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9.XX
늦은 답장을 써보려한다. 이제서야. 그래보려 한다.
헤아려보니, 달을 넘기고도 보름 즈음이 더 지났다.
네 편지를 받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굳이 바빴다거나, 그래서 겨를이 없었거나 하는 핑계를 댈 생각은 없다.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저 ‘답장을 쓸 수 없는 마음만이 가득 차 있는 시간을 보냈다.’ 라는 말 뿐이다.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질량을 품은 듯 무거운 펜은 편지지 위에 단 한 획조차 써 내리지 못하게 했다.
획이 더해질수록 펜의 무게보다 더한 중력이 내 마음을 짓누를까 두려웠던 것 같다.
겨우 막아놓은 댐이 무너지듯, 한 획 한 획에 굉음을 내며 무너질 슬픔이 두려웠다. 한번 터진 슬픔은 도저히 통제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슬픔은 내 마음을 끝 모를 늪의 바닥까지 끌고 갈 것이다.
지금보다도 가쁘게 숨을 내쉬어도, 질식하고 말 것 같았다.
편지를 받은 날이 하루하루 멀어질수록, 조급함과 부채감은 커졌다.
하지만, 절대 이런 마음은 답장에 담지 않고 싶다. 이 마음은 무거운 짐이 되어 내 숨을, 하루를, 시간들을 누르는데, 이 무게를 네게 넘기는 비겁함은 끝내 피하고 싶다.
‘….슬픔은 매일매일 성실하게도 마음의 빈틈을 파고든다더라. 슬픔을 피하는 일은 참 고된 일이야. 그 감정의 책임이 내게도 있다는 사실은 나의 마음도 아프게 하네. 네 하루를 집요하게 따라다닐 슬픔이 빠르게 너를 떠나가길 바라.’
마치 나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슬픔의 성실함이 나에게는 예외인 듯이 이야기하고 싶다.
내 힘듦을 네게 설명하고 싶지 않다. 거기엔 위로를 바라는 마음이 담길 것이고, 위로까지 바라는 것은 이 마당에 지나치게 이기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섬세한 너는 횡설수설한 저 단어들의 덩어리를 통해 이미 내 마음을 알아챘을 것이다. 쓸쓸한 자각은 슬픔 위에 초라한 마음을 덧입힌다.
너의 편지는, 네가 정말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자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별을 고한 상대가 미웠음 미웠지, 어찌 걱정을 하고있을까.
처음에 느낀 놀라움은 이내 수긍으로 바뀐다. 늘 그런 사람이었다, 넌.
언제나 나를 똑똑한 사람이라 말해주었기에, 나는 내가 정말 그런 줄 알고 있었다. 속깊고 어른인 사람을 앞에 두고 뭐 그리 아는 체 했는지. 왈칵 쏟아지는 눈물에 초라함과 부끄러움을 씻어낼 수 있다면, 그 핑계로 한참을 울고 싶다.
더 이상 글을 쓰다간, 고해성사를 하듯 나의 부끄러운 마음들을 쏟아내, 이 편지를 모두 얼룩지게 할까봐 그만해야겠다.
늦은 시간과, 내일자 캘린더에 적힌 일정들을 핑계삼아 눈을 감아본다. 애써 눈을 감아, 잠을 청하며 도망친다.
늘상 챙기는 책 몇권과 노트를 챙겨 시간을 때우기 위해 집을 나선다. 지하철에 담긴 내 표정은 꽤 죽상이었을 것이다. 잠들기 전까지 들이 부었던 너에 대한 생각과 부끄러운 내 모습이 섞여 숙취가 심했다. 숙취엔 시간 뿐이다. 고스란히 아플 수 밖에 없겠다. 이렇게 하루를 더 미룬다.
덧글.
2020.01.XX
집, 카페, 알바를 반복하는 일상은, 멀리까지 대중교통을 타고 나가는 일을 고된 일로 여기게 만들었다. 한 시간 이동은 우습게 여기던 수도권 통학생의 정체성은 잊은 지 오래. 지하철을 탄지 30분만 넘어도 온 몸이 피로하다. 더군다나 자의 반, 타의 반인 마스크 쓰는 일은 익숙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 덕에, 집에 가는 길은 주로 지쳐있다.
약 1시간동안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면서, 휴대폰 속 유희거리에 그 시간을 맡기고, 마지막 환승버스에 몸을 실었다. 운좋게 자리를 잡았다. 서울살이 5년차. 버스는 익숙해진 동네에 들어섰고, 손가락으로 남은 정류장의 수를 셈해보고는 다시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20분 후면 집근처 버스정류장에 내리겠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였다.
모든 정거장에서 버스가 멈춘다. 하지만, 누가 타는지 모두 눈여겨 보진 않는다. 1시간 동안, 평소와 달리 많은 사람들을 스치며 그들로부터 오는 분주한 에너지에 지쳤고, 어딜 돌아봐도 마스크 뿐이라, 세상 사람들 살아가는 표정을 구경하는 재미 마저도 없었다. 이동할 때, 이어폰에 소리를, 휴대폰에 눈을 맡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주 전형적인 귀가길이다.
그런데, 우연히 눈을 든 정류장에서 교통카드를 찍고 이 버스에 들어서는 그 사람이 너와 꽤 닮아 있었다.
마스크에 가려진 얼굴에는, 눈빛 외 다른 정보가 없다. 확실하지 않다. 더 많은 정보를 위해, 티내지 않고 흘겨봤다. 내 시선이 그 사람의 신발에서 다시 눈빛으로 돌아가기까지, 지나치는 매 지점마다 옅어져 사라진 줄 알았던 기억들이 선명해졌다. 네가 좋아하던 신발 브랜드. 좋아했던 청바지 스타일. 그리고 네가 좋아하던 플리스 재질의 아우터. 그 기억들이 현재가 되어 눈앞에 나타난 순간, 마음이 쿵 내려앉는게 느껴졌다. 나와 눈이 마주친, 하얗고 불투명한 마스크 속 표정을 알 수 없는 그 사람은 나를 지나 내 오른쪽 뒤편 자리에 앉았다.
그 뒤 무엇을 보았는지, 들었는지, 네 생각에 잠식된 내 사고는 다른 것들을 처리할 여력이 없었다. 무거운 펜 앞에, 한 장의 답장도 완성하지 못한 채 무력감에 잠 못 이루던 수 년 전의 나와, 너인지, 네가 아닌지 모를 실루엣 앞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얼어버린 오늘의 나는 하나도 다르지 않다.
전규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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