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에 머무르게 하는 것
생각해 보면 삶의 아주 우연하고 짧은 시간이지만 마음속에 꺼지지 않는 모닥불처럼 남아있는 때가 많은 것 같다. 그리곤 우리는 그 기억의 파편에 기대어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때 그랬었지, 이때 좋았는데 라는 말을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건 과거에 얽매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오히려 과거의 기억을 동력으로 더 의미 있고 좋은 미래를 그려나가는 것과 같다. 참 좋은 사람들을 만나며 잊지 못할 경험을 했지, 와 같은. 그러니 영감을 주었던 순간들은 글로 적어 내려가는 것이 마땅하다.
밤이 되어도 꺼지지 않는 도시의 네온사인, 길가에 어지럽게 늘어져있는 공유 자전거, 먹다 버린 테이크아웃 커피잔들이 잔뜩 쌓여있는 길에는 그 순간들이 잊힐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우버 기사님은 우리가 뒷좌석에 타자, 친절한 대화를 걸어왔다. 지금까지 우버를 이용했을 때, 목적지가 여기 맞지요? 하는 것 말고는 딱히 대화를 한 적이 없었고 나도 여행을 갔을 때, 현지인과 (어떤 주제든) 이야기 나누어보는 걸 상당히 좋아하기 때문에 그 상황이 내심 반가웠는지도 모른다.
한국의 문화, 음식, 드라마에 대한 여러 주제가 오고 갔다. "김치 너무 좋아해요. 김치에도 여러 종류가 있잖아요!" 그가 말했다. 배추김치, 열무김치, 하다못해 파김치까지 알고 있는 기사님. 토론토 우버 기사의 입에서 파김치라는 단어가 나올 줄이야. 그 와중에 본인은 배추김치를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깍두기도 맛있으니, 언젠가 코리아타운에 가서 국밥 같은 것을 먹게 된다면 꼭 함께 먹어보라고 했다.
그 다음 주제는 드라마였다. 기사님은 한국 드라마는 유독 감정을 말랑말랑하게 하고 눈물을 또르르 떨어뜨리는 감동적인 장면이 많다며 신이 난 듯 말했다. "그 드라마 봤어요? 너무 감동이에요" 그러나 나는 사실 한국 드라마를 거의 안 봐서 그가 이름을 말하는 드라마마다 모른다고 답하기가 왠지 모르게 민망해, 은근하게 다음 주제로 대화를 돌렸다.
그리곤 우리는 토론토의 아름다운 곳들, 지금까지 어디를 여행하고 왔는지 등에 대한 대화를 이어갔다. 그는 지금은 토론토에 살고 있지만 사실은 몬트리올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
다른 나라, 다른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이유를 다시 깨달았다. 이런 시간은 내겐 너무 익숙해서 그 매력을 잃고 살았던 것들에 대해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어떤 것에 대해 입체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고 좋은 점은 더 크게 좋아질 수도 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언제나 그랬던 것 같다. 우리는 서로의 도시에 대한 좋은 점을 일깨워 주었고 익숙한 것에 사랑을 느끼게 해주기 마련이었다.
그가 한국 드라마를 얼마나 많이 봤는지는 우리가 택시에서 내릴 때 거짓 없이 증명되었다.
"어머님, 감사합니다" 그가 너무나 정확한 발음으로 엄마에게 말했다.
그의 이름은 빅터였다.
서울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전날 밤은 토론토 피어슨 공항 근처 호텔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다.
해가 지는 무렵, 버스는 어두운 고속도로를 달리며 호텔에 차츰 가까워지고 있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보니 창밖에는 붉은색의 노을이 강렬하게 스러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내일이면 이 도시를 떠나야 한다. 아쉬운 마음에 대비된 노을은 야속하게 아름다웠다. 언젠가 토론토의 노을은 유난히 색감이 짙고 크다는 느낌이 든 적이 있는데, 그 귀중한 모습을 놓치지 않아서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저녁 8시쯤, 예약해 둔 호텔 로비에 도착했다. 카운터에 서있던 직원분은 우릴 환한 미소로 맞아주었고 나는 체크인을 위해 그녀에게 여권을 건네주곤 잠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어디선가 다른 남자 직원분이 다가와 우릴 담당해주고 있는 그녀에게 자신이 체크인을 맡겠다고 하신다. 프로페셔널해 보이는 말투와 태도는 처음 본 사람임에도 단번에 믿음이 갈 정도였다.
"저희 호텔엔 한국분들이 많이 안 오세요. 여권을 보고 너무 반가워서 제가 체크인 진행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분은 내가 내민 대한민국 여권을 보고 다른 일을 하다가 다가오신 거였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어쩌면 이런 것에 있는지도 모른다. BBC가 선정한 세계 10대 절경을 보는 것도 물론 황홀한 일이지만 우리가 평소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자각하게 해주는 순간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분의 직업 정신, 타인을 존중하는 태도, 주변을 우아하게 만들어주는 어떤 분위기. 이국땅에서 훌륭한 직업인으로 살아가는 다른 한국인에게 이상하리만치 큰 감동을 받고 묘한 연대감을 느꼈다.
어쩌면 여행의 끝에서 몽글몽글해진 마음에 작은 것에 큰 감동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평범한 체크인 절차 안에서 우리 가족을 정성스럽게 대해 주시는 걸 정직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직업이라는 경계에서 벗어나 같은 색의 여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정한 호의를 베풀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이름 있는 호텔의 고객 서비스 매뉴얼이 아무리 체계적이더라도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친절까지 통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순간은 혹시나 우리의 마음이 뒤엉킨 충전선처럼 꼬여있다면 그 표독스러움을 무너트리고 아름다움 안에 오래 머무를 수 있도록 해준다. 이렇듯 좋은 사람들을 만난 경험이 모여 기억을 이루면 나는 그 기억의 조각들을 달콤한 쿠키처럼 가끔씩 꺼내먹으면 되는 것이다.
체크인할 때 쿠키를 주는 호텔은 처음 봤어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