같아서 떨어진 자신감이 다시 채워졌다. 그러고 보니 청력과 시력 중 둘 중에는 어떤 것이 더 힘들까? 귀로 들을 수는 있으니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사람과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까 청력이 더 나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귀로 다 들려서 무슨 상황인지 궁금하고 보고 싶은데 보이지 않으면 더 답답할 것 같기도 하다. 그럼 청력보다 그래도 시력이 나은 건가? 귀로 보이지 않아도 눈으로는 다 보이게 되면, 이야기는 타자로 치고 해도 되니까 답답하진 않을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결국 숙연해진다. 그럼에도 나는 보이는 눈을 가지고 있고, 잘 들리는 귀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얼마나 고맙고 기적 같은 일이구나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그리 당연하진 않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숙연해진 마음으로 다음은 여성 검사로 넘어가라고 표시가 나왔다. 여성만이 가지고 있는 장기가 있다 보니, 검사할 장기도 몇 개 더 있구나. 이제 굴욕타임이 시작되겠지. 나의 유방이 짜부되고 쥐어짜져 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