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안의 숨겨진 비밀도시
캐나다 토론토에 숨겨진 지하도시가 있다. 멀쩡한 도시 안에 비밀스럽게 감추어져 있어, 스치듯 지나가는 여행객들은 도시 안에 또 다른 세계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못 보고 지나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곳은 총길이 27km, 면적은 27만㎡에 달하며 토론토의 중심부를 관통하고 있는 거대한 지하도시라고 불린다.
이름은 PATH라고 한다. (Toronto's Downtown Underground Pedestrian Walkway)
그 규모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큰 지하쇼핑몰이라는 타이틀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고 한다. 이 지하도시의 첫 번째 시작점은 1900년도에 T.Eaton이라는 민간 회사가 도시의 메인 빌딩과 값싼 물건을 파는 부속 건물을 지하터널로 연결하면서부터였다. 이후 도시에 지하철이 개통되고 고층빌딩이 들어서면서 다운타운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고, 토론토시 정부가 1969년도에 지하도시를 도시개발계획의 일환으로 포함시켰다. PATH의 실질적인 발전은 이런 과정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현재는 50개 이상의 빌딩과 오피스타워, 6개의 주요 지하철역, 8개의 호텔 등이 연결되어 있고 그 안에는
1,200여 개의 식당 및 상점이 들어서 있으니, 말 그대로 지하'도시'인 것이 틀림없는 것 같다. 이곳에서 일하는 직원은 5,000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 도시계획은 다운타운의 복잡함을 해소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토론토 겨울의 극한 추위와 눈, 그리고 여름엔 무더위로부터 시민들에게 안전한 장소를 제공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그러니, 어쩌면 토론토의 계절성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거친 날씨를 대비해 시민들의 포근한 피난처가 되어주고 있으니 말이다.
각 도시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을 대변하는 장소나 장치를 보는 건 언제나 흥미롭다. 서울에는 뭐가 있을까. 어느 지하철역에서 본 미세먼지 흡입매트가 생각났다. 은색의 작은 쇠구슬이 촘촘히 박혀있는 매트를 저벅저벅 밟으면 무언가를 빨아들이는 윙-하는 소리가 나는데, 미세먼지나 오염물질이 지하철 역사로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고 한다. 어느새 미세먼지가 서울이라는 도시의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된 것이 안타까우면서도 참 여러 가지 노력을 하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서울의 지하철은 특이하게도 많은 구간이 지상으로 이어지는데 그때마다 열리는 문으로 들어오는 대기의 이물질을 생각해 보면, 이 미세먼지 흡입매트라는 것의 효과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게 되기 마련이다. 아무튼 서울에만 있을 법한 이 장치도 외국인들이 보면 신기해할 것 같다.
120년 전 지하터널이 연결된 덕분에 2024년의 우리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토론토 가을의 어느 하루를 가장 쾌적한 방법으로 보낼 수 있었다. 토론토 이야기를 하면 어쩔 수 없이 6년 전에 이곳에 살았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데, 이 PATH도 역시나 나의 수많은 참새 방앗간 중 하나였다. 특히나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는 11월에는 오들오들 떨면서 걷다가도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이 지하도시를 찾아 쏙 들어오기 마련이었다.
특히 점심시간에 오면 오피스 빌딩에서 내려온 직장인들이 한 손에는 샌드위치, 다른 손에는 커피를 들고 언제나 종종걸음으로 지나다니는 모습을 구경하고 바쁘게 움직이는 가게 주인들의 모습을 보는 걸 좋아했다. 이곳으로 들어와 도시 사람들의 삶의 단면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해 보면,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기분이 처지거나 무기력할 때, 이른 아침의 재래시장에 가보라는 건 괜히 나오는 말도 아닌 것 같다.
그나저나 지하라는 단어가 붙었으니, 조금은 좁고 답답한 이미지를 떠올리기 쉬운데 PATH는 그렇지 않다. 그저 지상의 모든 것들이 그대로 아스팔트 밑에 존재할 뿐이다. 그러니 이 숨겨진 도시는 주야장천 비가 퍼붓거나 눈이 펑펑 내리는 거침없는 날씨에도 시민들이 아랑곳하지 않고 근사하게 걸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기 마련이다. 게다가 발길 닿는 곳마다 따뜻한 커피를 파는 카페가 즐비하니 더 바랄 것이 없다. 세계 최대 지하도시 덕분에 개인적으로도 토론토의 혹한 추위를 나름대로 잘 지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좋은 기억이 많은 걸 보니 말이다.
생각해 보면 날씨조차 견뎌내야 한다는 느낌이 드는 시기가 있다. 1년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3월은 그저 따뜻한 봄이 오는 것을 시기하는 겨울이 꽃쌤추위로 기강을 잡다가 어쩔 수 없이 서서히 물러나며 계절의 변화를 가장 뚜렷하게 체감할 수 있게 하는 달이었다. 그러나 여느 지하철역에 미세먼지 흡입매트라는 희한한 물건이 나와야 할 정도로 어느새 봄이라는 계절이 미세먼지로 가득 찬 나날들로 이어진다는 것은 꽤 속상한 일이다. 매일 공기의 질을 확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가다 봐도 서울의 대기질을 나타내는 스마일은 웃을 일이 없다. 주황색 얼굴을 하곤 '으'하는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바깥의 환경이 인간으로 하여금 견뎌내야 하는 느낌을 줄 때면 스스로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 (하지만 이 환경은 인간이 만든 것이니 결국 우리가 만들어낸 것들 때문에 우리가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지만) 이럴 때, 나는 덴마크의 휘게, 스웨덴의 피카나 라곰과 같은 개념을 떠올린다. 그저 하루 중에 달콤한 빵을 곁들여 커피를 마시고 좋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상적인 일에 이름을 붙인 것들이다.
일상의 소박한 활동, 따뜻한 분위기, 좋은 것을 즐기는 것 자체에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그 의미를 소홀히 하지 않을 수 있다. PATH처럼 물리적으로 대피할 수 있는 지하도시는 없지만 우리의 일상 속에서 가장 쉽게 취할 수 있는 편안하고 긍정적인 일들에 심리적인 휴식처는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날씨와 무관하게 마음을 근사하게 하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는 건 역시 중요한 일 같다.
여기까지 읽어주셨다면 언제나 깊이 감사드립니다.